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6화 (79/96)

<외전 6화>

“권성현 그 새끼, 한아연이 눈에 안 보이면 불안한 개새끼처럼 쩔쩔매더니 역시나 코앞에 끼고 있었어. 그 새끼 심각한 의처증 환자라는 데에 내가 갖고 있는 우리 회사 지분 다 건다.”

핸드폰 너머에서 무어라 웅얼거리는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던 경욱이 코웃음을 픽 내뱉었다.

“한아연 뭐 입고 있었냐고?”

그가 되물으며 흘끗 고개를 돌렸다. 유리창 너머로 아연의 모습을 찾는지 시선이 여기저기를 배회했다.

“그냥 평범하게 셔츠 같은 거 입고 있던데. 그럼 뭐 유니폼이라도 입고 있을 줄 알았냐? 하, 미친 새끼. 하여간 드럽게 밝히지. 상상력도 존나 풍부해요.”

즐거운 듯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길거리에 퍼졌다. 질 낮은 잡담을 지껄이면서 목소리를 낮추는 기색도 없었다.

“가슴은 여전히 죽이더라. 학교 다닐 때부터 거기 달려 있던 게 어디 가겠냐? 야, 잘도 주무르기만 하겠다. 밤낮으로 물고 빨겠지.”

물걸레질을 시작한 민재가 멈칫하며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부럽다. 권성현 그 새낀 다 가졌네. 아! 뭐야, 씨발…….”

시시껄렁하게 입술을 씰룩이며 다시금 가게 안쪽을 힐끔대던 홍경욱이 돌연 욕설을 흘렸다. 귀에서 핸드폰을 뗀 그가 시선을 내리자 질척하게 젖은 대걸레가 구두뿐만 아니라 바지 자락까지 침범해 있었다.

“죄송합니다. 손님이 칠칠치 못하게 바닥에 흘리신 커피를 치우느라고요. 좀 비켜 주시겠어요?”

민재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여전히 경욱의 구둣발 위에 올라가 있는 대걸레를 꾸욱 짓누르며.

“씨발, 장난해? 일부러 그래 놓고 이게 어디서……. 당신 미쳤어?”

민재는 대걸레 자루를 쥔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닌데요.”

“이거부터 안 치워?”

홍경욱은 발을 거칠게 굴러 발등 위에 얹어진 대걸레를 털어 냈다. 그러고는 얼룩진 바지를 검지로 가리키며 펄펄 뛰었다.

“너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이게 얼마짜리 바지인 줄 알어? 바로 미팅 들어가야 되는데, 씹…….”

그때, 꽥꽥거리는 목소리 사이로 나른한 저음이 끼어들었다.

“무슨 일?”

저속한 통화를 듣다못해 충동적으로 행동하긴 했지만, 곤란해진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골몰하던 민재가 눈썹을 크게 들어 올렸다. 민재를 노려보던 홍경욱도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단골 카페 앞에서 무슨 소란인지, 궁금해서.”

권성현이었다.

홍경욱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혹시라도 제 통화 내용을 엿들은 것은 아닌지 덜컥 겁부터 났다. 학교 다닐 적 한아연을 주제 삼아 야한 농담을 따먹다가 권성현한테 걸려서 죽도록 얻어터진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눈치를 살피는 옛 습관이 도진 것이다.

“응? 무슨 일이야, 알바생?”

홍경욱의 지레 찔린 얼굴을 한가로이 관찰하던 성현이 민재에게 물었다.

“아아, 이 손님이 커피를 쏟으셔서 닦는 중인데 안 비켜 주셔서요.”

권성현의 시선이 민재를 향한 사이, 경욱은 재빨리 눈을 굴려 유리창 너머 카페 안을 살폈다. 심술을 좀 부렸다고 그새 제 남자 친구한테 쪼르르 일러바친 건가 싶었는데, 한아연의 표정을 보니 오히려 제가 더 놀란 얼굴이다.

저걸 봐서는 아무래도 한아연이 부른 건 아닌 것 같지만, 권성현이 지금 이 순간 우연히 나타났다고 하기엔 뭔가를 알고 온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만큼 귀신같은 타이밍이었다.

저 낯짝만 번드르르한 의처증 환자가 가게 앞에 감시라도 붙여서 제 여자 주변을 내내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제법 그럴듯한 의혹이 피어올랐다.

경욱은 속으로 혀를 내두르면서도 애써 태연하게 웃음 지었다.

“이야, 반갑다, 권성현. 여기서 만나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 너희 회사에 볼일 있어서 들어가려던 참이었는데.”

경욱은 저도 모르게 절로 굽신거리는 허리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성현의 어깨를 반갑다는 듯이 툭 쳤다. 권성현은 경욱의 손이 붙었다 떨어진 자리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경욱의 살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우리 HT에서 이번에 검단신도시 건축 투자 건 들어가려고 준비 중이거든. 오늘은 입찰 조건도 다시 한번 자세히 좀 듣고, 겸사겸사 인사도 할 겸…….”

나한테 그딴 얘길 왜 쓸데없이 늘어놓느냐는 듯 빤히 경욱을 쳐다보던 성현이 불쑥 물었다.

“너, 이름이 황욱재였나?”

“……아니. 홍경욱인데.”

씨발. 저 새낀 만날 때마다 저래.

경욱은 이를 악물고 떨떠름하게 웃으며 자신의 이름을 정정했다. 비록 대학교는 갈라졌어도 명색이 초중고 동창인데, 권성현은 저따위로 매번 사람 이름을 바꿔 불렀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내색할 수 없는 처지가 더 자존심이 상했다.

“아아. 홍경욱.”

성현은 생전 처음 들은 이름인 양 심드렁하게 읊조렸다. 그래 봤자 외울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이는 무관심한 태도로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꿰어 넣고는 경욱이 밟고 선 바닥을 눈짓했다.

“본인이 어지른 건 본인이 치워야지, 경욱아.”

성현은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여 키 차이 때문에 한참 어긋나 있던 눈높이를 대충 맞추었다.

“어디서 배워 먹은 좆같은 매너야. 양아치도 아니고.”

상스럽게 속삭이는 말과는 달리, 입가에 번지는 느른한 미소는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홍경욱의 넋마저 빼놓을 정도로 근사했다.

* * *

“무슨 일이야?”

아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이 시간에 성현이 카페에는 무슨 일로 왔는지, 가게 바깥에서는 홍경욱과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갈피를 잃은 질문이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와 특유의 거침없는 걸음으로 아연에게 다가선 성현이 태평하게 웃었다. 그럴 리는 없었겠지만, 혹여라도 주먹다짐이라도 일어날까 하는 염려로 잔뜩 긴장하고 있던 아연은 맥없이 어깨를 떨궜다.

“민재 씨, 괜찮아요?”

그녀가 마음 쓸 만한 일이라면 좀처럼 쉽게 털어놓는 법이 없는 성현의 성격을 아는지라, 아연은 공략할 상대를 다른 쪽으로 바꾸었다. 홍경욱에게 대걸레를 넘겨주고 성현의 뒤를 따라 쭐레쭐레 카페 안으로 들어오던 민재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민재도 별 대답이 없자 아연은 고개를 쭉 빼서 유리문 너머 순종적인 태도로 대걸레질 중인 홍경욱을 살펴보았다.

“바깥에서 무슨 일…….”

입을 열기 무섭게 커다란 손이 아연의 턱을 감싸 쥐었다.

쓸데없는 일에는 관심 끄고 내 얼굴이나 봐.

그렇게 말하는 성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가 아연의 얼굴을 돌려 자신을 보게 고정했다.

“아무 일 없어.”

그의 손아귀에 턱이 잡히고도 아연의 시선은 여전히 옆으로 향했다. 그런 그녀를 나무라듯 성현이 말랑한 귓바퀴를 세게 문질렀다. 못내 집착적인 손길을 숨길 수 없었다.

“……아.”

어떤 이유에서든 제가 아닌 다른 새끼를 바라보는 한아연의 시선은 견디기 어려웠다.

속이 뒤틀리는 만큼 손가락이 멋대로 움직였다. 배려 없이 거칠게 문지르는 것에 자극이 되었는지 아연이 들릴 듯 말 듯 작은 신음 소리를 내었다. 그제야 성현의 기다란 눈매가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그냥 너 보려고 왔어.”

성현은 시간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른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한아연과 피부 어디라도 맞닿아 있지 않은 순간의 그것은 영겁의 세월처럼 지루하게 느껴진다. 그러다가 그녀의 아찔한 향기가 후각을 건드는 시점부터 그의 시간은 불현듯 멈추기도, 정신없이 빠르게 흘러가기도 하며 완전히 규칙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소꿉장난을 하듯 아침 식사를 아연의 작은 입 안에 넣어 주는 순간까지도 서로 빈틈없이 연결되어 있던 때에서 고작 몇 시간 흘렀을 뿐인데, 그녀를 잠시 잃기라도 했던 것처럼 심장이 애틋하게 날뛰었다. 제가 생각해도 미친놈스럽기 짝이 없었다.

웬 날파리 같은 놈이 나타나 아연의 주변을 더럽히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두 눈이 시뻘게져서 달려왔으나, 그 핑계로 그저 아연을 또 한 번 볼 수 있다는 것에 음험한 미소를 흘린 것도 사실이다. 졸지에 전략 회의에서 본부장 대타를 뛰고 있을 김 실장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연아.”

성현이 아연을 지그시 응시하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커다란 손이 살굿빛 뺨에 감겨들었다. 엄지가 부드러운 입술을 짓뭉개듯 쓸었다. 여린 살이 눌려 벌어지며 축축하게 젖은 붉은 점막이 빠끔히 드러났다.

어느덧 아연의 시선은 못 박힌 것처럼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성현이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제 이름은 꿀처럼 달콤하고 독처럼 위험했다. 주변에 누가 있든 나사 하나가 빠진 사람처럼 정신을 놔 버리고, 홀린 듯이 그만 바라보게 된다.

마치 지금처럼.

“한아연.”

성현은 참을성이 바닥난 사람처럼 불쑥 고개를 내렸다. 유리처럼 반짝거리는 눈동자 안에 자신을 담고 올려다보는 아연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기다렸다는 듯이 바지 속의 좆이 대가리를 쳐드는 게 느껴졌지만, 성현은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겨울이라 좋은 점 중의 하나였다. 코트를 걸치고 있으니 어디서 발기해도 거칠 게 없었다.

“어쩌지.”

아연의 귓가에 입술이 들러붙었다. 솜털이 바짝 선 얇은 귓바퀴에 입술을 가져다 댄 채 그가 아연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나, 섰는데.”

혀를 세워 작은 귓구멍을 핥듯이 쑤시는 것도 잊지 않자, 아연이 파르르 어깨를 움츠렸다. 새초롬하게 노려보는 눈길에 배꼽 아래가 더욱 뻐근해졌다.

누가 뭐래도 겨울의 가장 큰 장점은 추위를 핑계 삼아 아연에게 더 자주 들러붙을 수 있다는 점이다. 성현은 코트마저 밀어낼 정도로 바짝 발기한 하체를 은밀하게 가져다 붙였다. 납작한 아랫배가 천을 사이에 두고 뭉툭한 것에 닿아 짓눌리며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저기 들어가서 빼고 갈까 하는데.”

성현이 상체를 슬쩍 떼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탈의실을 흘끗 쳐다본 아연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도와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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