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야행 일정이 정해진 건 늦은 저녁이었다. 로렌디스가 오후 일정을 조율해서 비워 두고, 캐서린에게 소식을 알렸다. 로렌디스와 같이 나오자, 뎐트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기이했다.
“헬렌 공작이 크게 양보했네.”
일행은 조촐했다. 뎐트가 앞에서 걷고 우리가 뒤따라 걸었다. 뎐트는 몸수색까지 끝내고 내성을 나섰다. 보통이라면 말도 안 될 일이지만, 로렌디스는 적정 거리에서 떨어져 지켜보기만 했다. 그 뒤로 월계수 기사단이 은신해 뒤따랐다.
“보통이라면 안 되죠?”
“안 되지.”
“그런데 왜…….”
“악의적인 이유로 나온 건 아닐 거니까. 그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나아.”
가만히 놔두면 세상 권태롭게 다시금 조용해질 놈이었다. 로렌디스는 그런 뎐트의 뒤를 빤히 바라봤다. 은신한 기사단부터 뒤따르는 걸음이 많은데도, 뎐트는 어색한 기색 없이 거리를 둘러보았다.
칸이라……. 야만인이라 부르지만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인데, 여기와 크게 다를 게 있을까?
“넋 놓고 있지 마.”
캐서린이 우두커니 서 있자, 로렌디스가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길 잃어.”
“네? 네!”
뎐트가 걸음을 멈췄다.
“빨리 와. 너희.”
뎐트는 끌끌대며 입술을 더듬었다. 로브 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긴 은발이 로브 아래에 숨어서 보이지 않지만, 적색 눈동자는 선명했다.
“어디로 튈지 모를 아내를 챙기려면 바빠야지.”
“나오자는 소리는 왜 갑자기 나온 거야?”
로렌디스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기분 나쁜 기색은 없고 귀찮다는 기색만 다분했다.
헬렌의 외성에는 큰 길목을 따라서 가로등이 줄지어 서 있었다. 뎐트가 그 아래에 서서 나지막하게 웃었다.
“헬렌 공작은 조금 더 살가워질 필요가 있어. 밤 산책은 오랜만이라서 잠깐 걷겠다는데, 너무 한심하게 보지 마.”
“귀찮은 건 질색하시더니, 사람 많은 곳은 왜 나오자고 했어?”
눈이 그친 헬렌의 밤거리는 분주했다. 야외 활동을 자주 못하는 탓도 있어서, 이런 시기면 사람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서 놀잇거리를 즐겼다. 뎐트는 뒷짐을 지고 그 모습을 구경했다. 그냥 딱 구경만 했다.
‘뭘 보는 거지?’
어린아이가 부모와 손잡고 가는 모습을 보거나, 행인들이 술을 마시며 비틀거리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는 턱을 쓸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걸음을 뗐다. 사람들이 속속히 거리로 나왔다.
그는 조명을 한 번씩 올려다보고,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지금 보니까 키가 크구나. 단정하게 생긴 것 같다고만 여겼지, 체격은 제대로 실감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캐서린은 로렌디스에게 직접 물었다.
“예전에도 이런 적 있었어요?”
“뭐가?”
“성을 둘러본다는 게……. 아무래도 접근하기에 따라서 오해의 여지가 충분하잖아요? 염탐이나 그런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고요.”
로렌디스가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듣기에 따라서 오해의 여지가 있지. 그런데 다른 의미는 없을 거야. 저 놈은 그냥 나온 거야.”
칸과 헬렌은 인접한 국경선을 마주 보고, 시시때때로 부딪쳤다. 그런 관계를 떠올린다면 걱정할 만도 한데, 로렌디스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아무 이유 없어.”
뎐트의 행동에는 큰 맥락이나 이유가 없다. 지금 그의 심드렁한 표정이 이야기해 주고 있다.
그는 그냥 나온 거다. 이유도 없이. 적당히 걷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시선을 한 번 주고, 다시 적당히 걷다가 멈춰 서서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어디 진짜 동떨어진 곳에서 오래 살다 온 사람 같네요.”
“그렇지.”
뎐트가 흥미롭게 턱을 긁더니 벽 한쪽에서 멈춰 섰다.
“벽화로군.”
뎐트가 멈춰 선 곳은 벽화 앞쪽이었다. 벽은 다 허물어지고 벽화만 남았는데, 그곳에 테두리를 둘러서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 두었다. 흰 나무 위에 앉아 있는 두 설인의 그림이었다. 벽화는 낡아서 거의 다 벗겨졌다.
뎐트의 걸음이 멈추자, 은신해 있던 이들의 걸음도 멈췄다.
“모습을 내놓고 따라와도 상관없다만.”
“다른 이들의 이목이 쏠려서. 여기 이목을 받으면 안 될 사람이 한 명 더 있잖아. 그러니 입조심해.”
로렌디스의 시선이 캐서린에게 닿았다. 뎐트가 이해했다며 탄식했다.
“하긴. 약해 빠져서 방심했다간 큰일 나겠어.”
“비아냥거리는 거리지 마요…….”
뎐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틀린 말도 아니잖느냐?”
뎐트는 인파가 몰린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헬렌 공작, 저건 뭐지?”
뎐트가 우두커니 멈춰서 한쪽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길거리 한쪽에 사내들 몇몇이 모여 있었다.
나무 탁자를 밖에 꺼내 놓고, 거기에 마주 앉은 남자들이 서로 손을 단단히 잡고 힘을 가르고 있었다.
“팔씨름?”
“그게 뭐지?”
“서로 누가 힘이 강한지 겨루는 내기야.”
소박하게 팔씨름으로 내기하는데, 판돈까지 걸려 있었다. 로렌디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간략하게 설명했다.
“일종의 도박이야. 도박이라니까 너무 어감이 나쁜가? 힘을 겨뤄서 최종 승자 한 명이 판돈을 가져가는 거야.”
뎐트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되물었다.
“호오, 판돈이라면 손목을 가져가는 건가?”
로렌디스가 머리를 헝클이며 답했다.
“손목을 왜 가져가겠어. 여럿이서 돈을 걸고 한 명이 그 돈을 가져가는 거야.”
“그런 거였어? 지루하군.”
손목을 건다면 흥미롭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더 볼 것 없다는 듯 흥미를 잃었다. 그러면서도, 뎐트는 그 노름판 옆에서 기웃거렸다.
“저런 걸 하면 재밌나?”
이해하기 힘든 물음이었다.
“해 보려고?”
“다 비실비실해 보이는군. 저 손목 꺾어서 내가 가질 것도 아닌데 뭣 하러.”
뎐트는 사람들 속에 섞였다. 은발을 숨기긴 했어도, 저렇게 대놓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도 되나.
야만족의 지배자와 그 혈족이 은발을 가진 건 헬렌 내부에서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다. 그런데 뎐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섞였다.
“뭐요? 할 거면 줄부터 서시오!”
“나도 껴도 돼?”
“판돈 가져왔어?”
캐서린은 움찔했다. 저분 저기서 뭐 하는 거예요? 저대로 놔둬도 되나요? 뎐트가 로렌디스를 돌아보자, 로렌디스가 동전 주머니를 꺼내더니 뎐트에게 던졌다.
“방금 생겼어. 그럼 됐나?”
뎐트는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입술을 더듬거리며 규칙을 확인하더니, 금방 녹아들었다. 그는 익숙하게 승부를 다 이기고 판돈을 가져왔다. 돈주머니를 슥슥 만져 보더니 손에 들고 걸었다. 캐서린은 이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다.
‘뭐 하는 분이지?’
그리고 뎐트는 다시 흥미를 잃었다. 저기서는 판돈을 빼앗긴 사내들이 넋 놓고 뎐트를 돌아봤지만, 뎐트는 이미 뒷짐을 지고 떠난 지 오래였다.
“헬렌의 밤은 밝군.”
뎐트가 캐서린을 돌아보며 답했다.
“이런 조명을 보는 것도 나름 재미가 쏠쏠해.”
“거기는 조명이 없어요?”
“설원에 누가 조명을 틀어 놔. 사람도 없는데.”
캐서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기서 혼자 지내요?”
“혼자 지내지.”
“가족들은 어쩌고?”
“그 지렁이와 섞여 지내다간 살인 욕구를 참지 못할 거야.”
뎐트는 징글징글하다며 몸을 털어 내다가 또 불현듯 멈췄다. 그의 손은 여전히 돈주머니를 툭툭― 가볍게 던지고 쥐길 반복했다.
“뎐트, 그러고 다니다간 소매치기 당해요. 돈은 옷 속에 넣어요.”
“그게 뭐야?”
진짜 어디 외딴 세상에서 지내다가 왔나? 캐서린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당신 돈주머니 누가 훔쳐간다고요, 라고 이야기해 주려던 순간이었다. 뎐트가 멈춰 서자 손장난하던 팔도 뚝 멈췄다. 허공에서 돈주머니가 천천히 떨어졌다.
‘무언가 기운이 이상하다.’
캐서린이 로렌디스의 옷깃을 당기는데, 그가 캐서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가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그의 검이 달칵― 하며 손아귀에 들어왔다. 뎐트가 혀를 끌끌 차며 ‘여기도 지렁이가 많군.’이라고 중얼거렸다.
“가까이 가지 마.”
“네?”
“질 나쁜 놈들이 붙었어.”
뎐트가 돈주머니를 휙휙 던졌다. 조심성이 없지만, 달리 말하자면 조심할 위치가 아니기에 더더욱 그랬다.
뎐트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허공에 솟았던 돈주머니가 잠시 멈췄다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뎐트는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로브 아래로 긴 은발이 달빛을 받아서 빛났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설마.’라고 중얼거렸다.
“여기도 머리 빈 멍청이가 있다니.”
뎐트가 주머니를 탁― 손아귀에 쥐더니 뒷짐을 졌다. 로렌디스는 뎐트를 흘긋거리더니 머리를 헝클이며 말렸다.
“일 키우지 마.”
“판돈이 너무 작더라니, 저 손목도 판돈에 포함된 거였나?”
뎐트는 진심으로 묻고 있었다. 팔씨름이라고 부르더니,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의 손목을 가지는 거였어. 재미난 놀잇거리로군. 심드렁한 표정에 이채가 실렸다. 뎐트는 무기도 모두 빼앗긴 상태였지만, 특유의 기운이 서서히 그의 주변으로 피어올랐다.
그는 놀음판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거 받으러 왔어?”
“그럼 줄 거요?”
사내 몇몇이 뎐트 주변을 감쌌다. 늘 어둡게 잠겨 있던 눈동자에 찰나의 흥미가 감돌았다. 그게 좋은 의미일 리 없다.
“그거만 넘기면 좋게 넘어가리다. 내 몫으로 건 돈은 다시 돌려받아야지.”
뎐트는 맑게 웃었다. 기뻐하는 얼굴이다. 이런 흥미를 안겨 줘서 고맙다며, 두 손을 마주잡고 뺨이라도 비빌 것 같았다. 화사하게 편 얼굴이 곱게 눈웃음 짓고, 뎐트가 막 손을 휘두르려는데…….
“뎐트.”
로렌디스가 나지막하게 그를 불렀다.
“안 돼?”
뎐트는 실망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로렌디스는 일이 커지기 전에 은신 중인 기사에게 경비대를 불러오라 이야기했다. 뎐트는 흥미를 잃었다며 손을 들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여기는 안 되는 것도 많고.”
“…….”
“손도 많이 가.”
거슬리는데 거슬린다고 다 치우지도 못할 노릇이고. 뎐트의 손이 느릿하게 허공을 훑었다. 그는 우락부락한 사람들 사이에 서서 고고하게 손을 휘둘렀고, 사내들이 혼이 빠진 사람처럼 바닥에 널브러졌다.
“진짜 손이 많이 간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