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4)화 (4/120)

4화. 우성 알파의 상대

‘좋아.’

에단이 대공을 바라보았다.

‘리하스트 대공은 우성 알파잖아.’

그렇게 말하는 에단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에일린에게로 말을 돌렸다.

‘난 괜찮아. 대신 에일린 너야말로 사랑하는 상대와 결혼했으면 좋겠어. 이제 누구도 우리 가문을 무시하지 않을 거니까 마음껏 네가 원하는 상대를 골라 사랑해줘. 알겠지?’

‘아직 멀었습니까?’

기다리던 리하스트 대공의 얼굴에 짜증이 스며들었다. ‘금방 갈게요.’ 외친 에단이 마지막으로 에일린의 몸을 끌어안았다 놨다.

또 보자는 인사와 함께 돌아서는 오빠의 등을 향해 에일린이 손을 뻗었다.

“……아니야.”

에일린이 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오빠 아니야.”

죽을 거야. 오빠, 죽을 거잖아.

대공은 돌아보지 않을 거란 말이야.

오빠 절대 그 사람과 행복해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

“흑, 가지 마. ……제발.”

에일린이 흐느꼈다. 대공가에 간 오빠의 소식을 기다렸고 두어 번 만난 게 다였다. 오빠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의 이유를 알지 못한 어느 날 갑작스럽게 오빠를 잃었다.

“안 돼…… 안 돼!”

에일린이 절규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하, 이건 또 뭐야.”

그리고 어이없는 듯한 목소리가 에일린의 정신을 끌어당겼다.

“잠꼬대가 요란하군요.”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에일린이 흐린 시선을 들었다.

지금 누구의 목소리였던 거지? 난 왜 이렇게 가슴이 미어지는 거지? 에단 오빠는 어디 있는 거야? 오빠가 죽은 건 누구 때문이었지?

온갖 생각이 난잡하게 떠오르며 에일린을 괴롭혀댔다.

“뺨이라도 때려야 일어날 텐가.”

아주 평온하게 읊어대는 협박에 에일린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고 있었다.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있는 그림 같은 남자였다. 너무 아름다워서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동시에 잔혹한 남자였다.

“개새끼야. 좆같은 우성 알파…….”

목소리에 공기가 섞여 흩어졌다.

로이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에일린은 리하스트 대공의 싸늘한 눈빛에 민망한 듯 제 얼굴을 감쌌다. 저 사람을 개새끼로 부른 걸 몰랐으면 좋겠는데 눈빛을 보니 그른 것 같았다.

‘아니 왜 우성 알파가 저 남자밖에 없냐고.’

전 대륙을 통틀어 우성 알파는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었고, 제국엔 리하스트 대공이 유일했다. 그냥 알파라고만 중얼거렸어도 다른 사람이라고 변명해보겠는데 왜 하필.

에일린은 아예 제 잠꼬대를 인식 못 한 척 시치미 떼기로 했다. 입가에 흐른 침을 닦는 척 얼굴을 가렸다. 

“마차가 너무 편해서 저도 모르게 잠들었나 봐요.”

그리고 그의 시선을 피한 채 손등에 입술을 대고 웅얼거렸다. 

‘하루만이라도 시간이 있었으면 졸지 않았을 텐데. 왜 대공이 오는 날 눈을 뜬 거야.’

며칠만 시간이 있었어도 리하스트 대공을 맞이할 준비를 철저히 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특히나 에단 오빠를 안전한 곳에 숨기지 못했을 때 얼마나 긴장했는지 말도 못 한다. 그런 사정은 아무것도 말 못 하니 에둘러 표현하는데 리하스트 대공에게서 아무 말이 없었다.

“전하?”

“아예 거기다 방을 차려주면 됩니까?”

언제까지 마차에 있을 거냔 빈정거림에 에일린이 마지못해 내렸다. 그리고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 리하스트 대공의 뒤로 펼쳐진 건물을 발견하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클라우디아 저택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대공저는 하나의 성이나 다름없었다. 황성만큼이나 높은 첨탑은 물론 뾰족한 지붕과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건물의 크기에 압도당했다.

“정말 크네요.”

처음 본 것도 아니지만 볼 때마다 놀라는 크기였다. 이런 곳에서 살면 천 명도 방 하나씩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단순 계산으로 면적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서린 기이한 표정을 발견한 에일린이 벌린 입을 다물었다. 몇몇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또 몇몇은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내 형질을 알아본 거야.’

시종들은 마차에서 에단이 아닌 에일린이 내리자 의아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오면 안 될 곳에 자청해서 온 에일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라도 가서 에단 오빠를 데려온다고 하면 큰일이었다.

‘모른 척 버텨야 해.’

“바로 방에 보내줄 테니 부족한 잠을 자는 게 좋겠군요.”

에일린만큼이나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쓰지 않는 리하스트 대공이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집사를 불렀다. 집사가 눈치껏 다가와 방을 안내해주겠다는 소리에 에일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리하스트 대공과 헤어지면 아까 있었던 일이 다 지나간 과거가 될 테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 잠 하니까 생각났는데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러나 리하스트 대공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나 보다.

‘그럼 그렇지.’

대놓고 자신을 욕했는데 아무 말도 안 하고 넘어가겠냐고.

그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에일린이 치맛자락을 꼭 쥐었다. 나를 개새끼라 부른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할지 생각해야 했다. 역시 처음대로 모른 척 제가 그랬나요? 밀고 나가는 게 제일 좋겠다.

“이름이 뭡니까?”

“개새끼를 말한 건 저도 모르…… 에일린입니다.”

이건 그냥 개새끼라 외친 걸 알고 있다고 대놓고 티 낸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에일린이 울고 싶은 걸 참으며 제 이름을 말했다. 그게 너무 억울해서 에일린이 먼저 말을 걸었다.

“왜 잠 하니까 제 이름이 생각난 건데요?”

“아까 당신을 부르려고 하는데 이름을 몰라서 말입니다.”

“아…….”

에일린이 눈으로 물어봤다.

당신은 그럼 이름도 모르는 여자에게 청혼한 건가요?

리하스트 대공은 에일린의 눈빛을 읽지 못했는지 제멋대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기억하지요.”

돌아선 리하스트 대공의 말이 에일린의 귀를 감싸고 떠나질 않았다.

이름을 기억하겠다는 거겠지? 설마 다른 걸 기억하겠다는 건 아닐 거야.

집사의 뒤를 따라가는 에일린은 그렇게 스스로 생각하고 싶은 쪽으로 억지로 방향을 잡았다.

***

대공가에서는 주기적으로 열리는 회의를 제외하고서도 임시 가신 회의를 열 수 있었다. 그것을 제의할 수 있는 사람은 대공과 원로뿐이었는데 그만큼 원로원의 영향력이 제법 크다는 것과 같았다. 회의가 열리면 대공가에 소속된, 자격을 갖춘 자는 모두 참석해야 했다.

회의가 시작되고 로이드에게 가장 먼저 질문을 건넨 건 가장 젊은 원로이자 로이드의 숙부인 칼릭스였다.

“대공. 뭐 하나만 물어도 됩니까?”

“말씀하십시오.”

칼릭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아까의 일을 꺼내 들었다.

“방금 데려온 클라우디아가의 상대가 혹시…….”

“베타입니다.”

“내가 잘못들은 줄 알았더니 맞군요.”

칼릭스의 한숨 쉬듯 내뱉는 말에도 로이드는 무감한 표정이었다. 그들의 생각이 어떤지 관심 없고 자신이 데려온 베타에 대해서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반응이었다.

“베타라니요. 그 가문에 우성 오메가가 있잖습니까. 그를 데리러 간 게 아니었습니까?”

“제 정략결혼의 상대로 클라우디아가의 핏줄 외에 다른 조건은 없었습니다만.”

“…….”

회의에 참여한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클라우디아가와 태중 혼약을 약속한 건 칼릭스의 아버지였던 선선대 리하스트 대공이었다. 그때도 어찌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의 결혼을 약속했냐고 따졌지만 리하스트 대공은 그 핏줄이 괜찮아 보여서 그랬다는 별거 없는 이유를 들먹였다.

그 피가 고스란히 손자에게 내려갔는지 아주 대답이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닮기는 내가 더 닮아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조카가 더 닮냐고.’

칼릭스가 기가 찬 듯한 얼굴로 로이드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클라우디아가의 핏줄이라는 조건만 채우면 상관없다지만 우성 알파의 짝으로 당연히 오메가를 데려왔어야 한다.

그런데 로이드는 뭐가 문제냐는 듯 굴고 있었다.

칼릭스가 어떻게든 로이드를 설득하려고 할 때였다. 가만히 지켜보던 누군가가 무거운 시선과 함께 말을 걸어왔다. 원로원의 대표 원로인 알란이었다.

“베타는 후계자의 문제가 있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있습니다.”

알란의 진지한 음성을 로이드가 가볍게 받아치자 칼릭스가 끼어들었다.

“그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칼릭스는 순간 이 답답한 조카야! 지르고 싶은 걸 겨우 억눌렀다. 그사이 알란이 다시 로이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베타는 알파의 아이를 낳을 수 있어도 형질을 띌 확률이 극히 적지 않습니까.”

“오메가라고 무조건은 아니지요.”

로이드의 태평한 반박에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가라앉았다. 대공으로의 능력은 뛰어나기 짝이 없지만 한번 고집을 부리면 하늘이 두 쪽 나도 바꾸지 않는 게 저 인간이었다.

“크흠, 전하.”

칼릭스가 로이드를 부르는 동시에 사람들의 시선이 칼리스에게 향했다. 그들은 칼리스가 대공을 말려주길 바랐다.

“안타깝게도 선대 공작님 때는 동성에 형질이 같아서 이어지지 못했지만, 이번엔 딱 맞춘 듯 우성 오메가가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대공의 상대는 당연히 그 우성 오메가라고 여겼는데 왜 엄한 아가씨를 데려왔습니까?”

칼릭스의 물음에 로이드의 입매가 슬쩍 비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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