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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4화 (4/184)

4화

루카스가 입가를 비틀었다.

“즉,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 부정하지 않는군?”

침묵도 일종의 답이었다. 루카스는 디아나의 차분한 표정에서 답을 읽고는 헛웃음을 뱉었다.

“감히.”

루카스가 일어서자 햇빛을 가려 그림자가 드리웠다. 디아나는 일부러 루카스를 보지 않은 채 허공에 시선을 뒀다. 저벅저벅, 루카스의 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내가 두렵지 않나?”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두려워해야 하나요?”

디아나가 시선을 들었다. 루카스는 모르겠지만, 디아나로선 불과 얼마 전에 그의 눈앞에서 칼로 제 목을 찔렀다. 그런 짓까지 했으니 이제 와 열일곱의 루카스가 두려울 리 없었다.

“……생각해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군.”

루카스가 손을 뻗어 반짝이는 디아나의 백금발을 매만졌다.

“난, 도발적인 여인도 싫어하진 않는다.”

그 순간 디아나는 치밀어 오르는 거부감에 홱, 몸을 일으켜서 손길을 피했다. 루카스와의 관계는 감정뿐 아니라 몸으로도 최악이었다. 그는 여인에 대한 배려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고 언제나 제 욕구만 채우고 돌아섰다.

“예법을 지키시지요, 전하.”

디아나가 과거의 유감까지 담은 눈초리로 루카스를 봤다.

“왜, 내가 무슨 짓이라도 했나? 반짝이는 게 신기했을 뿐이다.”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디아나를 보는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새로운 것에 대한 욕망이 서렸다. 디아나는 루카스의 눈빛을 보는 순간 과거의 악몽이 더 생생해졌다.

“그래, 결정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정면으로 디아나를 바라봤다. 루카스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디아나의 턱을 움켜쥐었다. 세상 모든 것은 루카스가 손을 뻗으면 쥘 수 있는 것이었다. 디아나도 결국 그런 존재였다.

“난 그대가 마음에 들었어.”

“놔주세요.”

디아나의 단호한 말에 루카스의 입꼬리가 뒤틀렸다. 그 말엔 여러 의미가 있었다.

“싫다면?”

“전 전하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건, 내가 결정한다.”

루카스가 손에 힘을 줘서 디아나의 턱을 치켜들었다. 햇빛 아래에서 디아나의 백금발이 반짝이며 고아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한눈에 들어왔다. 역시 이번에도 루카스는 디아나가 갖고 싶어졌다. 디아나는 참지 못하고 루카스의 손을 쳐냈다. 푸른 눈동자에 경계심과 적의가 그대로 드러났다.

“오만한 여인도 나쁘지 않군. 오히려, 흥미로워.”

루카스는 멋대로 결론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내 앞에서만 보이는 게 좋을 거야. 어마마마는 나처럼 관대하지 않으시거든.”

씩, 루카스가 소년처럼 천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마치 즐거운 장난이라도 치는 것 같은 태도였다.

“어때, 입궁한 김에 정원이라도 산책하겠나. 황실의 정원은 무척 아름답지.”

디아나도 알고 있었다. 황실에서 유일한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곳이 정원이었다. 지금은 트리샤의 취향대로 공사하기 전이라 예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움과 씁쓸함이 동시에 입에 고였다.

“아뇨.”

“산책을 싫어하나?”

“아뇨.”

디아나의 명확한 의도에 루카스는 다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흐음, 뭐…… 좋아.”

루카스는 서두르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것이 될 여인이었다. 그 확신이 주는 오만함이 뚝뚝 묻어나는 시선이 끔찍했다.

“듣기론, 어릴 적부터 병약했다지. 그래서 아직 모르는 게 많은 모양이야?”

빈정거리는 말투가 싫은 투는 아니었다.

“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병이 다 낫질 않았네요.”

그럴 리가 없었다. 황후가 직접 보낸 전의가 디아나의 상태를 확인하고 입궁을 명한 것이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황실의 전의들은 무척 우수하거든.”

“……아뇨,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디아나가 차갑게 잘랐다.

“외출은 아직 무리였던 것 같으니, 이만…….”

“그 전에 한 가지.”

루카스의 집요한 눈빛은 쉬이 디아나를 놓지 않았다.

“어차피 그대는 내 비가 될 테니, 애칭을 정하는 건 어떨까?”

도대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면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는 건가. 루카스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일말의 기대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디아나…… 디나가 좋겠군.”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환청처럼 귓가에 루카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리샤, 리샤…… 우리 리샤. 항상 괴롭게 황실을 울리던 그 애칭도 루카스가 손수 지은 것이었다. 정작 황후인 디아나의 이름은 제대로 불러 준 적도 없는 루카스가 말이다.

“아뇨, 애칭은 필요 없습니다.”

“음…… 도발에도 정도가 있다는 걸 알고는 있겠지?”

루카스가 연이은 거부에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디아나는 이미 미래를 보고 왔다. 즉, 이 삶에 미련이 없었다. 운명을 바꿀 수 없다면 여기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열일곱에 죽음을 각오한 디아나는 남다를 수밖에.

“앞으로는 나의 디나라고 부르겠다.”

“제 이름이 아니니 답하지 않을 겁니다.”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해 보도록 해.”

디아나는 루카스를 보며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했다. 원작의 흐름대로라면 루카스는 트리샤를 만나게 되고 그 활달한 매력에 빠져서 둘도 없는 친구이자 우정을 가장한 진한 감정을 나누는 사이가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디아나가 아무리 애원해도 눈길조차 주지 않을 테니, 이런 관심도 잠깐에 불과했다.

“우린 꽤 사이좋은 부부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군.”

“전하께 더 어울리는 좋은 친구가 있을 겁니다.”

처음으로 디아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희미하고 차가운 비웃음이었다. 루카스는 그 미소에 담긴 감정보단 꽃잎처럼 피어나는 아름다움에 시선을 뺏겼다.

“그리고 전하를 알현한 김에 확실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둘 사이의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았다. 루카스와 트리샤. 그들 사이의 들러리 역할은 사양하겠다.

“저는 전하의 비가 될 수 없습니다.”

루카스가 눈을 가늘게 떴지만, 디아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되고 싶었던 적도 없고, 될 수도 없습니다.”

“내가 아까 정도에 대해서 경고했을 텐데.”

짓씹는 듯한 루카스의 목소리는 그의 본성이었다.

“저를 처벌하셔도 좋습니다.”

“허.”

“죽이시려면 죽이십시오.”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엔 망설임이 한 점도 없었다.

“전, 황태자비가 되느니 죽는 것을 택하겠습니다.”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도발을 넘어서, 믿기지가 않는 소리였다. 루카스는 지금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생각을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네. 저는 완전히 제정신이고, 그게 제 의지입니다. 물론 변할 일도 없을 겁니다.”

단호하게 말한 디아나가 후, 짧은 숨을 뱉었다.

“그럼, 공작저로 돌아가 처벌을 기다리겠습니다.”

디아나는 끝까지 고개를 굽히지 않았다.

“전하를 뵙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랍니다.”

디아나가 돌아섰다. 루카스는 상식을 뛰어넘은 디아나의 행동에 잠시 넋을 놓은 채로 눈살만 찌푸렸다. 방금 무엇을 들은 건지 잘 모르겠다.

“……미친 건가.”

그런 루카스의 혼잣말은 디아나에게 들리지 않았다. 디아나는 간신히 후련한 숨을 내뱉었다. 방금 했던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황태자를 기만한 죄로 죽어도 상관없었다.

“그럼, 이번엔 정말 다시 보지 말자.”

디아나는 회귀 전과 같은 말을 한 후에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디아나로 살면서 처음으로 한, 속이 후련한 행동이었다. 열일곱의 디아나는 더는 순진하지도, 사랑을 믿지도 않았다. 이제는 참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죽음까지 겪은 후였다. 이제 두려울 것은 없었다.

***

황태자와의 첫 번째 만남을 치른 디아나가 공작저로 돌아왔다. 마중을 나온 샬롯부터 모든 이가 디아나의 소감을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당사자인 디아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가씨, 많이 피곤하세요?”

태어났을 때부터 이 공작저의 살림을 맡은 샬롯이 걱정스레 물었다. 디아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는 제 방으로 향했다.

루카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알 수 없었다. 디아나 아는 것은 그가 관대하지 않다는 것 정도였다.

“처음 황실에 가셨으니 많이 긴장하셨죠.”

그런 건 아니었지만,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디아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제 옷을 벗겨 주는 샬롯의 시중을 받았다.

“마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기뻐하셨을 텐데…….”

디아나가 어릴 때부터 시녀장과 유모의 역할을 맡은 샬롯이 눈가를 촉촉이 적셨다. 걸음마도 떼지 못하던 디아나가 어느새 이렇게 어여쁘게 자라서 황태자비로 내정됐다니 그보다 자랑스럽고 대견한 일은 없었다. 한때는 병약해서 모두의 걱정을 샀지만, 다행히 혼기 전에 건강을 회복한 것이 축복이었다.

“그럴까?”

“물론이죠, 암요.”

무심한 디아나의 반문에 샬롯은 감상에 젖어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는 원작의 정보를 차분하게 정리했다. 디아나가 황태자비가 된 것은 가문의 명예 덕분이었지만, 정작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즉 명문가의 영애지만, 훗날 외척이 생길 우려가 없는 상대가 바로 디아나였다.

“그만 쉬고 싶어.”

“그러실래요?”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샬롯에겐 그런 디아나가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지만, 아마 긴장을 많이 한 날이라 그럴 거라 여기며 디아나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주었다.

디아나도 내일 당장 어떤 처벌을 받게 되든, 오늘은 편히 쉬고 싶었다.

“어느 부모가 그런 걸 기뻐하겠어.”

거울을 보던 디아나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애초에 부모가 있었다면 황태자비가 되지도 않았을 거다. 황실에서 원했던 것은 그야말로 황후의 자리를 그럴싸하게 채워 줄 품위 있는 장식품이었다.

물론 허울뿐인 황후에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할 권리 따위는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기댈 부모도 없는 디아나가 제격이었을 테다.

“비겁한 인간들.”

디아나는 지긋지긋한 황실을 떠올리곤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런 인간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황태자비가 되고 싶은 영애는 많았다. 남은 것은 루카스가 오늘의 치욕에 어떻게 보복하느냐였다. 물론 그 부분도 딱히 궁금하진 않았다.

“역시…… 그 책을 읽는 게 아니었어.”

후회는 늦다. 디아나는 그 쓰디쓴 사실을 삼키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

그날로 디아나는 감기에 걸렸다. 며칠이 지나도 몸이 무거웠다. 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리고 한기가 드는 것을 느꼈다. 오늘도 몇 번의 뒤척임 끝에 눈을 떴을 땐 샬롯이 걱정스럽게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가씨, 아무래도 황실에 다녀오실 때 무리하셨나 봐요.”

샬롯이 물수건으로 디아나의 뜨거운 이마를 닦아 줬다.

“의원 말로는 단순한 감기니 곧 나을 거래요.”

“응…….”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해서 쉬고 싶었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는 지금 상황에 딱 좋았다.

“공작부인께서 오늘 아가씨를 보러 오신다고 하셨는데.”

“숙모님이?”

“네.”

지금 카를가의 공작부인은 디아나의 숙모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자연히 남은 숙부인 아론에게 작위가 돌아간 탓이다.

숙부인 아론은 책에 파묻혀 세간의 일엔 전혀 관심이 없는 자였고, 공작부인은 그 부족함을 메우듯 지나치게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선친이 살던 공작저에 어린 디아나를 내버려 두고 고용인들에게 육아를 맡긴 채 마치 남처럼 자신들의 삶을 즐겼다. 지금 디아나가 사는 곳은 말만 공작저였지, 공작의 실권은 없었다.

“아가씨가 아프다고 전했는데, 괜찮다고 하셔서…… 말릴 수가 없었어요.”

샬롯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숙모인 실비아는 디아나를 황태자비로 만들고 싶어 했다. 어찌 보면 불행의 시초였다. 심지어 디아나가 황후가 된 후에도 딱히 카를가에 보탬이 되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참 허무한 일이다. 이리저리 이용만 당하고 누구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았던 거다.

“많이 불편하시면, 제가 다시 말해 볼까요?”

“아니, 괜찮아.”

열 기운이 있는 디아나의 얼굴은 어딘지 성숙한 인상을 풍겼다.

“어차피 마음대로 하는 분이잖아. 내버려 둬.”

황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묘하게 달라진 디아나의 태도에 샬롯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디아나가 침대에 기대앉아 의원이 처방한 약을 삼키자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기척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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