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화>
아연은 기가 막혀 멍하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뒤늦게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퍽 때리니, 성현이 짓궂은 소년처럼 키득거렸다.
“나 왜 좋아하고 있냐…….”
에스프레소 머신 뒤편에 살짝 몸을 숨기고 있던 규영이 주먹을 입에 문 채 중얼거렸다. 남의 연애를 관람하며 흐뭇해하는 스스로가 우스웠으나, 입가엔 연신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멀찍이 떨어진 거리라 서로 투닥거리는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분명 로맨틱한 사랑 표현이 오가는 중인 게 틀림없었다.
성현이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아연에게 얼굴을 기울이고 장난스럽게 이마를 콩 찧었다. 규영은 숨을 죽이고 무어라 속살거리고 있는 성현의 입매를 주목했다. 아마도 로맨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대사가 흘러나오고 있으리라.
“…….”
민재는 하나인 것처럼 붙어 선 두 사람과 얼마 떨어진 거리에 서서 그런 그들을 슬쩍슬쩍 구경하는 규영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가 저렇게 재밌을까.
완전히 자신들만의 세상에 빠져 버린 연인을 둘러싼 공기가 민재의 눈엔 영 낯간지럽기만 했다. 차마 눈 뜨고 못 봐줄 정도로.
그런 그와는 달리, 규영은 흡사 즐겨 보는 드라마에 완전히 몰입한 관람객처럼 보였다. 양 뺨을 붉히고 입꼬리를 꾹꾹 억눌러 가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귀엽긴.
덩달아 피식 웃음을 흘린 민재가 고개를 작게 가로저으며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무례한 손님이 청소를 제대로 마쳤는지 확인할 시간이었다.
* * *
“어, 도착했어. 먼저 앉아 있을게. 아니, 상관없어.”
“김준성!”
준성은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매캐한 연기에 둘러싸인 채 몸을 앞으로 쭉 뺀 남자가 준성을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우리 지금 재밌는 거 하는 중인데 너도 껴라.”
“뭔데?”
“우선 이리 와서 앉아 봐.”
준성은 통화를 종료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후 채근하는 남자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눈앞에 펼쳐진 공간은 드높은 층고 덕분에 시원한 개방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진녹색과 암회색으로 통일한 인테리어로 인해 차분하면서도 은밀한 분위기를 풍겼다.
널찍한 간격을 유지한 채 띄엄띄엄 놓여 있는 테이블 중 유난히 회색빛 연기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 있었다.
그 근처만 묵직하게 공기가 정체되어 있는 것은 테이블에 모여 앉은 남자 모두가 쉴 새 없이 뻐끔대며 새로운 연기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었다. 준성도 익히 아는 얼굴들이 불붙인 담배를 꼬나물고 반갑다는 듯 손짓했다.
“어? 김준성. 오랜만이네? 요즘 잘 안 보이는 것 같더니. 그동안 왜 안 왔냐?”
“몇 주간 한국에 없었어.”
준성은 어깨를 으쓱하며 빈자리에 걸터앉았다. 짙은 담배 연기 사이로 은밀한 풀 냄새가 풍겼다. 살며시 눈살을 찌푸리는 준성에게 남자 중 하나가 술잔을 내밀었다. 주황빛을 띠는 액체가 찰랑거렸다.
이곳은 P 소사이어티의 본진 격인 라운지 바. P 소사이어티는 미국 버지니아에 본부를 둔 청년 사업가들의 글로벌 모임으로, 국내에서는 재벌 2, 3세들을 주축으로 한 이른바 사교 클럽이었다.
회원 명단은 철저히 비공개에 부쳐져 있으며 정치인에게는 회원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 게 특이점이라 할 수 있었다.
회원 3인 이상의 추천을 받아야 입회가 가능한 다소 폐쇄적인 이 모임에 준성은 가장 최근 입회한 축에 속했다. 철저히 재벌가 자제 위주로 이루어져 있던 모임의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전문직 고소득자에게도 문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회계사인 준성을 비롯해 재벌가 출신이 아닌 이는 사실 몇 되지 않았다.
“또 미국 갔다 왔어? 거기에 여자라도 숨겨 둔 거 아냐?”
준성에게 술잔을 밀어 준 남자가 빙글거렸다. 회계사인 준성을 두고 속으로는 남의 뒤 봐주는 일이나 한다며 업신여기면서도, 그에게 한마디라도 더 붙여 보지 못해 안달인 이중적인 놈들이다.
준성이 태강의 ‘그 권성현’이 곁에 가까이 두는 몇 안 되는 인물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모두에게 동등한 모임이나 이면에는 분명한 서열이 존재했다.
1년에 한두 번 모임에 나타날까 말까, 극도로 저조한 참석률에도 불구하고 당연하게 서열의 정점에 군림하는 자가 권성현이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런 권성현의 눈에 들어 보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김준성은 그야말로 올라타고 싶은 징검다리로 보일 수밖에.
“여자를 숨겨 두긴. 내가 넌 줄 아냐?”
준성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손에 든 술잔을 흔들었다. 모임에 입회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래 봤자 대부분 고등학교 동창 혹은 대학 동문, 다 거기서 거기였다.
게다가 발이 넓고 정보가 빠르기로는 그 누구보다 준성이 독보적이었다. 뭔가 안다는 뉘앙스의 준성의 말에 찔끔한 표정을 지은 남자가 얼른 말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너 미국 가 있었으면 도성그룹 자선 행사 때 안 왔겠네? 우리 지금 그때 있었던 일 얘기하고 있던 중인데.”
준성이 무슨 일인지 묻는 표정으로 눈을 들었다. 그러자 옆에서 담배를 뻐끔거리던 남자가 재떨이에 꽁초를 비벼 끄며 말을 이었다.
“그날 권성현이 보란 듯이 한아연 손을 잡고 나타났거든. 다들 탄식했지. 아아, 권성현이 결국 한아연을 잡아먹었구나.”
“너 알았어? 걔네 사귀는 거.”
준성은 껄끄러운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뭐, 대충…….”
미처 숨길 수 없는 부러움이 담긴 시선들이 준성에게 쏠렸다.
“야, 그런 중대한 소식을 너 혼자 알고 있냐? 우리가 여기 모여서 죽치고 앉아 있는 이유가 뭔데. 정보 공유 몰라?”
“얼마 안 됐어. 나도 미국 가기 직전에 알았고.”
준성이 중얼거리며 입가에 술잔을 가져왔다.
“아무튼, 권성현 그 새끼, 학교 다닐 때부터 지가 무슨 한아연 아빠라도 되는 것처럼 끼고돌면서 애지중지하더니, 결국 이렇게 될 거면 지가 우리랑 다를 게 뭔데.”
“그 새끼가 한아연 좋아하던 애들 패고 다녔잖아. 존나 어이없었지. 그러면서 지는 한아연한테 흑심 같은 거 없고 청렴결백한 것처럼 결벽 떨고.”
“솔직히 자빠뜨려도 한참 전에 자빠뜨릴 줄 알았는데, 이제야 눕힌 거 보면 권성현 참을성 하나는 인정이다.”
낄낄 웃던 남자가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이며 은근히 목소리를 키웠다.
“근데 한아연 살아 있는 게 용하지 않냐? 그걸, 어? 그거 불가능한 크기 아니었어?”
남자가 팔뚝을 반대편 손으로 잡고 아래서 위로 휘두르며 상스러운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아아, 맞다. 권성현 그 새끼 거 존나 크잖아.”
“말자지.”
희뿌연 담배 연기 속에서 일제히 웃음이 터졌다. 그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부르던 별칭이었다.
“그걸 보고도 사귀는 거면, 한아연도 보통은 아니네.”
“보통 아니어도 좋으니까 얼른 FA시장에 풀렸으면 좋겠다. 그동안 권성현 독점 체제였잖아. 남이 넘보지도 못하게 꽁꽁 숨겨 두고는 지 혼자 독차지했으면서, 정작 건드리진 않고 침만 흘리고 앉아 있는 꼬락서니 존나 답답했는데.”
“그런 면에서는 이제라도 둘이 붙어먹었다는 게 희소식인 거지. 사귀어야 헤어지니까. 언제 내 순서 돌아오나 목 빠지게 기다리는 놈들이 이 바닥에 어디 한둘이야?”
준성은 술잔을 탁 하고 내려놓으며 불쾌함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당사자가 없는 자리라지만, 도를 넘어선 희롱을 듣고 있기 어려웠다.
“난 이만 갈란다.”
어떻게 된 놈들이 비싸디비싼 돈을 처발라서 부모가 애지중지 키워 놨더니 사상이 불순하기 짝이 없었다. 더군다나 나이를 어디로 처먹었는지 모르게 학교 다닐 적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모이기만 하면 하루 종일 뚫린 입으로 씨불이는 이야기라곤 저딴 수준 낮은…….
속으로 넌더리를 치며 의자를 드르륵 뒤로 밀던 준성의 팔이 턱 붙잡혔다.
“꼴에 또 권성현 친구라고 뻣뻣하게 굴긴. 잠깐 더 앉아 봐. 우리도 너랑 수다나 떨자고 부른 거 아니니까.”
준성이 붙잡힌 팔을 털어 내며 짜증스럽게 눈을 흘겼다.
“뭔데.”
“내기 안 할래? 권성현이랑 한아연 앞으로 어떻게 될지. 우리끼리는 내기가 안 돼. 죄다 한쪽에다 걸어서.”
무리 중 하나가 실없이 웃으며 제 핸드폰 화면을 켜서 보여 주었다. 화면에는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 남자들을 포함한 여러 명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 위로 적힌 굵고 큰 글씨가 곧장 눈에 들어왔다.
[반년 안에 헤어진다.]
그 글귀 아래 각자 판돈으로 무엇을 얼마나 걸었는지가 빼곡히 기록돼 있었다. 하여간 내기 도박 같은 유흥거리에는 늘 진심인 놈들이다.
준성은 당장 불법 도박으로 잡혀 들어가도 놀랍지 않을 규모의 내기 판돈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놈들이 하나같이 권성현과 한아연이 헤어질 거라는 확신에 어이없을 만치 큰돈을 턱턱 내걸고 있었다.
이 정도면 거의 정수 물을 떠다 놓고 두 사람이 헤어지길 열렬히 저주하는 것에 가깝지 않은가.
“어때, 반대편에 걸 생각 없어? 아무도 그쪽에 안 걸면 결국 이 내기판은 나가리인데, 그럼 재미없잖아. 다 재미로 하는 건데.”
“베팅해 봐. 확률은 낮아도 네가 이기면 보다시피 거의 로또 맞는 수준이야.”
준성을 내기판에 끌어들이기 위해 다들 한마디씩 보태었다. 그러나 정작 준성은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자신이 이런 수준 낮은 새끼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리란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을 죄 없는 한아연. 그녀를 떠올리니 가슴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게 울컥 솟구쳤다.
사실 따지자면 준성 역시 두 사람이 얼마쯤 사귀다가 결국은 이런저런 문제에 부딪혀 헤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쪽에 속한다. 하지만 한아연의 불행을 점치며 낄낄거리는 놈들을 눈앞에서 가만히 보고 있자니 배알이 심하게 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