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커다란 나무통 옆에 기대고 선 아실이 처음 보는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동료인지 꽤 친근해 보였다.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지는데…. 누구와 같이 만나자거나 소개해 주겠다는 이야기는 없었으니 곧 돌려보내겠지. 둘 사이를 아는 사람을 늘리고 싶지는 않았다.
나디아는 벽에 기대선 채로 낯선 남자가 떠나기를 기다렸다.
“줄까?”
“아니, 그녀가 싫어해.”
조용히 기다리고 있자니 아주 자그맣게 그들의 대화가 들리기 시작했다. 꽤 거리가 있었음에도 나디아는 아실의 목소리를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 이야기인가? 내가 뭘 싫어한다는 걸까? 의아해하던 그녀는 금방 답을 알 수 있었다.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담배 냄새가 흘러왔기 때문이다.
입가에 절로 웃음이 떠올랐다. 지나가며 흘리듯이 담배 냄새가 싫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구나. 원래 담배를 피우지 않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디아는 숨소리마저 조심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아직도 만나? 귀족이라며?”
“그냥 좀, …노는 거지.”
기쁘게 웃던 나디아의 얼굴이 그대로 쩡 얼어붙었다. 무언가 대화를 더 이어 가는 것 같은데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심장이 펄떡이며 뛰는 소리가 지나치게 시끄러워서 아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디아는 제 가슴 위에 손을 얹고 꾸욱, 하고 눌렀다. 숨까지 참으며 다시 골목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본 그녀의 눈에 모르는 남자가 껄껄 웃으며 장난스럽게 아실의 어깨를 두드리는 게 보였다. 그게 영락없이 저를 비웃는 것으로 보여 나디아는 재빨리 시선을 돌리며 치맛자락을 손등이 새하얘지도록 움켜쥐었다.
그녀가 들은 것은 대화의 일부분이었다. 거리가 거리라 애초에 말소리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분명 무언가 오해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원래 일부분만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경솔한 짓이니까.
아실이 그럴 리가 없어. 평소처럼 웃으면서 친구냐고 물어본 다음에… 그 다음에는 친구랑 내 이야기를 했느냐고, 저 뒤에서 들었노라 말하면.
자꾸만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밭은 숨을 꾸역꾸역 삼키면서 나디아는 한참을 망설였다. 그 사내가 떠나는 기척이 들리고 이 뒤에는 아실만 남았다. 바로 한 걸음만 내디디면 그가 그녀가 왔다는 것을 알아챌 것이다.
무서웠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리 물었는데 그가 네가 들은 게 맞다고 하면? 친구와 웃던 것처럼 나를 비웃으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가능성이 두둥실 떠올랐다. 갑작스럽게 주위의 기온이 내려간 것처럼 오한이 들고 살갗 위로 소름이 돋았다. 나디아는 제 팔을 양손으로 감싸며 고개를 흔들었다.
머릿속으로 추측과 부정이 반복되었다. 그가 그럴 리가 없다. 나를 얼마나 아껴 주었는데. …만약 그게 다 거짓이었다 하면? 아닐 것이라며 계속해서 부정을 하고 있었지만 혹시라도 그녀가 들은 것이 맞다고 긍정할지도 모른다는 티끌만 한 가능성이 그녀의 걸음을 붙잡았다.
그래도 이야기를 들어 봐야지. 고작 그 한마디로 함께한 시간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대로 나가서 그를 웃으며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평정이 유지되지 않았다. 태연한 얼굴로 인사하고 웃으며 당당하게 물어볼 자신이 생기질 않았다. 그동안 열심히 부풀려 놓았던 자신감이 형편없이 쪼그라들었다.
가슴속이 싸하게 차가워졌다. 어쩌면 제가 착각한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일이라 너무 흥분해서 그가 보여 주는 다정함이나 섬세함이 나를 사랑해서 나오는 행동이라고 착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차라리 대화를 엿듣지 말걸. 조금만 더 천천히 걸을 것을. 그랬다면 이렇게 그를 의심할 일도,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음을 깨닫는 일도 없었을 텐데.
복잡하게 뒤엉키기 시작하는 생각들에 숨을 몰아쉬던 나디아는 결국 못 박힌 듯 서 있던 발에 힘을 실어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 뒤는 쉬웠다. 그녀는 정신없이 달려 나와서 지나가던 삯 마차를 잡아탔다. 베일을 쓰고 나온 것이 이리도 다행일 수가 없었다. 감정을 하나도 숨기지 못해 엉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그녀는 도망치듯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나간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돌아온 나디아를 보고 하녀들이 의아해했다.
“몸이 안 좋아. 쉴 거니까… 방해하지 말라고 해.”
횡설수설 하는 변명을 남긴 그녀는 대답도 듣지 않고 방문을 쾅 닫았다. 문을 막아서듯 기대선 채로 그녀는 심호흡을 했다. 자꾸만 숨이 차고 시야가 흐려졌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묻어 둔 것들이 자꾸만 빠져나오려 덜컹거렸다. 결국은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조금만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더라면 그 남자의 앞에 당당하게 서서 무슨 이야기였느냐고 캐물을 수 있었을 텐데. 자초지종을 듣지도 않고서 이렇게 상상력을 부풀리는 것이 얼마나 좋지 못한 일인지 알고 있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라고 스스로를 다그쳤지만 그녀의 제어를 벗어난 감정이 이성을 뒤덮었다.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려는 것처럼 몇 번이고 아니라고 속삭였지만 엉망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뱉어낸 말들은 이미 단단하게 세워진 마음의 벽에 부딪혀 힘없이 튕겨 나왔다.
부정적인 생각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가 했던, 의미 없을 게 분명한 작은 행동마다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자신이 꼴사납기 그지없었지만 멈춰지지가 않았다.
그가 했던 모든 행동이 연극일 것이라든가, 그 친구와 저를 비웃으며 했을지도 모르는 더러운 이야기를 상상하며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은 중독적이었다. 상상 속에서 그녀는 이미 연인에게 배신당하고 버려진 가련한 소녀가 되어 있었다. 사실을 캐묻는 것조차 두려워 도망친 주제에 자신을 피해자로 결론짓는 것은 이리도 간단했다.
올랑대는 가슴팍을 내리누르는 손이 덜덜 떨렸지만 나디아는 호흡을 가다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이대로 주저앉아 울어 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꼴사나운 짓을 할 수는 없지. 울고 나면 얼굴이 엉망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눈이 퉁퉁 부을 텐데 그 모습을 하녀들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모자를 벗어 아무렇게나 내던진 나디아는 거울 앞에 섰다. 모자를 고정하던 머리핀을 떼어 내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한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며 주문처럼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생각을 멈추고 자신을 진정시키려 계속해서 중얼거렸지만 거울 속에 보이는 새파란 눈동자에는 그녀의 의지를 배반한 물기만 고여 갈 따름이었다. 이윽고 필사적으로 쌓아 올리던 둑이 무너졌다.
“멍청해. 그걸 믿었어? 왜? 무슨 근거로?”
어디든 쏟아 내고 싶었기에, 그녀는 가장 만만한 자신을 상처 입히기로 했다. 울음 탓에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사랑 한번 받아 본 적 없으면서 그게 사랑받는 거라고 어떻게 확신했어? 멍청하긴. 그러니까 속는 거야. 꼴좋다. 누가 너 같은 걸 좋아한다고!”
비명처럼 높아진 제 목소리에 놀란 나디아가 흠칫 놀라며 입을 꾹 다물었다. 하녀들에게 들리지 않았을까 잠시 숨을 죽이던 그녀는 함부로 얼굴을 문지르다 결국 얼굴을 씻었다. 그러나 나름의 노력이 소용없게도 옷을 갈아입는 내내 눈물이 줄줄 흘렀다. 떨리는 손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날 걱정했잖아. 예쁘다고 했잖아…. 좋아한다고….”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진심인지 진심이 아닌지를 구별할 만한 깜냥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처음 겪어 보는 온기에 정신없이 매달리기 바빠서, 설탕 바른 혓바닥이 뱉어 내는 말들이 그저 저를 어여삐 여기는 줄만 알고 마냥 들떠서….
“진짜인 줄로만…. 나는, 그게 거짓인 줄 내가 어떻게 아느냔 말이야….”
숨이 막혔다.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 원망을 쏟아 내봤지만 고장 난 것처럼 눈물이 멎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 위에 웅크린 채로 헐떡이며 울음을 쏟아 냈다.
“…죽고 싶어.”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에 아무렇게나 뱉어 냈지만 사실은 죽고 싶은 게 아니었다. 나디아는 그저 사랑받고 싶은 거였다.
애초에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댄 것이 다행이었다. 아무런 의욕도 생기지 않아 며칠을 침대 속에서 보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자학적인 생각이 끊이질 않았지만 그도 시간이 지나자 잦아들기 시작했다.
계속 이렇게 있다간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디아가 간신히 기운을 차리고 일어난 지 사흘째 되는 날, 영지로 내려가 있던 그녀의 아버지, 잉그램 공작이 돌아왔다.
가주를 맞이하러 나온 나디아의 초췌한 얼굴을 본 잉그램 공작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얼굴을 구기고 혀를 차는 것이었다. 관리를 어떻게 하냐는 질책이 떨어지는 것을 눈을 내리깐 채 묵묵히 듣고 있던 그녀는 이어지는 말에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내달에 결혼을 해야 하니 제대로 관리하거라. 이 꼴로 사람들 앞에 나설 수는 없지 않느냐.”
“결혼이요? …제 결혼이요?”
잉그램 공작은 반문이 돌아올 줄 몰랐다는 듯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래.”
“이, 이렇게 갑자기요? 상대가 누구예요? 약혼식은…?”
“엘란츠 후작이다. 약혼식은 건너뛰기로 했다. 그자가 영지로 내려가야 한다기에 서둘러 날짜를 잡았지. 네가 이런 꼴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꼴이 엉망이라며 평가해 대는 아버지의 끔찍한 목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