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모든 불행의 시작
에일린은 목까지 차오른 말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시간이 없었다.
“일단 들어가.”
에일린이 무자비하게 에단의 몸을 다락방 깊은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페로몬이 느껴져도 절대 신음 내지 말고 쥐 죽은 듯이 숨어 있어야 해. 그래야 오빠가 살고 나도 살아.”
에일린이 에단에게 단단히 경고했다. 그런데 그게 너무 의외인지 에단이 얼떨떨한 눈으로 한 단어를 되물었다.
“신음?”
“오빠 절대 들키면 안 돼. 들키면 끌려갈 거란 말이야.”
“그럼 싫다고 거절하면 되잖아. 이렇게 숨을 필요가 있을까?”
“오빠가 그 인간을 몰라서 그래.”
미래에 아주 잘 알겠지만 당장 지금은 절대 모를 것이다.
“아무튼 내 말 들어. 누가 오든 절대 내려오지 말고 부모님이 오면 그때 내려와. 알겠지?”
“에일린?”
에일린은 에단의 당황한 얼굴을 보고도 설명해줄 여유가 없었다.
당장 밖에서 들려온 말발굽 소리로 추측해보자면 금방 들이닥칠 것이다. 서둘러 창문을 열어 에단의 페로몬을 내보낸 에일린이 급히 현관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급히 에단을 숨겨야만 했던 원인의 이름을 짓씹듯 내뱉었다.
“로이드 리하스트 대공.”
제 오빠를 결혼 상대로 데려가 부하들에게 넘겨준 개새끼가 오고 있었다.
***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자신이 불쌍해서 신이 시간을 되돌려준 게 분명했다.
[당신의 오빠는 물론 부모까지 다 대공이 죽인 거야.]
죽기 직전 들었던 패트릭의 말이 떠올랐다. 제 불행은 리하스트 대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대공과 결혼한 오빠가 자살했고 가문이 망해버렸다. 모두가 죽고 에일린 혼자 남았다.
‘다시 그 끔찍한 일을 겪고 싶지 않아.’
그래서 에일린은 어떻게든 리하스트 대공에게 오빠를 넘기지 않을 작정이었다.
“아가씨, 바깥에 리하스트 대공이 와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에일린을 발견한 집사가 바깥의 사정을 고했다.
아까 급하게 에단을 숨긴다고 숨이 차올랐던 에일린이 대답 대신 호흡을 고르는 데 집중했다. 급하게 그를 맞이해 봐야 여유만 없어진다.
어느 정도 호흡이 안정되자 에일린이 말했다.
“문을 열어요.”
집사가 문을 열자 빛을 등진 검은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검은 인영이 집 안으로 한 발 들어오자 그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림자가 가셨다.
남자의 얼굴을 본 에일린의 입이 스르르 벌어졌다.
우성이라는 형질은 신의 선택을 받아야만 가능한 것이다. 부족함 없이 태어난 그들은 외양 또한 가히 비견할 자가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했었다.
당장 다락방에 숨겨놓은 에단만 해도 우성 오메가로 눈을 뗄 수 없는 미인이었다. 지금 들어온 남자는 에단과 다른 의미로 엄청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짙은 흑발의 짧은 머리카락 아래 각도에 따라 음영이 멋있게 드리우는 얼굴은 조각을 빚어놓은 것처럼 잘생겼다. 높고 오뚝한 콧날과 육감적인 입술이 눈에 띄었지만 무엇보다 시선을 압도하는 건 그의 눈이었다.
세상을 내려다보는 오만한 눈.
그의 시릴 정도로 차갑고 위압적인 눈빛에 에일린이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저 남자를 속일 수 있을까?
에일린이 치마를 잡으며 살짝 무릎을 굽혔다.
“어서 오세요.”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리하스트 대공의 한쪽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 그도 그럴 게 그는 불식간에 찾아든 것이다.
상당히 무례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투였다.
‘힘이 없는 게 이렇게 서글프다니.’
여기서 무례를 따졌다가 손해를 볼 건 리하스트 대공이 아니었다. 황족의 피가 흐르는 대공가에 비해 영지조차 없는 에일린의 가문은 내세울 게 하나 없었다.
“설마요.”
원래는 갑자기 들이닥친 리하스트 대공이 다짜고짜 오빠인 에단을 끌고 가는 거였지만 에일린이 회귀하면서 그가 올 것을 미리 알았다. 그러나 그걸 사실대로 말할 수 없기에 적당히 말을 돌렸다.
“말 울음소리가 들려서 나와본 것뿐이에요.”
리하스트 대공은 에일린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 속에서 에일린은 동요하지 않으려고 몰래 입 안의 살을 깨물며 버텼다.
숨이 막혀올 정도로 긴 침묵 끝에 리하스트 대공의 입이 열렸다.
“에단 클라우디아를 보러 왔는데.”
방금 시험대에 올라간 듯 긴장하고 있던 에일린은 안도하며 호흡을 고르기도 전에 다음 시험문제를 받았다.
다락방에 숨겨놓은 에단.
우성이라 제 페로몬 조절을 잘하는 편이지만 마찬가지로 앞에 있는 남자 역시 우성이라 예민하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 에일린은 처음 인사할 때와 다르게 한층 목소리를 키웠다.
자신한테 관심을 가지도록.
“여기 오빠 없는데요?”
에일린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리하스트 대공을 응시했다.
“없다고?”
리하스트 대공의 의문에 에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안을 훑어보는 동안 에일린은 긴장으로 고이는 침을 삼켰다.
‘음?’
옆에 조용히 있던 집사가 부들 떠는 게 보였다. 집사의 반응으로 보아 리하스트 대공은 지금 페로몬을 뿜어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에일린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페로몬을 느끼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지금도 남자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에 눌리는데 페로몬까지 느꼈다면 절대 이런 연기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에일린은 아직 발현 전인 걸 다행으로 깨달았다.
“이를 어쩐다.”
“다음에 정식으로 약속을 정하고 자리를 만들면 좋겠습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약속은 할지언정 절대 에단을 그 자리에 보내진 않을 것이다.
“그럴 시간이 없어서.”
리하스트 대공의 늘어지는 말끝에 많은 의미가 숨겨져 있었다.
에일린은 과거 리하스트 대공이 에단과 급하게 결혼식을 치르자마자 전쟁이 벌어지던 시하르 공국으로 달려간 걸 알고 있었다. 우성 알파인 그가 혹시나 잘못될까 대공가의 원로원에서 무조건 결혼해야 보내준다는 조건을 에단 오빠가 흘리듯 말한 걸 떠올렸다.
마침 대공에게는 선대에서 정해준 짝이 있었고, 그 상대는 당연하게도 오메가인 에단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놓고 정작 오빠를 버렸잖아.’
뜨겁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에일린은 입술을 질끈 다물고 눈을 내렸다. 그렇지 않으면 에단 오빠를 숨긴 게 무색하게 모든 감정이 드러날 것 같았다.
‘당신이 급한 거지 우리가 급한 건 아니거든.’
에일린은 이번에 어떻게든 에단 오빠를 데려가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가 결국 원로원과 싸우든 다른 오메가를 데리고 결혼하든 제 알 바 아니었다.
리하스트 대공의 눈이 잠시 주변을 훑는가 싶더니 에일린에게 돌아왔다.
“그럼 당신이라도 데려가야겠군요.”
……응?
이 인간이 미쳤나.
에일린은 울컥해서 따지고 싶은 걸 억지로 가라앉혔다.
상대는 리하스트 대공이다. 제국의 날고 긴다는 새들도 한 수 접어주는 상대.
“절 왜…… 아무리 대공가라도 이렇게 밝은 대낮에 납치라니요.”
“납치가 아니라 청혼입니다. 나와 결혼해 주시죠.”
결혼해 주시죠라니?
에일린이 기함할 소리를 태연하게 내뱉는 대공을 보았다.
“세상에 누가 청혼을 이렇게 흉흉하게 하죠?”
“그래서 대답은?”
리하스트 대공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답을 요구했다.
당연히 싫었다. 에단 오빠를 넘겨주는 게 싫은 건 당연하고, 아예 리하스트 대공가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무작정 거절하기엔 걸리는 게 많았다.
리하스트 대공 역시 약속된 가문과 결혼하라는 게 마음에 안 들었을 테지만 왔다. 이건 전적으로 이 정략결혼을 이끌어 낸 할아버지의 잘못이었다.
할아버지는 평소 사이가 좋았던 전전대의 대공과 태중 혼약을 맺고 가문에 약서를 남겨두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끌려갈 순 없어.’
에일린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곧 리하스트 대공을 밀어낼 좋은 구실이 생각났다.
“전 베타인걸요?”
1년 후에 발현 예정이긴 하지만 아직은 베타가 맞지. 선대에 가문끼리 정략결혼을 맺었어도 베타에 불과한 자신을 데리고 가면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 알파와 베타가 만나는 건 상관없지만 후계자가 알파로 태어날 확률이 지극히 떨어진다.
‘과연 원로원에서 날 허락하겠어?’
“상관없습니다.”
“그럴 줄 알았…… 뭐라고요?”
“베타라도 아이는 낳을 순 있으니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에일린이 황망한 듯 눈을 들자 리하스트 대공의 딱딱하던 입매가 천천히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건 대공님만의 생각 아닌가요?”
에일린은 일단 일차적으로 거부의 뜻을 비쳤다.
여기 오빠는 없고 자신은 베타라 그의 상대가 될 수 없다.
“그런가요?”
리하스트 대공이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가 나가기만 기다리던 에일린은 이상한 장면을 발견했다. 집사가 제 목을 부여잡고 잦은 기침을 하는 것이다.
“갑자기 왜 그러는…….”
에일린이 뒤늦게 말도 안 된다고 하려고 할 때였다.
쿵!
위에서 들려온 소리에 에일린의 심장도 쿵 떨어졌다. 리하스트 대공이 천천히 시선을 위로 올렸다. 천장을 훑어보는 것뿐인데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천장을 뚫어 다락방에 있는 오빠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인데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하고 있는데 리하스트 대공이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가 보는 방향에 에일린은 목이 졸려오는 기분을 느꼈다.
“위에 쥐새끼가 있나 봅니다?”
그것도 아주 큰.
리하스트 대공의 말에 에일린의 얼굴이 희게 질려갔다.
오빠가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