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질래요-32화 (32/84)

32화. 사냥당하기 좋은 날

유부녀. 희망 고문이 싫어서 꺼내든 필살기였는데 재혼으로 응수하다니.

거칠고 저돌적인 수컷, 나쁘진 않은데, 이번엔 너무 갔다 싶다.

은우는 이미 알고 있는 걸까. 제가 태윤의 아내란 것을.

“재혼? 거기까진 상상도 못 했네.”

여자의 헛웃음에도 결코 밀리지 않는 남자였다.

“이혼하고 와! 초혼인 내가, 9살이나 어린 내가, 품어 줄게, 이렇게.”

흐읏, 찌릿찌릿. 발끝과 발끝이 맞닿아 버려서. 심장이 쿵! 저 밑까지 추락해버렸다. 설렘이란 심지에 기어이 불을 붙인 남자였다.

처음에는 가볍게 툭툭, 입술과 입술을 맞대더니 곧바로 입술 안으로 제 혀를 밀어 넣었다. 흡! 잇새가 어느새 쫙 갈렸다. 남자의 타액이 입안 구석구석에 사탕 굴러가듯 짜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부드럽고 달달했다.

이정도면 증명된 셈이다. 사하라 여사 장례식장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 남자와의 스킨십을 은근 기대하고 즐겼다는 점 말이다.

질래의 혀가 본능적으로 움찔거릴 정도로 뭔가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 절묘한 타이밍에 남자가 돌연 키스를 뚝 멈췄다.

왜, 하고 물을 만큼 아쉬운 순간, 짜르르 윤이 흐르는 여자의 머리칼을 은우가 큰 손으로 쓸어내렸다.

뚝뚝 떨어진다는 허니 버터 맛 눈빛. 과자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단짠의 매력을 한가득 품고 있는 이은우란 남자가 이제 무서울 지경이다.

너무 좋아질 것 같아서… 두려웠다. 너무도 달콤해서.

“불륜이야! 알아?”

“그래서? 키스하면 안 돼? 법적으로 부부인 거 눈으로 확인했어?”

“…….”

태윤이 혼인신고를 했다는 말만 들었을 뿐, 사실 확인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태윤이 허투루 그런 말을 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말이 없네, 그럼 여긴?”

찔꺽찔꺽.

음란하고 방탕한 소리. 은우가 질래의 귓바퀴를 빨아대기 시작했다. 꼿꼿하게 세운 혀끝을 쑤욱 집어넣었다가도, 잘근잘근 씹으며 기묘하게 자극했다.

“어, 어쩌려고 이래? 재혼이 무슨….”

“불륜? 이 정도면 이혼 사유가 되나 해서. 한 침대, 한 이불… 그리고 키스.”

“뭐 하는 거야?”

여자의 귓불을 지분대던 남자의 열기가 목선을 타고 내려왔다. 뭔데 이리 자릿자릿, 야릇한지 모르겠다. 츄르릅, 춥춥. 야한 소리가 꽤나 경쾌하게 들렸다. 스카이다이빙을 처음 접했을 때의 그 액티비티함. 하지만 상공에서 지상까지 추락하는 데는 엄청난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

마치, 한때는 남매였던 남자와 경쟁사 집안 침실에서 야한 짓 중인 지금처럼, 그것도 골반과 다리가 온전치 않은, 매우 무방비하고 연약한 상태에서 말이다.

딱, 사냥당하기 좋은 날이긴 했다. 하지만 윤태윤 마누라로 사느니, 이렇게 망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느새 은우가 환자복을 적셔온다. 흐으읏, 하필이면 벌떡 선 유두가 있는 그곳을 정성스레 핥았다, 흡입한다. 옷이 축축해 질만큼, 젖꼭지가 환자복 위로 비칠 만큼.

하! 어떡하지?

회복 중인 골반이 들썩일 것만 같았다. 이미 곱게 오므라든 발끝. 침대 시트를 꽉 쥐고 있는 양손. 뭘까? 이 익숙한 황홀함은.

한 번도 남자에게 내보인 적 없던 가슴이었다. 그런데 왜 이 남자에게 이렇게 쉽게 허락하는 것일까.

아프다고 쉬운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남자의 뺨을 어루만지고 싶던 그 손으로 있는 힘껏 은우를 밀어냈다.

“내가 왜 이혼해야 되는데?”

“몰라서 물어? 윤태윤 싫어하니까.”

“나, 이혼 안 할 건데?”

“…왜?”

은우는 당연히 질래가 가장 원하는 게 이혼일 줄 알았다. 그런데 이혼을 안 한다니.

여자의 은밀한 열매를 탐하던 은우가 모든 행동을 정지한 채 멀뚱멀뚱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왜지? 남자의 얼굴이 갑자기 귀여워 보인다. 방금까지 저를 사냥하던 밀림의 왕자가 돌연 이제 막 발정을 알아버린 아기 사자처럼 보였다. 사정없이 섹시하다가도 진한 수컷 향이 무색 할 만큼 순간순간 보호 본능을 유발시키는 남자였다.

“그래서, 네 출발선이 여기야?”

질래가 침대 시트를 검지로 꾹꾹 눌렀다. 성인답게 제법 야한 출발선이었다.

“왜? 왜 이혼 안 한다는 건데?”

다른 질문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태윤과의 혼인관계를 유지하겠다고 선포한 것만으로도 은우에겐 큰 충격이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남자의 마음은 화급해진다.

“사고 전에 나랑 말이지….”

“혼인취소 소송 걸 거니까. 내 인생에 이혼 따윈 없다고.”

“아!”

그제야 경직된 은우의 입매가 싱긋, 양쪽으로 길게 호선을 그렸다. 누가 밀당의 여신 아니랄까 봐. 무지함에서 온 패배감을 숨기려 은우는 재빨리 그녀의 어여쁜 얼굴 사이로 양팔을 내렸다. 천천히 여자의 입술로 향했다.

“너한테 간다고 한 적도 없어.”

“누가 뭐래? 그래서 내가 가고 있잖아! 도망갈 테면 가 봐.”

“짓궂어.”

“고개 돌리면 항상 나만 보일 테니까. 지금처럼.”

쪽. 그의 입술이 얄궂게 따뜻했다. 아쉽게도 아주 잠시 동안이긴 했지만, 헤어지기 싫은 입술이었다.

딸각.

불시에 방문이 열렸다. 놀란 은우가 그대로 질래와 입술을 뭉갠 채 석고상처럼 굳어 버렸다. 누가 봐도 뭔 짓을 한지 알 만큼 남녀의 발그레한 얼굴이 밀접하게 붙어 있었다.

콜록콜록, 인위적인 기침 소리가 석고상처럼 뻣뻣하게 응고된 두 사람을 일시에 녹였다. 은우는 얼른 질래 옆에 어색하리만큼 반듯하게 누웠다.

“일어났구나, 굳이 침대 두 개 두고 그렇게 붙어 있어야겠니?”

아무리 혈기 넘치는 청춘남녀라지만 병상에서조차 떨어지기 싫은 만큼 애절한 사이였던 걸까. TY그룹 태윤의 아내인 질래와 제 하나뿐인 손자가 입술을 맞대고 있는 모습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덩달아 기 회장의 고민도 깊어졌다.

하필 그 상대가 강화그룹의 장녀, 가질래라니.

질래 역시 몸만 건강했다면 어디론가 소멸하고픈 심정이었다. 기 회장 눈에 얼마나 뻔뻔해 보일까? 얼마나 철없어 보일까? 알고 보면 저도 피해자인 것을. 왠지 모르게 울컥한 게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질래는 보다시피 못 움직여요, 제멋대로 이런 거니 오해 마세요.”

다행히 은우가 그 원통함을 조금이나마 변호해 주는가 싶었지만, 여전한 찜찜함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질래의 마음을 읽은 건지, 은우의 항변은 계속됐다.

“질래는 나랑 사귄 것도 기억 못 해요. 회장님.”

“그럼, 내 손자가 지금 가질래 씨를 성추행이라도 했다는 말인가요? 당신이 이야기해봐요. 남 실장 말대로 의식 돌아 온 건 확인했고. 그럼 뇌사도, 식물인간설도 다 유언비어였던 건가요?”

상황 정리가 필요했다. 혈연임을 주장하는 두 사람 때문에 강펀치를 연이어 맞은 것도 모자라 이번엔 사귄 사이라니.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질래에겐 어느 것 하나도 진실처럼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수면유도제에 빠져 이상한 꿈을 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똑똑!

돌발 상황은 쉼 없이 몰아쳤다.

똑똑!

이 호화스러운 저택 병실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동시에 세 사람은 모두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서 가장 먼저 입술을 뗀 건 문밖의 사람을 초대한 기 회장이었다.

“왔나 보네. 은우야 네 손님이란다. 줄 게 있다는구나.”

“저를요?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보면 알겠지…. 들어와요. 아! 잘 안 들리려나?”

기 회장이 문 쪽으로 저벅저벅, 느리게 이동했다. 마치 귀족을 연상케 하는 고고함이 담긴 걸음걸이였다.

문제는 그 순간까지도 질래의 교통정리가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살기 위해 무작정 은우 손을 잡았는데, 뭣도 모르고 불 속에 뛰어든 나방은 도리어 제 자신이었던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제 운명이 갈수록 두려워졌다.

그사이 문 앞에 다다른 기 회장이 문고리를 천천히 돌렸다. 열린 문 사이로 서서히 그 의문의 실루엣이 실체를 드러냈다.

질래는 모르고, 은우는 잘 아는 사람.

그 손님을 본 순간 은우는 그만 아연해서 입술이 살그머니 벌어졌다.

대충은 상황 파악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을 보는 순간 어쩌면 제 과거와 현재 사이에 숨겨진 비밀이 훨씬 더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미래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고요함에 숨 막힐 즈음 침묵을 깨는 극적인 소리가 들렸다. 지나치게 넓은 방 안에 누군가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 휴대폰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기 회장이었다.

***

누가 봐도 나 화났어요, 딱 그 표정이다. 눈썹은 앵그리버드와 닮은꼴에, 격양된 목소리에는 분을 꾹꾹 눌러 담았다.

아내와의 신접살림을 꿈꾼 신혼집에서 태윤은 지금 누군가와 통화 중이다.

“기 회장님. 제 아내, 환잡니다. 환자를 빼 간다는 게 말이 돼요?”

-빼 갔다니, 경솔하군요. 테러 현장에서 안전하게 구한 건데 그렇게 말하니 섭하네요.

“구했다고요? 와! 강남 GH병원에도 없던데 어디다 숨긴 겁니까?”

-왜 숨겼다고 생각하죠? 어쨌든 내일 밤까지 시간을 주시죠. 그때까지 결론을 낼 테니까.

주거니 받거니 하던 대화에 잠시 공백이 생겼다. 어째서 제 가족 문제를 GH그룹 쪽에서 간섭한단 말인가. 태윤은 숨을 고른 후 입술을 열었다. 좀 더 근본적인 걸 따져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큰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저희 계열사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인수해 갈 때부터 좀 의아했습니다. 왜 그 친구를 돕는 거죠? 이은우, 맞죠?”

-글쎄요. 알만한 일이면 차차 알게 되지 않을까요. 윤 본부장.

제길! 태윤은 순백의 반투명한 대리석 벽을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다. 화풀이할 때가 없어서 그런지 제 눈앞에 보이는 여자마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왜 하필 함께 있는 사람이 가질래가 아니라 또 가줄래인지.

더 싫은 건, 아닌 건 끊어내면 그만인데 자꾸 저 여자에게서 가질래의 모습을 찾아내고 있는 자신이었다. 그릇된 중독이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답답함이 결국 꾹 눌렀던 성욕을 폭발시켰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고, 이제는 무슨 사이인지도 모를 만큼, 가줄래와 저는 엉망진창이었다.

그래서 가질래를 설핏 닮은 여자의 옷을 거침없이 벗겨냈다.

입술을 뭉개고, 젖가슴을 쥐어짜고, 좀 더 제 언니와 닮은 표정을 지어주길 바라며, 바쁜 호흡을 내뱉는 여자한테서 빼앗긴 욕망을 배상받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가질래가 아닌 줄래의 얼굴이 보였다. 보형물을 넣은 넉넉한 가슴도 왠지 거부감이 들었다. 연갈색 유두도, 애써 연기하는 저 표정도, 빛바랜 음부도, 저를 향한 진심도 다 추잡했다.

어떻게 하면 이 추악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줄래의 좁고 깊고 은밀한 구멍 속에 제 욕정을 넣기 직전, 태윤이 육욕을 거뒀다.

“미안, 잠시 미쳤나 봐.”

“하다 마는 새끼가 더 나빠.”

“뭐 새끼?”

줄래가 속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으며 태윤을 노려봤다.

“넣지만 않으면 깨끗한 거야? 욕할 만하니까 하지.”

태윤은 줄래의 반박에 고개를 푹 숙였다. 언제까지 가질래의 얼굴을 떠올리며 줄래와 이렇게 엮여야만 하는 걸까.

“우리 집에 오지 마, 아무리 친했어도 나도 남자니까.”

“오빠가 남자니까, 계속 옆에 있는 거야. 나도 좀 여자로 보라고.”

“하!”

태윤은 한강이 보이는 통유리에 서서 긴 한숨을 토해냈다. 누군가를 향한 집착이 무섭게 변질되어가고 있단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줄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분명한 건 여기서 더 깊어질수록 서로를 피폐하게만 만든다는 거였다. 순간의 황홀경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사이였다.

아마도 가질 수 없는 걸 탐내버린 죄. 그 대가를 이런 식으로 치르나 보다. 포기하면 마음만큼은 지금보다 자유로울 텐데. 문제는 포기가… 안 된다.

줄래는 그런 근심 가득한 태윤의 얼굴을 보는 게 가슴이 아팠다. 차라리 가질래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모두에게 이로울 것만 같았다.

지나친 탐심이 자신들을 망가뜨린다는 걸 알면서도 결코 아무것도 놓을 수 없는 두 사람.

같은 공간에서 있으면서도 남녀는 여전히 동상이몽 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