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5화 (5/115)

5.

에드윈 R. 엘란츠.

그의 이름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황위 계승 서열 6위, 엘하임 변경백, 랑카드 백작, 르네일 백작, 울스터 자작 등. 제국의 역사와 함께하는 영광의 이름들을 짊어진 그는 제국의 변방을 지키는 든든한 지략가였으며 그가 거느린 세 기사단은 현 황제가 형제들을 모두 제거하고 황위에 오르기까지 큰 공헌을 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1년의 대부분을 엘하임에서 보내지만 황제의 탄생 축하연이 가까워지면 수도로 들어와, 그를 위해 황제가 하사한 호화로운 저택에서 한 계절을 머물곤 했다. 그동안 해 왔던 눈에 띄는 정치적 행보는 황제의 즉위와 함께 잠잠해졌으나 그가 제국 내에서 손에 꼽는 권력자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올해로 서른이 되었으며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에 짙은 보라색 눈을 가진 나른한 인상의 미인이었다. 누구나 군침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을 모두 갖춘 후작은 의문스럽게도 지금껏 미혼이었다.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커다란 흠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의아한 일이었다. 몇 년 전에는 딸을 내어 주겠다는 황제의 제안을 거절한 바도 있었다.

결혼만큼 견고한 동맹도 없었다. 어떻게든 자신의 딸과 결혼시켜 그의 손을 잡고 싶은 속셈이 가득한 자들이 무엇이든 건지고자 그의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르티잔을 부른다든가, 누군가와 밀회를 가진다는 식의 틈을 발견할 수 없자 온갖 저급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엘란츠 후작이 실은 남색가라서 그렇다든가, 그의 성기가 지나치게 작아 숨기고 싶어서 그렇다든가, 혹은 고자라서 그렇다든가. 급기야 평생을 전쟁터에서 산 살인귀인지라 피를 봐야만 흥분한다는 이야기에까지 이르자 소문은 한층 더 추잡스러워졌다.

여자를 두들겨 패서 멍투성이로 만든 뒤에 목을 조르는 것으로 절정에 이른다느니, 시체 애호가라느니. 이쯤 되자 어떻게 해서든 그에게 딸을 안겨 주고자 하던 사람들이 주춤했다. 딸은 동맹을 위해 사용하는 패에 가깝다지만 이득이 아무리 좋아도 그런 흉악한 소문을 달고 다니는 사내에게 핏줄을 시집보내는 데에는 일말의 망설임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사그라들자 소문도 적당히 잠잠해졌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소문인지 몰랐다. 그 아름다운 얼굴에 먹칠을 하는 소문에도 일절 대응하지 않는 후작을 가리켜 혹자는 그게 다 사실이라 조용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던졌지만 그 역시 곧 잦아들었다.

흉악한 소문에도 이득을 좇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자들은 있었다. 잉그램 공작이 그랬다.

나디아는 제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칠 만한 일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코앞으로 들이닥친 것에 허망함을 느꼈다. 물론 공작 부부가 그들의 딸에 관한 것을 결정할 때 나디아의 의사를 반영한 적은 없었지만 막연하게 1, 2년쯤은 더 남지 않았을까 하던 생각이 와장창 깨어졌다.

제 결혼이 한 달 남짓 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쏙 빠질 지경인데 상대가 엘란츠 후작이라는 건 더 충격적이었다.

그는 나디아보다 열두 살이나 더 많았고, 당연히 모두 사실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안 좋은 소문이 무성했으며, 황제의 탄신연 때 아주 먼발치에서 슬쩍 본 게 전부인지라 말 한번 섞어 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그와 결혼하면 나디아는 평생을 살아온 퀘른을 떠나 엘하임으로 가야 했다.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기에 한 달은 너무나도 짧았다. 아버지가 이 결혼의 대가로 무엇을 받기로 했을까? 의미 없는 궁금증이 일었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디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결정 난 일에 그녀가 반기를 든다고 해 봤자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아실과의 관계가 예전 같았다면 어떻게든 발버둥 쳐 보려 했겠지만 이제는 그런 시도를 해 볼 의욕도 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그를 만나러 가지 않은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넘게 지났다. 언제나 만나던 그 장소에 그가 여전히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손끝의 거스러미처럼 거슬리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충동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쑥불쑥 튀어나왔지만 급하게 잡힌 결혼식 준비가 정신없이 몰아닥친 덕에 벗어날 수 있었다.

눈 깜짝할 시간도 없으리만치 바빴지만 오히려 그것이 고마웠다. 일주일에 한 번 얼굴을 볼까 말까 하던 공작 부인의 감독 아래 나디아는 평소보다 세 배는 많은 하녀들에게 둘러싸여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리를 받았다. 또한 결혼식에서 입을 웨딩드레스와 이브닝드레스를 비롯해 십수 벌의 드레스를 새로 맞추고 그에 맞춘 구두와 각종 장신구를 주문했으며 후작이 사람을 시켜 보낸 예물과 식은 생략했지만 본디 받았어야 할 약혼반지를 확인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한 달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고 결혼식의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그 어떤 것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그려 내는 한 편의 연극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부유감이 매시간 그녀를 어지럽게 했다.

그리고 대망의 결혼식 날,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난 나디아는 값비싼 향유를 듬뿍 써 가며 오래도록 목욕을 한 뒤에 차 한잔과 쿠키 한 조각으로 아침을 대신했다.

하녀들이 여럿 달라붙어 그녀의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말리고 끝부분에 윤이 날 정도로 빗질을 했다. 특히나 손재주가 좋은 몇몇이 나디아의 머리카락에 반짝이는 백금 줄을 덧대 여러 갈래로 땋고 맵시 있게 틀어 올린 후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 그리고 생화로 장식한, 화려하기 짝이 없는 관을 씌웠다.

워낙에 아름다우셔서 화장을 진하게 할 필요도 없다는 그네들의 입 발린 소리를 들으며 가볍게 화장을 하고 눈부신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나디아는 제 모습을 비추는 거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름답지만 메마른 눈을 한 여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한참이나 미동도 없이 거울을 바라보고 있자니 하녀 한 명이 그녀의 무릎까지 내려오는 길이의 면사포를 씌워 주었다.

식장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타자 그제야 숨 돌릴 만한 틈이 생겼다. 이젠 어떤 것도 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떠올리며 빠르게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말없이 응시했다.

나디아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한 달 정도면 ‘좀 놀았던’ 여자를 잊기 충분한 시간일 것이다. 나디아도 이젠 괜찮은 것 같았다. 그를 생각해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가슴속이 텅 빈 느낌이 들긴 했지만 아실과의 관계는 원래 있던 그 빈 공간을 깨닫게 해 준 계기에 지나지 않았으니 결국 괜찮은 셈이었다.

하지만 몇 번이나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그 생각이 행여나 밖으로 튀어나오는 일이 없도록 입을 틀어막았다. 이제 돌이킬 수 없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날씨에 부드럽게 바람이 불어오며 숨이 막힐 듯이 강렬한 장미 향기를 사방에 퍼트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이 생동감 넘치는 대리석 조각상들과 주위를 빼곡히 장식한 흰 아네모네와 파란 장미들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자수가 새겨진 어마어마한 길이의 융단과 평소보다 더욱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들 사이를 걸어가며 나디아는 제가 면사포를 쓰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아무도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없을 테니까.

로맨스 소설이나 음유 시인들이 노래를 들으며 상상했던 미래에 대한 행복으로 설레는 결혼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말 한 번 섞어 본 적 없는 신랑과 자신의 의사는 조금도 반영되지 않은 결혼식. 억울하거나 서글프지 않을까 했지만 그저 약간의 긴장과 두려움이 있을 뿐이었다. 체념이 빨랐던 덕이었다.

어느덧 주례석 앞에 다다른 나디아는 근사하게 치장한 후작이 무표정한 얼굴로 건네는 손을 마주 잡았다.

자신이 가장 믿는 이가 누구인지 보여 주겠다는 듯이 이 결혼의 준비 단계부터 적극적으로 개입한 황제는 급기야 직접 주례를 보겠다며 나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녀에게는 더없이 먼 존재였던 황제의 주례사를 받는 영광의 자리에 섰지만 나디아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한 채 멍하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예식은 길고도 지루했다. 그 모든 시간을 간신히 버티는 동안 밤은 깊어 갔고 피로연마저 끝물에 이르렀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함께 걷고, 입 맞추고, 춤을 췄지만 엘란츠 후작은 나디아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일정을 소화하며 마주한 그의 시선은 지나치게 무신경해서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생각만큼 미친놈인 것 같지도 않았고, 적당히 서로에게 무관심한 조용한 결혼 생활을 보낼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일 것 같았다.

엘란츠 후작이 대외용인 것이 분명한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 귀족들을 무시하는 동안 그녀는 밀랍 인형처럼 조용히 옆에 서 있었다.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귀족들의 관심은 전적으로 후작에게 쏠리고 있었다. 황제의 노골적인 편애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나니 흉흉한 소문도 넘겨 버릴 만한 비위가 생긴 모양이었다.

후작은 대놓고 귀찮다는 티를 냈지만 그 거만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먹잇감을 두고 다투는 듯한 형상에 옆에 있는 나디아까지 피곤해졌다. 장신구를 잔뜩 꽂아 둔 머리는 무겁기 짝이 없었고 하루 종일 제대로 먹은 것도 없이 구두를 신고 서 있었던지라 발이 아프고 배도 고팠다. 하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괜찮은 척하는 것은 그녀의 특기였다.

“공주를 내어 준다 할 때는 꿈쩍도 않기에 평생 홀로 살 생각인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군.”

“그때 공주님은 다섯 살이셨습니다.”

황제가 나타나자 엘란츠 후작은 그제야 조개처럼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황제는 답지 않게 낄낄거리고 웃으며 후작의 어깨를 두드렸다. 꽤나 친근해 보이는 태도였다. 미동도 없는 후작에게 시시덕거리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절거리던 황제는 뒤늦게 눈치챘다는 듯이 나디아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잉그램 양, …이 아니라 이제 엘란츠 후작 부인이군. 축하하네, 오늘의 주인공답게 눈부시게 아름답군.”

“감사합니다, 폐하.”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춘 황제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나디아는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한 뒤 황제가 자신에게서 관심을 돌려 주길 바라며 고개를 숙였다.

“파티는 마음에 드시나?”

“무, 물론입니다. 폐하의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피곤해 보이는데 먼저 방에 가서 쉬어도 좋네.”

갑작스러운 말에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는 나디아를 보며 황제는 후작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궁에 그대들이 묵을 방을 준비했거든. 앨런이 안내해 줄 걸세. 에드윈은 조금 있다가 보내 주지.”

황제와 후작은 나디아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리를 떠났다. 나디아는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이내 황제의 시종이 다가와 방으로 안내하겠다고 하자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피곤해서 연회장을 벗어나고 싶었던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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