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그에게 포획되다
은우의 일방적인 통보에 기 회장은 체한 듯 속이 부글부글, 끓다 못해 말문이 꽉 막혀버렸다. 오죽하면 목까지 메어온다. 할미의 심정은 털끝만큼도 고려하지 않은 손자의 결단이 가시처럼 따가웠다.
제 아들이랑 그야말로 판박이였다. 표정도, 얼굴도, 생각마저도 어쩜 저렇게 닮은 거지? 울꺽! 설움이 복받친다. 그렇다고 이성적인 판단을 놓쳐서도 안 됐다.
“가질래 씨 마음도 들어봐야지, 그렇게 일방적으로, 응?”
“이미 벌린 춤판입니다. 그렇다면 뭐든 책임져야죠, 그게 대기업의 미덕 아니겠습니까?”
역시나 말이 안 통했다. 이렇게 대 이은 외곬 인생이 또 있을까.
꾹 억눌렀던 기 회장의 분노 게이지가 점점 상승했다. 어째서 몇 대째 이어온 가문보다 본인들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건지. 꿈틀거리는 기 회장의 진노한 눈썹을 본 은우가 제 안에 가둔 질래를 손에 힘을 실었다. 일종의 시그널이었다.
“유부녀를 껴안고, 빨고, 키스까지 했음, 책임져야죠. 제가.”
“…….”
“질래를 사랑합니다.”
철컹.
단 몇 초. 은우를 제외한 그 공간에 있는 모든 이들의 얼굴이 홧홧해지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질래의 심장이 그에게 포획되는 시간이었다.
전신이 화끈화끈 거리고 침상이 뜨거운 불판 같았다. 어른들 앞이라 그런지 더더욱 긴장이 됐다.
기 회장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좌불안석이 따로 없다. 어색한 시간만이 무색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누가, 내 핏줄 아니랄까 봐! 그 당당함이 맘에 들어. 그리고….”
왠지 뒷말을 듣기가 두려웠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은우는 깍지 낀 양손을 주무르며 쫄리는 마음을 최대한 감췄다.
“부럽구나. 그럴 수 있다는 게.”
기 회장 입에서 의외의 말이 떨어졌다. 한평생 원하는 건 다 누려본 사람이 뭐가 부럽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은우가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갸우뚱하자 기 회장이 다음 말을 이었다.
“사람이 사람한테 열렬히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거, 반은 성공한 삶이지. 늙으면 그런 게 그립거든….”
“…….”
“몸도 마음도 감성도 약해져서 할 수 없는 게 있어. 그건 내 전 재산을 걸어도 살 수 없는 거니까.”
닭발집 할머니도 기 회장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느릿느릿 주억였다.
“보면 볼수록 회장님 젊은 시절하고 많이 닮았네요.”
“말 편히 해도 된다니까 끝까지 회장님은.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언니라고 부르래도 참, 복주 네 고집도 어지간해.”
둘 사이에는 우리가 모르는 꽤나 끈끈한 친밀감이 있었다. 두 노인의 입가에 핀 미소만 봐도 분명 하루 이틀 알고 지낸 관계가 아님을 짐작게 했다.
“대체 두 분은 어떤 관계이시길래.”
그러고 보니 닭발집이 부모님 신혼집이라고 하지 않았나. 궁금증은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만 갔다.
“우리?”
노인 둘이 서로를 그윽이 바라보더니 마치 짠 것처럼 동시에 픽, 실소를 터뜨렸다. 주거니 받거니, 애정 가득한 따뜻한 눈빛을 교환한 후 기 회장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은우 넌, 알고 보면 친할머니 부자야, 두 명이거든.”
“…음. 두 분 다 저랑 연관 있단 뜻이죠?”
기 회장과 닭발집 할머니가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동시에 고개를 아래위로 가볍게 움직였다. 연배로 치면 기 회장이 한참 위일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하는 행동이 꼭 쌍둥이 빌딩 같았다.
대체 여기엔 또 무슨 기구한 사연이 담겨 있을까. 은우가 질문도 하기 전에 기 회장이 먼저 은우의 마음을 스캔했다.
“이야기하자면 복잡해, 보통 인연이 아니거든. 평생을 간직해 온 비밀, 들어볼래?”
은우가 질래의 손을 꼭 잡은 채로 기 회장을 주시하자 그녀가 스스로 연 과거의 포문 속으로 그들을 데려갔다.
***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니까 53년 전 이야기다.
이제 막 열아홉 살. 아직은 앳돼 보이는 소녀인 ‘복주’가 서른을 코앞에 둔 ‘훈희’ 앞으로 갔다.
“대가를 바라고 살려 준 건 아니야. 그냥 살 사람이니까 산 거지.”
아홉 살 터울인 복주와 훈희가 마주친 건 불과 한 달 전.
제 동생을 살려 달라며 애원하는 복주의 모습을 종합병원 앞에서 목격한 후, 그들의 치료비를 몰래 대준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60년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혼란기를 겪었던 대한민국엔 홍역과 백일해 등 각종 전염병이 돌아 많은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가난이 죄였던 복주 역시, 이 저주를 피해가진 못했다.
전신 여기저기 벌겋게 꽃핀 제 하나뿐인 사촌 동생을 살리고 싶은데, 공장에서 벌어온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때 우연히 저들에게 손을 내민 게 바로 GH 물산의 외동딸, 훈희였단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
물론 행운이란 건 모두에게 동일하게 베풀어지는 게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치료가 너무 늦은 탓에 사촌 동생은 결국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다.
대신 홍역 잠복기란 걸 뒤늦게 안 복주만이 그나마 치료 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6.25 전쟁 고아였던 복주는 이후 훈희의 분신인 양 졸졸 따라다녔다. 결국 그녀의 복심이 되어 잡일을 도우며 훈희의 일거수일투족을 친동생처럼 함께했다. 이후 훈희가 유부남과 재혼해서 미국으로 떠났을 때도, 복주는 훈희를 따라서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에서 훈희가 경영학 박사 과정을 밟는 동안 복주는 그녀의 의붓아들인 은구와 훈희가 낳은 유일한 아들이자 은우의 아버지인 은철이의 유모로 지내며 보석 디자인 공부를 할 수 있었다.
15년 후 연구원이었던 훈희의 남편이 과로사로 졸도하면서 기 회장은 두 아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당시 복주는 미국 최고의 보석회사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던 터라 훈희를 따라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오랜 시간 동고동락했던 두 사람이 처음으로 헤어지는 순간이었다.
이후 미국에서 홀로 보석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쌓던 복주는 제가 10여 년도 넘게 키우다시피 한 은철이가 죽었단 소식에 오랫동안 우울증을 겪었다고 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몇십 년 만에 한국 땅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가출한 은철이가 아내랑 몰래 차렸다는 닭발집으로 무작정 들어갔다. 저는 좋아하지는 않지만 은철이가 그렇게도 좋아했던 그 닭발을 만들며 하루하루를 살아온 게 지금까지 이어진 거라고 했다.
복주는 그제야 인정했다고 했다. 어린 시절 제 새끼처럼 키운 정이 보통이 아니었구나. 어쩌면 은철이와의 기억이 지금까지 저를 살게 해준 유일한 추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훈희를 일부러 따라가지 않았던 것 같았다. 혹시라도 은연중에 은철이를 탐낼까 봐, 그 마음이 두려웠었다.
그런데 지금 제 눈앞에 그 아이를 닮은 손자가 있다니. 훈희에게도 복주에도 은우는, 몇십 년째 가뭄이었던 마음의 밭에 내려진 단비 같은 존재였다.
그런 아이가 복주를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제 존재를 알게 된 은우가 무슨 말을 할지 복주는 한껏 긴장됐다.
“왜 저희 엄마 모른다고 했어요?”
전혀 예상치도 못한 질문이었다.
“은우 씨, 엄마를요?”
복주는 기억을 더듬어 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은우가 제 어미의 이름을 물어온 적이 없었다.
“최윤하 씨요.”
“…최, 윤하?”
생소한 이름에 닭발집 할머니의 고개가 모로 기울자 기 회장이 10여 년 전의 오해를 대신 풀어줬다.
“네 애미 개명했다. 복주는 본명밖에 몰라. 지선란이라고.”
“엄마가 지 씨였다고요?”
“아마 최윤하로 개명하기 전 은철이가 복주한테 네 애미를 소개해줬던 모양이더구나. 은철이가 복주도 잘 따랐으니까.”
“다들 사연 풀면 책 한 권씩 나오겠네요, 아주.”
은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지압했다. 그 순간까지도 매우 부담스러웠던 건 바로 제 행동 하나하나를 사랑스러워 죽겠단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두 할머니였다.
“은우 넌 내가 벌써 편한가 보구나. 그런 말도 하고.”
“그게 아니라. 전 제 입장 분명히 말씀드렸는데요.”
늘 제 시선 안에 있던 질래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침대에 홀로 누워 있는 그녀가 안절부절,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길래 은우가 그 부드럽고 야들야들한 손에 용기를 실어줬다. 말없이 여자의 손을 꼭 쥐었다.
“…그래서 어쩌실 건데요? 전 이 손, 절대로 안 놓을 건데.”
손을 놓으려는 여자와 절대 안 놔주려는 남자.
질래의 마음이 또 조마조마해진다. 은우가 기 회장한테 어떤 존재인지는 충분히 알았기에 이 손을 붙들고 있어도 되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일단은 어른들 앞이란 이유로 그 손은 빼려 했다.
그런 청춘남녀의 꽁냥질을 기 회장도 넋 놓고 바라봤다. 결정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 내가 뭘 해야 할지 이제 알 거 같네.”
그 말 이후 기 회장은 질래가 누워 있는 침대 쪽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은우와 질래 모두 초긴장 상태였다.
질래는 기 회장의 눈길을 피하고 싶지만 그녀가 이미 침대에 걸터앉은 후였다.
옴짝달싹도 못 하는 민망한 처지. 그래서 질래는 온갖 예의로 꽁꽁 무장했다.
“여기서 돌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저희 강화그룹에서도….”
기 회장이 덥석, 다이아몬드가 반짝이고 있는 질래의 왼손을 잡았다.
“지금 GH그룹 대표로서 질래 씨를 보고 있는 게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민폐를 끼치려던 게 아닌데 이렇게까지 도와주셔서….”
입에 밴 업무상의 멘트가 좔좔 쏟아졌다. 그러자 기 회장이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돌려 말하지 않을게요. 그 반지, 복주가 디자인한 거예요. 물론 보석은 내가 줬고요. 그걸 은철이가 은우 엄마한테 선물해 줬었죠.”
이런, 반지의 출처를 듣고 보니 이마저도 끼고 있기 더더욱 불편해졌다. 얼른 제 약지 끝에 매달린 다이아몬드를 빼내려 하자 기 회장이 그 출구를 막아버렸다.
“은우 마음, 빼지 마요. 내 손을 이미 떠난 물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부담스러운 반지를 어떻게 제가….”
“이제 가질래 씨 건데, 알아서 하셔야죠.”
기 회장이 질래의 손에서 반쯤 빠진 반지를 다시 손끝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곤 찰랑거리는 그녀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어내린 후 조곤조곤 부드러운 목소리로 심부를 쿡쿡 찔렀다.
“왜 한 달 전에 그 반지를 받았었는지, 자신의 마음을 믿어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