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3화 (3/184)

마차 안에 오도카니 앉은 디아나는 소녀답지 않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열일곱의 디아나는 곧 황태자 루카스와 처음 만난다. 디아나는 황태자비로 내정된 상태였다. 어릴 때 병약했던 탓에 그나마 열일곱으로 미뤄진 것이다. 트리샤보다 보기 싫은 게 루카스였지만, 어차피 서로의 조건으로 맺어진 혼약이었다. 지금의 디아나는 그것을 뒤바꿀 힘이 없다.

“……하지만 그놈이 날 차게 할 수는 있지. 그 성질이라면, 아주 쉽게.”

이미 막장을 보고 온 디아나는 금세 상황에 적응했다. 뭐라도 바꿀 수 있을 때 멀어져야 한다. 이 책이 회귀물이라는 것은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적어도 지금부터는 자신이 선택할 기회가 있었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시종이 정중하게 마차의 문을 열고 장갑을 낀 손을 디아나에게 내밀었다. 디아나는 어떤 귀부인보다 품위 있게 그 손을 잡고 내렸다.

카를 공작가의 영애라지만, 보기 힘든 우아한 처신에 모두가 속으로 감탄했다. 그건 사실 디아나가 이미 황후로 사는 생활을 질리도록 해서 익숙해진 몸짓이라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이곳에서 기다리시면 곧 황태자 전하께서 오실 겁니다.”

디아나가 말없이 고갯짓하자 시종이 물러갔다. 정원에 마련된 티테이블엔 황실 특유의 정취가 물씬 묻어났다.

“오랜만이네.”

씁쓸한 혼잣말이 나왔다. 이 정원은 원작의 디아나가 아끼던 장소였다. 물론 루카스가 트리샤를 위해 대대적인 공사를 해 버리기 전의 이야기다.

둘이 좋다고 웃으며 이 정원을 뛰어다니던 광경을 떠올리니 차가 아니라 술을 들이켜고 싶었다.

“그건 절대 다시 못 봐.”

이 이야기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포기했다. 하지만 도저히 원작의 미친 짓을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떤 비극이든, 그 고구마보단 나을 것이다. 두 번 다시 그들의 우정을 가장한 안달 나는 연애질에 끼고 싶지 않았다.

“황태자 전하께서 납십니다!”

반갑지 않은 소리가 들렸다. 법도대로면 디아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춰야 했다. 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다. 애초에 잘 보일 생각은 추호도 없는 상대다.

“영애께서는 예를 갖추시지요.”

시종장이 낮게 일렀지만, 디아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들리지 않는 체를 했다. 그러는 사이 벌써 루카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디아나의 시선에 화려한 루카스의 신발이 들어왔다.

“전하, 영애께서 긴장하셔서 예를 잊으셨나 봅니다. 부디 너그럽게 여겨 주시지요.”

그럴 필요 없는데. 디아나는 열심히 변명하는 시종장이 무색하게 삐딱하게 고개를 들어 루카스를 봤다.

“물론이다.”

루카스가 성큼 디아나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디아나와 동갑이니 루카스 역시 열일곱이었다. 루카스의 부드러운 금발이 햇살에 눈부시게 빛났다. 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엔 제 정혼녀를 향한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황태자라서가 아니라, 루카스는 꽤 유려한 미청년이었다. 그러나 그건 디아나에게 아무런 인상도 주지 못했다. 저 미청년의 가면 아래의 무정함을 질리게 겪은 터다.

“저어, 전하…….”

“시종장은 물러가라.”

분위기가 썰렁한 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루카스는 황제가 될 몸이었다. 자신에게 공손하지 않은 영애 따위는 본 적도, 상상한 적도 없을 거다. 그런 황후라면 더욱 안 될 말이었다. 어쩌면 이대로 카를가의 영애가 정신이 이상하다는 소문이 날지도 모르겠다.

“흐음, 그대가 황태자비로 낙점된 영애군.”

루카스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숨기지 않은 채 디아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황태자라는 지위답게 오만한 태도였다.

“소문대로 아름답군.”

그 말에 디아나는 푸른 눈동자를 들어 루카스를 봤다. 아무 감정이 없는 텅 빈 눈동자였다. 그러나 마음에선 이미 괴로운 기억이 떠오르고 있었다.

허울뿐인 부부였지만, 한때 루카스는 저 손으로 디아나를 만지고 탐했다. 그것이 황실이 의무에 불과했다고 해도 몸을 섞었던 남자를 남으로 다시 만난다는 것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 이제 우리 단둘이니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

루카스의 다정한 말투에 픽, 실소가 나왔다.

“그래, 웃으니 더 예쁘군.”

과연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는 루카스다웠다. 성큼성큼 걸어서 티테이블에 앉은 루카스의 노골적인 시선이 디아나의 얼굴로 향했다.

“선대 카를 공작의 여식이라고 했던가.”

“예.”

간신히 입을 연 디아나는 참으로 무성의한 대답을 뱉었다. 하지만 루카스는 오히려 그 점이 신기했는지 눈동자에 한층 호기심이 어렸다. 아무래도 루카스의 화를 사는 작전은 어려운 것 같다.

“이름은?”

“디아나 카를입니다.”

“디아나…… 예쁜 이름이야.”

햇살이 쏟아지는 정원에서 디아나의 백금발이 화사하게 일렁였다. 신비로운 푸른 눈동자는 여태 루카스가 봤던 어떤 사람보다 깊었다. 인형처럼 아름다운 소녀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대도 이름처럼 충분히 아름답다. 나의 비가 될 자격이 있어.”

황태자비는 루카스 본인이 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병석에 누운 황제를 대신해서 어머니인 황후가 모든 것을 결정했다. 그래서 큰 기대가 없었는데, 막상 만난 디아나는 무수한 구슬 속의 보석처럼 반짝였다. 뭐든 가지려면 최고를 가져야 한다는 루카스의 성미에 딱 맞는 것이다.

“디아나, 그대가 황태자비가 된다면 나도 정을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루카스는 그때나 지금이나 오만하고 제멋대로였다. 그는 그렇게 태어났고 여태 그렇게 살아왔다. 소름이 끼치도록 변하지 않은 성미였다. 디아나가 그 책에 들어간 것은 이미 황후가 된 후로, 열일곱의 루카스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었나 보다.

“그건.”

디아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장밋빛 입술이 벌어지자 루카스의 시선이 온통 그 사이로 꽂혔다.

“모르는 일이죠.”

“허?”

루카스가 황망한 소리를 뱉었다. 황태자비로 내정된 영애가 감히 저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믿기질 않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의외로 불호령 대신 질문이 날아들었다. 그건 루카스가 아직 트리샤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해 봐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곧 죽고 못 사는 영혼의 단짝을 만날 텐데, 지금의 디아나를 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초면에 알 수 없으니까요.”

“어쨌든, 난 그대가 마음에 들어. 그러면 된 거 아닌가?”

디아나의 기다란 속눈썹이 눈가에 그늘을 만들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자꾸 괴로웠던 기억을 상기시켰다. 가장 화나는 부분은 결혼 초기 디아나가 루카스를 남편으로 받아들였단 사실이다. 디아나는 진심이었다.

“글쎄요.”

처음에는 루카스도 디아나에게 관심을 가졌다. 나름대로 다정한 남편인 체를 하기도 했다. 아무것도 몰랐던 디아나는 그게 사랑인 줄로 알았다. 그저 지나가는 변덕과 흥미라는 것을 알아챘을 때는 마음이 갈가리 찢긴 후였다.

“사람이 둘이니, 제 의견도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뭐?”

돌려서 말했지만, 뜻은 확실히 전달된 모양이다. 루카스는 불쾌할 때면 제 모후를 닮은 신경질적인 표정을 짓곤 했다. 만일 다른 상대였다면 지금쯤 루카스의 분노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황족을 모욕하는 것은 중죄였다. 디아나는 차라리 죄인이 될 각오까지 한 것이다.

“그대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루카스도 바보는 아니었다. 디아나의 인형 같은 얼굴엔 감정 한 조각도 없었다. 어쩌다 연회에서 루카스와 눈만 마주치면 뺨을 붉히던 영애들과는 전혀 달랐다. 아니, 이런 대접은 태어나서 처음 받아 보는 수준이었다. 누가 감히 황태자에게 이런 본심을 훤히 보인단 말인가.

“지금, 그리 말한 건가? 심지어 내가 그대를 마음에 든다고 말했거늘.”

찡그린 눈썹으로 묻는 루카스를 보자 이 모든 게 바보같이 느껴졌다. 루카스, 정확히 말하면 루카스와 트리샤 곁에서 떠나기 위해서 목숨까지 끊었다. 더 두려울 건 없었다. 제 목을 찌르는 데 아무런 망설임이 없을 정도로, 그들 사이에 낀 삶은 피폐했다.

“어찌 감히 황태자 전하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디아나의 목소리가 담담했다. 루카스는 서늘한 시선으로 그런 디아나를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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