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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3)화 (3/120)

3화. 틀어진 운명

리하스트 대공을 따라 시선을 올리고 싶은 걸 참으며 에일린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신경을 분산시키고 나서야 굳어버린 머리를 돌릴 수 있었다.

‘페로몬을 뿜어낸 거야.’

같은 알파끼리라면 서로의 페로몬이 꺼림칙하게 느껴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알파인 집사가 목을 잡고 괴로워했겠지. 특히나 감당할 수 없는 우성의 페로몬이었으니까. 그리고 오메가인 오빠는 다른 의미로 반응했을 거고.

에일린은 꽉 다물렸던 입술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제 속마음을 감추고 여유로운 척하기 위한 미소가 잘 비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쥐새끼라니요. 아무리 볼품없는 백작가라도 깨끗하게 관리하는걸요.”

“그렇다면 방금 들린 소리는 쥐가 아니로군요. 가서 확인해 봐야 하지 않습니까?”

“그건, 저희 가문의 집사가 알아서 하겠죠. 클라우디아가의 살림을 이끄는 사람이 할 일이니까요. 걱정해 주신 건 감사합니다.”

남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신경 쓰지 말란 명백한 선 긋기에 리하스트 대공의 시선이 에일린에게 돌아왔다.

저 눈빛을 계속 받아낼 수 있을까.

점점 부담스러워지고 있지만 리하스트 대공은 좀체 물러날 기미가 없었다. 에일린은 보지 못할 페로몬이 일렁이는 공간 속에서 팽팽한 대치가 이어졌고 그것을 먼저 깬 건 리하스트 대공이었다.

“힘이라고는 하나 없어 보이는 열성 알파, 손가락 하나에도 뒤로 넘어갈 것 같은 베타. 밖에는 빌빌대는 베타들.”

리하스트 대공의 무감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는 에일린은 가슴이 조여오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집사와 자신, 밖에 있는 기사까지 언급하는 리하스트 대공은 단조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 마음 놓고 있을 환경입니까?”

에일린은 미소를 유지하려고 작지 않은 심력을 소모했다.

리하스트 대공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에일린의 속을 사정없이 긁어댔다. 힘없는 베타 취급에 클라우디아가를 조금도 존중하지 않는 태도였다.

그가 보는 제 기사들이 부족할지 모르지만, 엄연히 클라우디아가의 기사들이었다. 제 오빠를 위해주고 자신에게도 예의를 갖춰주는 그런 충직한 사람들을 한데 싸잡아 말하는 저 입을 억지로 다물리고 싶었다. 

“여기서 열성 알파나 베타가 중요할까요?”

“그럼 다르게 말해 볼까요?”

“괜찮아요.”

“그래서…….”

대공의 은근한 목소리에 에일린이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을 억눌렀다.

“저 쥐새끼를 직접 확인하고 싶은데.”

‘너희가 모자라 보여서 친히 움직여주겠다는데 감히 거절을 해?’와 다를 바 없는 소리였다.

“거절할 자격이 그대에게 있던가?”

“그렇게 말하는 분이야말로…….”

아무 사이도 아닌 제 가문에 그리 간섭할 자격이 있냐고 말하려고 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에일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위협적일 정도로 장신의 단단한 몸이 압박하듯 다가온 것도 놀라울진대 리하스트 대공은 그대로 에일린을 지나쳤다. 망설임 없이 계단을 오르는 모습에 에일린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져갔다.

그는 직접 에단 오빠를 찾으러 가는 것이다. 어쩌면 페로몬을 뿜어낸 것조차 에단 오빠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그런 거라 여기자 리하스트 대공의 말과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이대로 그를 잡지 못하면 에단 오빠를 찾아낼 거다. 다급함이 목 끝까지 차오른 에일린은 촉박함에 심장이 조여오는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생각을 이끌어 내던 에일린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청혼에 대한 대답.”

리하스트 대공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가 느릿하게 돌아서자 에일린이 마른침을 꾹 삼켰다.

가뜩이나 큰데 계단 두어 개 올랐다고 더 고개를 들어야 했다. 그 비정상적일 정도로 차이 나는 눈높이가 그와 자신의 격차 같았다. 올려다보면 안 될 사람을 부른 듯 에일린은 어깨를 누르는 부담감을 느꼈다.

“할게요.”

에일린이 온갖 치밀어오르는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며 무작정 결론부터 말했다.

“그 결혼 내가 할게요.”

대공의 위압적인 시선에 에일린은 몸이 움츠러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청혼을 받은 게 떠올라 자신이 한다고 했지만 다른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다. 에일린은 조금 더 시간이 주어지지 않은 현실이 안타까우면서도 당장 자신이 내뱉은 말이 어떻게 돌아올지 몰라 두근거렸다.

에일린의 얼굴을 바라보던 리하스트 대공이 무심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격식 차릴 시간이 없습니다. 이대로 가서 바로 준비해야 하니 서두르죠.”

그의 사무적인 대답에 에일린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못 들었습니까? 시간이 없다고 했습니다.”

리하스트 대공이 에일린의 팔뚝을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억지로 바깥을 향해 몸을 돌린 것도 모자라 그에게 끌려가듯 나가야만 했다.

언제부터 자리하고 있었는지 마차 한 대가 저택의 입구를 막아서고 있었다. 괴물의 아가리처럼 새까만 입을 벌리고 있는 마차의 앞에서 에일린은 저도 모르게 발끝에 힘을 줬다.

이걸 타면 다신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에일린의 망설임을 귀찮게 여긴 리하스트 대공이 그녀의 등을 가볍게 건드렸다.

“타시죠.”

리하스트 대공의 은근한 압박에 에일린은 마지못해 마차에 발을 올렸다. 페로몬이 새어 나가지 못하게 특수한 판을 댄 마차였다. 가격이 상당해서 모든 귀족이 이런 마차를 구비하진 못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비열한 인간.”

와서 누구든 바로 데려갈 생각이었다는 거다.

에일린이 애꿎은 마차의 벽을 노려보다,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창문을 열었다.

저택이 멀어지고 있었다. 에일린이 다락방에 있을 오빠를 떠올렸다. 에단 오빠가 모든 걸 알고 얼마나 황당할까 생각이 들었다. 자기를 다락방에 올려놓고는 리하스트 대공을 따라가는 여동생이라니.

‘그렇지만 이게 최선이야.’

에일린은 처연한 빛을 띠는 눈을 감았다.

에단 오빠가 이 마차에 타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질 끔찍한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에일린이 목걸이를 쥐었다. 불안하거나 슬플 때마다 에일린은 목걸이를 쥐었다. 어떤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쥐는 것만으로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잠시 눈을 감고 펜던트 목걸이의 테두리를 매만지던 에일린이 뒤늦게 자각한 걸 떠올렸다.

“이 목걸이…….”

에일린이 목걸이를 들었다. 에단의 이름과 제 이름을 합해서 문양처럼 넣은 펜던트는 단순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가졌다.

에일린이 그것을 지그시 바라보다 반을 쪼개듯 열었다. 안에는 가족사진이 있었다. 부모님, 에단 오빠까지 4명이 찍은 가족사진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에일린은 펜던트에 이마를 댔다.

자신이 겪었던 그 모든 끔찍한 일들이 전부 진짜였다.

에단 오빠가 대공과 결혼한 후 자살하고, 집이 망하고 불행한 결혼생활을 겪은 그 모든 게 진짜였다. 꿈이길 바랐는데. 에일린은 절벽에 떨어져 죽고 시간이 돌아왔다.

그 모든 걸 증명하는 게 바로 이 목걸이였다. 왜 지금에서야 자각한 것일까. 펜던트 목걸이는 에일린이 에단의 결혼을 기념하는 의미로 줬던 선물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미래의 물건이었다.

***

‘가는 거야?’

에일린의 물음에 에단 오빠가 돌아봤다. 그는 리하스트 대공에게 양해를 구하고 에일린에게 다가왔다. 평소와 같이 머리에 손을 얹고 다정하게 토닥이며 에단 오빠는 말했다.

‘할아버지가 그러셨잖아. 우리 가문과 리하스트 대공가의 혼약은 다시 없을 행운이라고. 나는 네가 대공가로 가게 될 줄 알았는데, 내가 갈 줄은 예상 못 했어.’

‘흑, 오빠. 안 가면 안 돼?’

‘에일린. 울지 마.’

에단은 동생이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늘 상냥하던 오빠는 에일린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볼을 어루만졌다.

‘오메가가 된 순간부터 이런 날이 올 걸 예상했어. 이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니까 받아들이자. 결혼해서도 자주 찾아올게. 아니면 네가 올래?’

‘하지만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해야 하잖아.’

몇 번 지나치듯 본 게 다인 상대와 결혼하는데도 에단 오빠는 슬퍼하거나 낙담하지 않았다.

그게 제 운명인 듯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끼리 결혼하는 게 제일 좋지.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우선으로 따져야 할 게 있잖아. 가문, 형질 같은 거 말이야.’

에단은 제 설명이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말을 덧붙였다.

‘이건 비밀인데 지금 저 남자의 몸에서 나오는 페로몬 향이 정말 좋아. 그래서 나도 이 결혼이 싫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에단 오빠의 표정이 좋진 않았지만 베타인 자신은 모를 세상의 일이라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너도 나중에 발현하게 된다면 알게 되겠지.’

‘……좋아?’

‘음? 뭐라고?’

못 들은 에단이 에일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메가가 된 게 좋아?’

에일린은 어릴 적 발현한 오빠의 예쁜 얼굴을 보며 물었다.

에일린이 건넨 질문에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릴 때부터 동생의 물음을 그냥 넘긴 적 없던 에단은 이번에도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제법 긴 시간 고민하고 고민하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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