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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69)화 (69/129)

69.

“몸이 낫거든 다시는 보지 말자.”

제임스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기저기서 시달린 건지 눈 밑이 거무죽죽했다.

“하녀는 잠시 나가 봐.”

“나가야 합니까?”

“환자랑 이야기할 때 방해돼. 깨어난 거 확인했으면 이만 나가 봐.”

넨시는 못마땅해하면서도, 캐서린이 피곤해하자 적당히 자리를 피했다. 사람이 여럿이 모여 있으면 머리가 아프다고 작게 하소연했는데, 그게 효과가 있던 모양이다. 제임스는 그제야 긴장을 놓으며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괜찮다고 이야기했는데 사흘이 되도록 깨지를 않으니……. 아가씨 덕분에 죽다 살았어.”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주변 분위기를 보니 호락호락하지는 않았구나 싶었어.”

제임스는 그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제법 많은 일이 있었다. 로렌디스에게 업혀 들어왔고, 혼절한 몸이 축 늘어지자 주변에서는 비명 소리가 나왔다.

로렌디스는 곧장 제임스를 찾았으며, 혹시 아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간 그 목부터 잘라 버릴 거라며 엄포를 놓았다.

‘당장 살펴라. 당장.’

제임스가 겨우 진단을 끝내고, 일종의 면역반응이라며 설명해 주자 그제야 분위기도 풀어졌다. 다만, 피를 흘리며 혼절한 사람이 며칠이 지나도 깨지 않자, 다시 불려왔다.

‘왜 안 깨어나나?’

‘그냥 잠든 겁니다. 사나흘이면 깨어날 겁니다.’

‘그 말 지켜야 할 거야. 제때 깨어나지 못한다면, 그 몸의 어디 하나가 잘려 나갈 거니까.’

제임스는 금방 후회했다. 시간에 더 여유를 둘 것을 그랬나. 목덜미에 칼날부터 들이미는 폼이 위태로웠다. 입술 한번 잘못 놀렸다간, 혓바닥이 잘려나갈 게 뻔히 보여서 함구했다.

“몸은 치료된 게 맞아. 크게 걱정할 건 없어. 독성과 내성이 싸우면서 몸에 약간 과부하가 걸렸던 모양인데, 잘 이겨 내고 있다는 방증이야.”

로렌디스에게도 이미 설명을 들어서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몸이 가벼워진 걸 느꼈으니까.

헬렌 공작도 며칠간 제정신 아니었다며 중얼거리던 제임스는 이제야 한시름 놓는다며 어깨를 두들겼다.

“제임스가 고생이 많았어.”

“아가씨가 완치된다면 헬렌 쪽으로는 다리도 뻗지 않을 거야. 나는 흰 은발 사내가 더 무서웠어. 붉은 눈알을 들이밀며 아가씨를 빤히 내려다보는데 기함할 뻔했다고.”

여기서 은발로 불릴 사람은 한 명뿐이다. 캐서린은 그 사람 이야기가 갑자기 왜 나왔는지 되묻고 싶었지만, 제임스는 이야기도 꺼내기 싫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몸이 회복됐다. 손목에는 영양제가 꽂혀 있었다. 똑―똑― 영양제가 주사바늘을 타고 손목으로 흘러 들어왔다. 캐서린은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며칠 누워 있었다고 허리가 뻐근하긴 한데, 그것 외에는 모두 괜찮았다.

‘진짜…….’

캐서린은 어색하게 웃었다.

* * *

“열이 오르락내리락하네요.”

면역반응이라더니, 며칠간 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몸이 가벼워진 것과 별개로, 미열이 가시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제임스는 다시 불려왔으며, 로렌디스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읊조렸다.

“차도가 없다면 그 손목을 끊어 낼 거라 이미 이야기했는데.”

“열은 어쩔 수 없어요. 아니이이, 면역력과 독성이 싸우는 걸 제가 무슨 수로 막습니까? 내성이 있더라도 이건 어쩔 수 없는…… 히끅!”

제임스는 억울해하면서도 반박하지 못했다. 면역반응이라고 둘러댄 게 벌써 수십 번이었다. 낫고 있다는 증거라지만, 겉으로 볼 때는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앓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게 현실이었다.

‘열이 올랐다 내렸다 그러네.’

캐서린이 어색하게 목덜미를 긁적거리자 데니스가 대신 설명했다.

“면역반응입니다. 면역력이 독성과 싸우고 있는 거니까요. 치료되는 과정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열이…….”

“38도네요. 조금 높긴 하지만 금방 다시 회복될 겁니다.”

데니스가 캐서린을 안심시켜 주려는 듯 조곤조곤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곁을 지키는 로렌디스에게도 양해를 구했다.

“각하, 노여움을 푸십시오.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기적입니다. 조금 더 의료진을 믿고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서 두고 보기만 하란 뜻인가?”

“제자가 충분히 잘 해결해 낼 겁니다.”

제 입으로 사흘 내로 깨어난다더니 진짜 깨어났잖습니까? 일단 믿고 맡겨 봅시다.

안주인의 용태는 비밀리에 지켜졌다. 다만, 외성 한복판에서 피를 쏟으며 혼절한 사실을 완전히 숨기기란 어려웠다.

숨기기까지는 숨기겠지만, 그 이야기에 좋지 못한 쪽으로 흘러가는 것까지 온전히 막기는 힘들 것이다.

“황실의 동태를 꾸준히 감시해라. 수상쩍은 움직임이 보인다면 즉각 보고하고. 황후가 이번 일을 듣게 된다면, 쓸모없는 짓을 벌일 게 뻔해.”

헬렌에서 걱정하던 일이 터졌다. 브레디는 내내 저기압인 제 주군을 바라보며 위로의 말을 꺼냈다.

“마님께서 칩거를 끝내실 때쯤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긴 했다만……. 과정은 예상 밖이지만, 결과는 어찌 됐든 각하께서도 염두에 두셨잖습니까?”

“염두에 두긴 했지.”

황실 한복판에서 혼절한 게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헬렌 밖에서 혼절해 버렸다면, 제국 밖으로 이야기가 더 빨리 퍼져 나갔을 것이다. 몸이 완쾌되기도 전에 괜한 약점을 안겨 줄 필요는 없다.

대외활동을 시작한 건 혼자서 떠나려는 캐서린을 헬렌에 눌러 앉히기 위해서였다. 아내에게 약점을 만들어 주려던 의도는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지.”

건국제에 다녀오는 길이나 야만족과의 충돌 중에 혼절해 버렸으면……. 문제가 커졌을지도 모른다.

“마님.”

브레디가 캐서린을 부르며 로렌디스의 눈치를 살폈다.

“뎐트 님께서 마님을 뵙길 청했습니다.”

“아직 안 떠났어요?”

“며칠간은 헬렌에 더 머무를 예정입니다.”

뎐트는 자연스럽게 더 헬렌에 더 머무르게 됐고, 본인도 거기에 큰 불만감은 없다고 전했다.

“만날게요. 그런데 나중에요. 지금은 미열이 남아 있어서요.”

“네. 물론입니다. 어차피 한동안 헬렌에 머무를 듯하니까, 나중에 충분히 회복되거든 만나도 됩니다.”

* * *

열이 다시 올라서 다시 잠들었는데, 깨고 보니까 늦은 밤이었다. 이거 낫는 거 맞지? 차라리 독에 중독됐을 때가 덜 아팠던 거 같은데……. 치료되는 과정에 면역력과 독성이 부딪치니까 몸에 부조화가 찾아온 것 같다.

막연하게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는데, 침대를 짚은 손등에 손길이 닿았다.

“왜?”

캐서린은 흠칫 놀라며 몸을 떨었다.

“깼어요?”

“응.”

“나 때문에 깬 거예요?”

로렌디스가 엎드려 누워서 캐서린의 손등에 손을 겹쳤다. 그의 어깨가 벌어지며 등 근육이 오밀조밀 움직였다.

캐서린이 멈칫하고 그대로 굳어 있자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일렁였다.

“뭐야, 왜 그러고 있어?”

“눈동자가 짙어서요.”

“뭐?”

“사냥 직전의 짐승들 눈을 알아요? 어둠 속에 잠겨 있지만 짙고 또렷하거든요.”

당신 눈은 이들을 닮았다. 캐서린이 킥킥하며 가벼운 어조로 이야기하자, 로렌디스가 팔을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놈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군.”

“누구요?”

“뎐트 칸. 내게 속이 시꺼먼 짐승 같댔거든.”

그 이야기를 하는 로렌디스의 목소리가 어둑하게 울렸다. 깊숙한 동굴 속에서 울려 퍼지듯, 낮고 허스키했다. 캐서린은 침대 헤드에 머리를 기대고 앉았다. 창밖은 여전히 어둡다. 밤은 길고, 캐서린의 머릿속은 어느 때보다도 맑고 개운했다.

“너는 왜 안 자고?”

“당신은요?”

“자다가 깼지.”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로렌디스는 무방비하면서도 날카로웠다. 엎드려서 누워 있는데, 그 시선이 느른하게 감겼다. 그리고 다시 떠지길 반복했다. 그의 눈동자가 어둑하게 내려앉았다.

“더 자도 돼요. 머리가 개운해서 일어나 있던 거예요.”

“몸…….”

“네?”

“숙여 봐.”

캐서린이 고개를 숙이자, 로렌디스가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그는 이마를 짚은 그대로 숨을 내쉬더니 열은 내렸네, 하고 읊조렸다. 캐서린은 그의 손끝이 닿았던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내일 다시 열이 오를지도 모르니까 더 자 둬.”

“좀 더 이따가요.”

캐서린은 침대 맡에 놓인 탁자에서 달력을 꺼냈다. 시간을 천천히 되짚었다.

로렌디스와 결혼하고 시간이 제법 흘렀다. 반년 동안 남편은 전장에서 지냈고, 그 이후로도 계모와의 연을 끊고 대외활동을 시작하며 많은 일이 있었다.

“거의 1년 다 되어 가네…….”

“뭐가?”

예정대로라면 내가 죽을 시기요.

캐서린은 방 안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맘때쯤이면 몸이 확 나빠질 시기였거든요. 음, 그래도 괜찮네요. 대신, 미열이 약간 있지만요.”

야만족과의 충돌을 겪었고, 뎐트 칸을 만났으며, 건국제를 무사히 지나 보냈다. 흐르는 시간이 야속하다고 여긴 적은 없다.

꾸역꾸역 버티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다. 이런 몸으로 잘 버텼구나 싶었다. 계모와의 인연을 끊을 때만 하더라도, 가족을 끊어 내면 남은 게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믿었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내 가족은 거기 없었어.’

그걸 이제야 느꼈다.

“나, 잘 버텼나요?”

“잘 버텼어.”

“그렇, 죠?”

“그럼. 내게 물을 것도 없지.”

변한 건 없다.

‘이대로도 괜찮아.’

그들이 없다고 달라질 건 없다.

캐서린의 삶은 그대로였다.

모든 게 그대로.

“나는 죽지 않아요.”

“그래. 죽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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