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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68)화 (68/129)

68.

“따분하기 짝이 없군. 칼을 뽑았으면 휘둘러야지, 다시 얌전히 넣는 꼴이라니. 헬렌의 기사들은 모두 용맹하던데, 이놈들은 꼴이 왜 이래?”

뎐트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며 혀를 내둘렀다. 찰나의 흥미로 이채가 실렸던 눈동자도 잠잠해졌다. 무미건조하게 눈을 끔뻑거리던 뎐트는 손을 놓았다는 뜻으로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도 폐기하지 못한 물건들이 많구나.”

“남은 이들은 인계해도 되겠나?”

뎐트가 로브로 입가를 더듬거리며 답했다.

“그건 헬렌 공작이 결정할 일이지. 포로인 내게 왜 묻나?”

바닥에 널브러진 사내들은 경비대에서 데려갔다.

캐서린은 허공을 빤히 봤다. 지금 눈앞에서 사람이 쓰러지듯 기절해 버린 거 같은데……. 이걸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캐서린이 로렌디스를 흘끔거리자, 로렌디스가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쉿.’

조용히 하라는 의미였다.

“이쯤 둘러보면 다 둘러본 것 같은데, 이만 돌아가는 게 어때?”

“사고 쳤다고 바로 이송하나?”

매정하군. 읊조리던 뎐트가 먼저 발을 뗐다.

“흥이 식었어. 가지.”

뎐트와 다시 벽화가 있는 쪽을 지났다. 뎐트는 거기서 한 번 더 멈췄다. 흰색 분필로 벽에 그려 넣은 것 같지만, 하나하나 깎아서 그려 낸 벽화였다. 그 안에 일일이 물감을 넣고 그려 낸 솜씨가 섬세했다.

“언제 그린 거예요?”

벽은 이미 다 허물어졌는데 벽화만 남겨 둔 거면, 벽화 자체가 오래되고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는 뜻이었다. 로브가 펄럭이며 벌어졌다. 눈을 찌푸리며 팔로 바람을 가리는데,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로브를 꼼꼼히 여며 주며 답했다.

“여기에 헬렌이 들어서기 전부터 있었지.”

그럼 선대 공작이 북부의 주인으로 자리 잡기 전부터 있던 벽화이다.

설인이랬나? 긴 백발이 허리까지 내려오고, 나무 위에 건성으로 걸터앉은 모습이 신비로웠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나무 옆에도 흐릿하게 인영이 남아 있었다.

‘설인이 두 명.’

어린아이가 한 명 있고, 나무 위에 설인이 두 명 더 앉아 있었다.

“설인이라.”

설화 속에 나오는 사람이지만, 그를 사람으로 볼지 동물로 볼지는 의문점이 많았다. 동물과 인간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데, 전지전능한 신이라기엔 벽화에 남아 있는 모습이 이상하리만큼 고독했다.

“로렌디스 눈에는 어때요?”

“뭐가?”

“당신 눈에도 고독해 보이는가 해서요. 제가 넘겨짚은 걸까요?”

로렌디스의 시선도 같이 머물렀다.

뎐트가 걷다가 멈춰 섰다. 뒷짐을 진 그대로 돌아선 그는 우습다며 혀를 낮게 찼던 것도 같다. 그러면서도 왈가왈부 말을 섞지는 않았다.

“글쎄. 뭐가?”

“그림으로 남겨 둔 모습이요. 꼭 누군가 보고 남긴 것 같지 않나요? 머나먼 기억 속에서 꺼낸 거 같아요.”

환상을 그려 낸 것치고는 또 막연한 허상 같지도 않고.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 지워질 법도 한데, 벽화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헬렌의 험악한 기후를 고려한다면, 깎이고 깎여서 지워지는 게 맞는데……. 흐릿하게나마 형체가 유지되어 있었다.

“누가 그렸는지는 잘 모르겠어. 헬렌이 있기 전부터 있던 벽화라서. 그 이름을 한쪽에 넣어 뒀을 법도 한데, 그건 지워져서 없더라고.”

캐서린은 목덜미를 더듬거리며 마른기침을 삼켰다. 목이 살짝 뜨거워지고, 뺨 주변에 열기가 고였다. 로렌디스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 캐서린을 유심히 살폈다.

“어디 안 좋아?”

“딱히 안 좋은 건 아닌데요. 머리에 열기가 오르는 것 같아서요.”

“무리한 거야?”

뺨을 만지는 손이 나른했다.

“딱히 무리한 건 아니고요. 뭔가, 열이 갑자기 훅 오르네요. 왜 이럴까…….”

“각하, 마님을 얼른 안으로 모시는 게 좋겠습니다.”

로렌디스에게 살짝 기대자 머리 한쪽이 핑 도는 것 같았다. 캐서린이 이마를 짚으며 휘청거리자, 로렌디스가 커다란 손아귀로 어깨를 잡아챘다. 발밑이 푹 꺼지는 것 같았다. 아, 이상한데…….

목 안이 뜨뜻미지근해졌다. 입술을 더듬거리다 약하게 기침했다. 묽은 피가 입안에서 터져 나왔다.

“캐서린……?”

“으음. 당신이 당황할 것 같은데요. 저는요…….”

“캐서린 정신 차려!”

괜찮거든요. 입으로 맺지 못했다. 로렌디스가 다급하게 허리를 감쌌다. 밤하늘이 맑았다. 시야가 뒤집히며 암흑이 찾아들었다.

그쯤 누군가 크게 호통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캐서린은 까무룩 잠긴 의식 속에서, 로렌디스가 누군가를 크게 부르는 걸 느꼈다.

“당장 진료동으로 연락 넣어!”

* * *

“왜, 왜 저 아이가 저기 누워 있는 겁니까!”

밀던 자작은 로렌디스의 팔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땅속에 묻힌 아이에게서는 숨결조차 느낄 수 없다. 그 길을 돌아서 겨우 왔더니 아이가 없다. 밀던 자작은 황망한 마음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아이, 어디 있습니까?”

“…….”

“제 아이 어디 있는 겁니까? 어째서, 어째서 일이 이 지경이 된 겁니까?”

아이가 땅속에 묻힌 건 안다. 그런데 그걸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였다. 아이의 무덤에 핀 꽃이 시들해졌다. 혹독한 계절을 견디기엔 꽃잎조차도 가녀리기 짝이 없었다.

“내가 그 긴 길을 헤매다 왔는데, 네가 여기에 누워 있으면 어떡하냐. 캐서린. 딸아. 내 딸아. 네가 여기에 누워 있으면 어떡해. 그럼 나는 어떡하라고.”

그 설원을 헤매던 것도, 버티던 것도 한 가지 때문이었다. 20년이 흘렀다. 모두 죽었다고 여겼겠지만, 결국은 다시 돌아왔다. 그 긴 세월을 헤매면서도 목숨을 놓지 않고 꾸역꾸역 다리를 절며 걸었다.

스스로 죽어 간다는 걸 느끼면서도 미련을 놓지 못했다. 이걸 놓았다간 그 뒤에 아이 얼굴을 무슨 수로 봐. 그런 마음으로 꾸역꾸역 걸어왔더니…….

“내가 그럼 왜 살아 있는 겁니까?”

자작은 답을 찾지 못했다.

“자작, 미안합니다. 캐서린도 자작이 우는 건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각하?”

“더 일찍 찾아주지 못해 죄송합니다. 자작과 아버지만 찾으면 된다고, 그럼 다시 이전으로 돌릴 수 있다고 여겼는데…….”

둘째 황자가 황위를 이어받고 황후가 황실을 장악했으며, 헬렌은 소펜가와의 혼약으로 황실의 외척이 됐다.

자작은 허망함에 갈 길을 잃었고, 로렌디스는 그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떠난 아내의 무덤을 떠나지 못했다.

앞만 보고 달리면서 옆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잃은 건 비단 시간만이 아닐 것이다.

* * *

서글픈 꿈을 꾼 것 같다. 캐서린이 목을 더듬거리는데 곁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침대의 캐노피가 나른하게 펄럭였다. 피를 쏟은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다음부터는 기억에 없다. 그럼 그길로 쓰러졌겠네.

“끄응.”

입안에서 신음 소리가 절로 났다. 이마를 짚자 그 위에 손길이 하나 더 겹쳤다. 물끄러미 시선을 들자 묵직한 시선이 내려앉았다. 캐서린은 이마를 더듬거리던 손을 내려놓았다. 로렌디스도 한숨을 내쉬더니 손을 뗐다.

“잠시도 방심할 수가 없어.”

“저 쓰러진 거예요?”

로렌디스는 침묵했다. 그래도 충분한 답이 됐다.

“혹시, 나 오랫동안 쓰러져 있었어요?”

“3일 정도.”

오래 쓰러져 있었다. 몸이 안 좋았나? 그런 것치고는 자고 깨니까 몸이 더 가벼웠다. 예전에는 그래도 발밑이 무겁게 발목을 잡아끄는 느낌이 들었다면, 지금은 좀 더 가볍고 편안했다. 캐서린이 기이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로렌디스가 머리를 헝클이며 한숨을 쉬었다.

“걱정 좀 그만 시키면 안 돼?”

“그게요. 저도 갑자기 왜 쓰러진지 잘 모르겠어서…….”

“몸에 있는 독성이 내성과 싸웠다더라고. 일종의 면역반응이라던데, 오늘까지도 깨지 못했다면 제임스의 손가락 중 하나를 베어 버릴까 했어.”

괜찮다던 사람이 갑자기 혼절해 버렸으니 주치의는 당연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로렌디스는 강력하게 의사를 표했다. 며칠 더 잠들어 있다간 애먼 사람만 더 잡을 뻔했구나. 그래도 피곤한 건 마찬가지였다. 일어나야 하는데 왜 계속 졸립지.

“졸리면 더 자.”

“내가 잠들면 당신이 제임스를 잡을 것 같은데요.”

“깬 거 봤으니 됐어. 더 자도 돼.”

자도 된다며 하는 이야기에 마음을 놓았다. 당신이 빈말로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당신이 괜찮다면 괜찮은 거니까.

긴장을 놓자 몸이 다시 나른하게 잠겼다. 의식이 몽롱하게 가라앉고 잠들었지만, 몸은 여전히 가벼웠다.

“제임스를 다시 불러와.”

잠결에 로렌디스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제임스가 요즘 자주 불려 다니는데 기분 탓이려나.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정신이 깜깜해졌다.

캐서린이 다시 깼을 때는 이른 오전이었다.

로렌디스는 자리를 비웠고, 주변은 고요했다. 곁에서 꾸벅꾸벅 조는 인기척이 났는데……. 고개를 돌리자 제임스가 삐딱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서 잠들어 있었다.

“마님?”

넨시가 쟁반에 수건과 물을 담아오다가 놀라며 떨어트렸다. 쨍― 날카로운 파열음에 제임스가 부르르 떨며 일어났다. 캐서린은 제임스를 흘겨보며 담백하게 물었다.

“깼어?”

“와, 나 아직 살아 있지?”

제임스는 제 목을 더듬거리더니 ‘다행이야. 아직 목이 붙어 있다니.’라고 홀로 중얼거렸다.

“넨시도 놀랐어?”

“마님 심드렁하게 말씀하실 일이 아니에요! 마님께서 며칠을 앓아누웠는지 아십니까!”

“이봐 하녀! 이쪽은 잠시 잠든 거였다만?”

“그래도요. 각하께서도 얼마나 걱정하셨는데요. 저는 저분이 돌팔이라면, 손목 하나로 끝날 게 아니라 두 개를 베어 내야 한다고 각하께 말씀을 올렸거든요.”

제임스가 쿨럭대며 마른기침을 삼키더니 연신 손목을 더듬거렸다. 이 아가씨 한 분 덕분에 내 손목이 또 달아날 뻔했구나, 제임스는 억울함에 울컥하며 쪼그려 앉은 그대로 벽에 머리를 기댔다.

“하녀도 잘 들어 둬. 돈 많은 고객님을 만날 때는 두세 번 확인해야 해. 안 그러면 내 꼴 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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