33화. 심장이 반응하는 사람
매트리스 장인이 만든 프리미엄 침대 위.
남녀는 서로를 등진 채 누워 있었다. 그 작은 균열을 먼저 메운 건 여자 쪽이었다.
남자의 등에 바싹 붙어 가슴을 뭉갠 후 같은 방향으로 누워 보지만 태윤이 그녀를 밀어냈다. 급기야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집에 안 가니? 그럼 내가 다른 방에서 잘게.”
태윤이 줄래에게 이불을 덮어준 후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빠, 내가 왜 가줄랜 줄 알아?”
질래를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던 남자가 줄래의 처연한 얼굴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처제잖아. 친구 같은 동생이기도 하고. 너무 몰아세우지 말자.’
“왜, 가줄랜데?”
태윤이 몸통을 돌려 의자에 앉아 줄래의 얼굴을 주시했다. 홧김에 줄래의 몸을 범하려 한 죄 때문에라도 최선을 다해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고자 했다.
줄래 역시 태윤의 나른한 얼굴을 가만히 관찰하더니 이내 입술을 실그러뜨렸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알아? 이게 힌트인데.”
어디서 들어봤더라. 태윤이 눈동자를 굴리며 잠시 고민하더니 뭔가가 떠오른 듯 줄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거… 시저(카이사르)가 한 말 아니야?”
좀 엉뚱한 이야기였다. 뜬금없는 질문이긴 했지만 남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는 성공한 듯 태윤이 재차 물었다.
“그게 이름이랑 무슨 상관이지?”
“이 명언, 어디에서부터 시작됐는지 잘 생각해 봐.”
“갑자기 웬 퀴즈야! 머리 아프게.”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머리,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았다. 성격상 오답을 말할 바엔 침묵하는 편이 나았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함께 있는 상대보다 무식한 상태로 남는 게 태윤에겐 끔찍한 일이었다.
그래서 태윤은 다시 방문 밖으로 나가려 했다. 이 대화를 이어가지 않겠다는 나름의 의지를 표명한 거였다.
“터키에 질레란 도시가 있어. 가봤어? 거기 비석에 라틴어로 쓰여 있거든,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하지만 줄래의 그 한마디가 태윤의 발목을 붙잡았다. 처음에는 지금 로마 시대 이야기나 하자는 걸까 싶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갑자기 관심을 끌 만한 촉이 발동됐다.
“가질래가 혹시 그 질레에서 따온 거야?”
줄래가 경쾌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제대로 맞췄다. 평소 가 씨 집안사람들의 이름이 특이하다 싶었는데 정복욕만큼은 시저 만만치 않은 야심가 가 회장을 떠올려 봤을 때 충분히 있을 법한 작명 스토리였다.
“우리 부모님이 거기서 묘비를 보고 온 적이 있대. 그때 행운처럼 언니를 가졌다고 확신해서 가질래라고 지었다네. 웃기지.”
“아니, 생각보다 멋진데?”
사람은 이름대로 산다더니 가질래는 정말 갖고 싶은 여자가 됐다. 태윤이 질래의 이름마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던 그때, 제 앞에 있는 여자가 입술을 삐죽였다.
태윤한테 서운해서였다. 보통 질래의 뜻을 알고 나면 줄래의 이름 뜻도 물어보던데, 이 남자는 참 한결같다. 가질래 이름에 담긴 뜻을 홀로 곱씹기에 바빠 보였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왜 꺼냈는지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그래서 줄래는 자존심을 접었다. 하고 싶은 말 백날 우회해 봐야 알아줄 사람이 아니란 걸 이미 수년의 세월이 알려준 까닭이었다.
“근데 말이야, 내 이름은 그냥 지었대. 언니가 질래니까. 둘째는 줄래라고. 난 그게 화가나! 어떻게 그렇게 성의 없이 지을 수가 있어?”
“질래, 줄래 괜찮은데, 왜?”
“그때부터 차별이 시작된 거야. 아빠는 내가 싫었던 거지.”
줄래의 얼굴에는 지난 울분이 녹아 있었다. 듣고 있자니, 평생을 저런 생각으로 살았나 싶어 조금은 짠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남의 자식 아니고서야, 그런 부모는 없어.”
“얼마나 꼴 보기 싫으면 가줄래로 지었을까?”
태윤은 소파에서 일어나 줄래를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가질래가 주는 이성적인 끌림과는 다른 안쓰러움, 저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에 대한 동질감 같은 거였다.
줄래는 그의 동정심이 싫지 않았다. 태윤이 오빠처럼 자신을 토닥여 줄 때면 행복했다. 슬픔에 젖어 있던 줄래의 얼굴이 한 층 편안해졌다.
“정말 남의 자식 아닐까? 어느 날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어. 근데 그런 느낌 있잖아. 꼭 나랑 연관된 것만 같은 찝찝한 기분 말이야.”
“그거 피해의식이야. 질래에 대한 열등감부터 버려. 그럼 사는 게 지금보단 즐거울 거 같은데. 안 그래?”
남자는 나름 진심을 전했다. 그런데 제 의도와 달리 여자가 꽤나 아파했다.
“나만 그래? 오빠도 이은우, 그 사람한테 질투하고 있잖아!”
당해보니 쓰라렸다. 태윤은 진심도 함부로 전하면 안 됨을 깨우쳤다. 되로 맞자 바로 백기를 들었다.
“그만하자! 어차피….”
“또 피하지? 내가 몰라서 침묵하는 줄 알아? 최지나, 오빠랑 무슨 일 있었던 거지?”
“…….”
“말 못 하네.”
역시나 여자의 심기는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됐다. 태윤은 재빨리 확실한 방어에 나섰다.
“그 여자 얘길 왜 꺼내. 못 본 지 꽤 됐거든?”
“지나랑 잤어? 왜 지나 이야기만 나오면 이렇게 민감해져?”
“이래서 너랑 대화하기가 싫어! 불리해 지면 꼭 별의별 말도 안 되는 얘길 다 꺼내잖아.”
벌컥! 역정을 내듯 매서운 눈빛으로 말하는 남자의 얼굴에서 여자는 진실을 보았다. 줄래는 꾹 다문 입술을 씰룩이더니 이내 비틀었다. 그 냉소가 태윤에게는 불안감의 씨앗이 되었다.
줄래는 홀로 명품 침대에서 벗어나 본다.
남자의 무관심 속에서 덤덤하게 거울을 보며 지워진 메이크업을 재정비했다. 그러면서도 입술은 내내 아무 말 대잔치 중이었다.
“그나저나 길래는 어떻게 사나 궁금하네.”
그런데 의외로 태윤이 길래란 이름에 격하게 반응해 왔다.
“길래? 길래를 알아?”
“응, 두 번째 엄마 아들 있어. 가길래라고. 언니가 엄청 예뻐했는데 잘 사나 몰라. 어릴 때부터 끝내주게 잘생겼었는데, 잘 컸나?”
길래? 어디서 들어봤더라? 순간, 태윤의 머리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사하라 여사의 빈소.
이길래라며 질래를 안은 채 성의 없이 인사하던 놈. 저를 아니꼽게 내려다보던 희고 예쁘장한 한 놈이 마지막엔 저를 이은우라고 소개했다.
설마 줄래가 말하는 길래가 그 이은우일까? 그만큼 흔치 않은 이름이기도 했다.
“가길래, 이길래, 이은우.”
남자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코트를 입은 후 쿨하게 돌아서려 했던 줄래의 고개가 바로 틀렸다. 왠지 설득력 있는 나열이었다.
순간 줄래는 알 수 없는 괴한으로부터 퍽치기를 당한 기분이었다.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CCTV 화면으로 얼핏 본 이은우의 얼굴에서 길래의 얼굴이 매직아이처럼 튀어 올랐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질래는 소름이 돋았다. 오소소, 일시에 전신으로, 쫙! 그 찬 기운이 퍼졌다.
***
닭발집 할머니가 여길 왜?
은우의 눈매가 동그랑땡처럼 휘둥그레졌다.
질래는 이상한 타이밍에 등장한 할머니와 또 어떻게 엮인 건지, 벌써부터 근심스럽다.
GH 일가 사람이라고 하기엔 차림새가 수수했다. 이 집안 특유의 귀족 느낌도 없었다.
“아, 안녕하세요, 어떻게 여긴.”
“휴대폰이랑 반지, 드리러 왔습니다. 메모 남기셨잖아요.”
닭발집 할머니는 꼬깃꼬깃 접힌 종이 쇼핑백에서 최신 기종의 휴대폰과 20여 년이 흘러도 질래의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 있는 길래 어머니의 다이아 반지를 꺼냈다.
족히 20캐럿은 돼 보이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다이아 반지라 들었다. 그 엄청난 위엄에 눈길을 사로잡힌 사이 반지를 든 닭발집 할머니가 질래 앞으로 다가왔다.
“왠지 아가씨 거 같아서요.”
“이, 이게요?”
질래는 얼른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은우가 본능적으로 나섰다.
“드디어 찾았네. 거봐! 내가 닭발집에 있을 거라고 했잖아.”
“닭발집?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내가 닭발집엘 갔다고?”
“아! 미안. 기억 못 하지.”
솔직히 닭발집 할머니의 등장에 묻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낯선 과거 얘기에 혼란스러워하는 질래를 보니 이 이야기는 잠시 미루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은우는 질래 대신에 할머니 손에 들린 다이아 반지를 건네받은 후 기 회장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태윤과 통화를 마친 기 회장이 방으로 들어오자 은우는 질래가 누워 있는 침대 앞에 얼른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감미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눈동자를 포획했다.
“전 재산을 걸었더니, 기억도 못하고.”
남자의 손등이 사르륵 제 볼을 스친다. 쓰담쓰담 토닥이는데, 은근한 스킨십이 핫초코에 빠진 마쉬멜로우처럼 냉한 몸을 달달하게 녹였다. 어떠한 적개심도 갖지 못하게 하는 환한 미소가 눈부실 지경이었다.
“저기 은우야, 어른들 계시는데.”
나지막한 목소리. 가질래가 어느새 순한 양이 다 됐다. 어른들이 있어서 그런지 악바리 가질래가 고분고분해졌다.
“그래서 지금 말하는 거야. 네가 또 까먹을까 봐.”
쿵쾅쿵쾅. 망할 심장이 속절없이 또 요동친다. 부끄럽기도 하고, 좋기도 했다. 다만 저 반지를 받으면 왠지 돌이킬 수 없는 루비콘 강을 건널 것만 같았다.
장소도 시기도 모두 고백받기엔 부적절했다.
“긴장하지 마, 프러포즈는 이런 식으로 안 해. 그냥 돌려주려는 거야. 원래 주인한테.”
“내가 이걸 받았다고?”
은우가 선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이더니 그 반지를 기어이 질래의 약지에 끼웠다.
마치 질래를 위한 맞춤 반지처럼 그녀의 가녀린 손가락에 쏙 들어맞았다. 다이아도 제 주인과의 재회에 감격한 듯, 유독 길고 하얀 질래의 손가락에서 은은하게 빛을 발했다.
“마음을 끼운 거야. 가질래 손에.”
“이렇게 귀한 걸 받을 순 없어.”
“이미 받은 걸, 물릴 순 없어, 기억 못 한다고 해서 있던 일이 없던 게 되는 건 아니잖아?”
“…….”
“있던 마음이, 없어지진 않는다고.”
은우는 다이아 반지가 끼워진 여자의 손을 들어 그녀의 가슴 위에 얹었다.
“봐, 심장이 반응하잖아. 날, 알아보잖아.”
“…….”
“머리는 잊었어도, 가슴은 나를 알고 있다고.”
은우의 말을 부인할 수가 없다. 기억은 없는데, 열광하듯 펄떡대는 가슴이 정말 은우의 손짓에 감응했다.
눈물이 흘렀다. 무섭고, 두렵고, 알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마치 첫맛은 달콤하지만 끝 맛은 쓴, 높은 도수의 칵테일 한 잔을 들이켠 것만 같았다. 독배일지 축배일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예쁘다. 잘 어울려. 손가락 살 빠진 거 봐.”
은우가 촉촉하게 차오르다 못해 끝내 터져버린 질래의 눈물을 정성스레 닦아줬다.
그 모습을 제집에서 지켜봐야 하는 기 회장은 그저 기막힐 따름이었다. 은우를 GH 일가 사람으로 키워야 하는데 내심 걱정도 됐다.
태윤에게 하루만 시간을 달라고 말했지만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인지 판별조차 안 됐다.
과거 기 회장 같았으면 무조건 떼 놓으려 수단과 방법을 안 가렸겠지만, 아들을 잃은 지금은 모든 게 부질없었다. 일단 은우의 생각부터 들어봐야겠다.
“그래서 어쩌려고 이러니?”
기 회장의 묵직한 한 마디에 은우가 질래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제 손가락을 맞물리듯 넣었다. 잠시 천장으로 시선을 돌려 생각을 정리한 후 진중하게 기 회장을 바라봤다.
“회장님, 한 가지만 여쭤보고 싶습니다. 혹시 제가 GH 일가 사람이 되면 질래를 지키는 데 수월합니까? 아니면 걸림돌이 됩니까?”
“그건….”
기껏 의중을 물었더니 더 어려운 질문을 되물어 온다. 기 회장 역시 그 어떤 일보다 신중하게 대답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고민되신다면 제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저의 1순위는 가질랩니다.”
은우의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에 기 회장의 미간이 내천(川) 자를 그렸다. 질래 역시 제가 끼어들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아 연신 마른 침만 넘겼다.
“질래한테 올인하는 절 받아들일 수 있다면 GH 일가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혹 그럴 수 없다면 저 역시 GH그룹 사람이길 포기하겠습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이게 변치 않을 제 결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