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1화 (68/96)

<에필로그 1화>

「불법 정치 자금을 수수하고, 이를 폭로하려는 차명 계좌 소유자를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 시킨 혐의가 드러난 한강준 의원이 1심에서 의원직 상실형에 해당하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는 소식입니다.」

인천 공항 출국장에 놓인 대형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보던 여행객이 혀를 쯧 찼다.

“저, 저 나쁜 새끼. 결국 빵에 들어가는구만. 속이 다 시원하네. 하지 말라는 짓은 다 저질러 놓고 으레 돈 있는 놈들이 그렇듯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까 봐 불안했는데.”

그의 말에 옆자리에 앉아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동행이 고개를 들어 화면을 흘긋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에이, 사건이 좀 컸어? 아무리 지역구에서 날고 긴다는 삼선 의원이지만 차명 계좌로 600억을 해먹었다잖아. 거기다가 쌩판 멀쩡한 사람을 자기 비리 덮는답시고 정신병원에 강제로 밀어 넣기까지 했으니까 괘씸죄지, 괘씸죄.”

“저 인간 때문에 정신병원 들어갔다 나왔다는 사람도 정계에서 한가락 하는 인물이라, 그 가족이 회까닥 눈이 뒤집혀서 이 악물고 이번에 한강준이를 구속시킨 거라고 하던데.”

“그래? 내가 들은 소문엔 엄청 큰 연예 기획사 사장이라던데. 정재계에 인맥이 장난 아니라서 함부로 못 하는 사람인데 한강준이 잘못 건드린 거라고.”

“그러고 보면 밝혀질 법도 한데, 그 사람은 누군지 끝까지 안 나오는 모양이야. 어쨌든 차명 계좌까지 대 줬을 정도면 한강준 의원이랑 보통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는 얘긴데. 불법인 것도 다 알고 했을 거 아냐. 그 사람은 안 잡혀가나?”

“그냥 계좌만 대 준 거면 고작해야 벌금형이지. 그리고 불법 인지하고 먼저 고발하려고 한 거면, 그 뭐냐, 그래. 정상 참작! 정상 참작 해 줄걸?”

열띤 대화를 나누는 여행객들 옆으로 또각또각 경쾌한 구두 소리가 지나갔다. 챙이 넓은 모자와 선글라스, 단정하게 떨어지는 트위드 투피스를 입은 희수가 나긋하게 팔을 뻗으며 말했다.

“마중 안 해 줘도 된다니까 회사 일로 바쁜 사람이 뭘 굳이 여기까지. 나 이제 들어가 볼 테니까 가방 이리 줘, 권 서방.”

아연은 눈살을 슬며시 찌푸렸다. 권 서방은 무슨 권 서방이야, 또…….

“왜 자꾸 권 서방이래. 주책 좀 그만 부려요. 누가 보면 오해하잖아.”

아연이 짜증스럽게 타박했다. 그러자 희수가 선글라스를 들어 올리며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얘 좀 봐. 이게 왜 주책이야? 저렇게 덩치 커다랗게 다 큰 남자한테 성현아, 성현아, 이름 부르는 게 더 이상해 보이는 노릇이지. 안 그래, 권 서방?”

“맞아요. 전 그쪽이 더 듣기 좋습니다.”

성현이 얄밉게도 희수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입꼬리를 씨익 늘였다. 예비 사위의 매혹적인 얼굴에 희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한껏 머금었다.

정말이지 죽어도 여한이 없을 나날이었다.

지금으로부터 6개월 전, 추운 정신병원 안에 갇혀 오들오들 떨며 제 남편이라고 믿었던 남자의 손에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구나, 회한에 잠겼던 순간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저 아득하기만 한 기억이었다.

희수는 놀라운 속도로 건강을 회복했다. 장차 태강그룹의 며느리가 될 아연에게 흠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원대한 목표가 그녀를 움직인 까닭이었다.

희수는 슬쩍 눈을 굴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출국장을 오가는 여행객의 열이면 열, 성현을 홀린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지나갔다. 그중에 반은 제 예비 사위의 완벽하게 잘생긴 얼굴과 훌륭한 몸매에 반한 것일 테고, 나머지 반은 태강그룹의 황태자를 직접 봤다는 사실에 놀라서 입을 쩍 벌렸을 터였다.

눈을 커다랗게 뜬 여자와 시선이 마주친 희수는 얼른 선글라스를 내려 얼굴을 가렸다.

저 사람이 내 사윗감이라고 동네방네 목이 터져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야 하늘 같았지만, 희수는 그림같이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눈에 새겨 담는 것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강준의 비리를 폭로하는 과정에서 성현이 힘써 준 덕분에 희수의 신변은 철저히 보호되고 있었으나, 자신의 존재가 아연의 앞날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흠이 될 것을 염려한 희수는 한국을 떠나 살기를 원했다.

마침 하와이에 터를 잡고 사는 희수의 언니도 그녀가 이민의 뜻을 밝히자 선뜻 반기며 환영했다.

그런 희수의 속뜻을 눈치챈 아연은 처음에는 그녀의 이민을 반대했지만, 희수가 워낙 강경해 결국 막을 수는 없었다.

희수는 애정 어린 눈으로 아연과 성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희수 앞이라고 내외하고는 있으나, 서로를 향한 농도 짙은 시선은 숨기려야 숨겨지지 않는 것이었다.

서로 좋아 죽는 게 뻔히 보이건만, 젊은 혈기에 확 사고부터 쳐 버리면 좀 좋아?

희수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욕망 어린 눈길로 두 사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희수의 속마음이 훤히 보인다는 듯 아연이 낯 뜨거워 죽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권 서방도 이쪽이 더 듣기 좋다잖아. 본인이 좋다는데 아연이 넌 왜 매번 불만이니? 그리고 오해는 무슨 오해. 설마 우리 권 서방이 당장 내일이라도 너랑 결혼할 것처럼 이 장모 마음만 흔들어 놓고 모른 척할 리도 없는데. 사위나 예비 사위나 다 마찬가지지. 내 말이 틀려, 권 서방?”

“틀릴 리가요. 저 그렇게 무책임한 놈 아닌 거 아시잖아요.”

“그럼. 그건 내가 아주 잘 알지.”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의 대화에 아연은 깊은 소외감과 피로감을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이럴 땐 그냥 외면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런 아연은 내버려 두고 한동안 자기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살가운 대화를 나누더니, 손목시계를 흘끗 확인한 희수가 말했다.

“어머, 이제 정말 들어가 봐야겠다. 자, 가방 줘.”

성현이 이제껏 들고 있던 희수의 캐리어 가방을 내밀었다. 그녀의 취향을 반영한 여리여리한 핑크색의 캐리어는 성현의 손에 들리자 아이들 장난감처럼 보였다.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도 않는 가방을 허공에 달랑달랑 든 모습이 어찌나 기가 막히던지.

정작 그 자신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지만.

그러고 보면 성현은 수치를 모르는 인간 같았다. 낯 뜨거운 말과 행동을 얼마나 자유자재로 구사하는지, 늘 부끄러움은 아연의 몫일 뿐이었다.

“어머니. 도착하실 시간 맞춰서 공항에 차 나와 있을 겁니다. 잘 도착하셨는지, 연락드리겠습니다.”

듬직한 예비 사위의 모습에 또 한 번 황홀한 미소를 지은 희수가 말했다.

“안부 연락은 됐고, 난 우리 딸 결혼 소식만 목 놓아 기다릴게.”

“그것도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성현이 능숙하게 받아치며 눈매를 휘어뜨렸다.

‘너 튕기기만 해!’

희수가 손을 동그랗게 말아 입이 성현에게 보이지 않게 가린 다음 아연에게 입 모양으로 다그쳤다.

이미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었다. 성현이 프러포즈를 하면 주저하지 말고 덥석 물라느니 어쩌라느니.

속물근성이야 예전부터 한결같았지만, 어쩌다 저렇게 주책이 되어 버렸는지 모르겠다. 아연은 애잔한 눈으로 희수를 보며 얼른 들어가 보란 손짓을 했다.

그런 아연은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희수는 기특해 죽겠다는 얼굴로 성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음 같아서는 엉덩이라도 두들기고 싶은데 겨우 참은 듯했다.

희수는 우아하게 손을 흔들어 마지막 인사를 남긴 뒤 캐리어를 끌고 사뿐사뿐 출국장 벽 너머로 사라졌다. 비로소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성현이 아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도 갈까?”

성현을 올려다보는 아연의 눈에 설핏 물기가 어려 있다. 아연은 그래, 작은 대답과 함께 그의 커다란 손을 맞잡았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성현이 깍지 낀 손을 당겨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핏줄이 비칠 정도로 흰 피부 위에 입술을 문지르고, 손목을 뒤집어 두근두근 맥박이 뛰는 곳에 느긋하게 입을 맞추었다. 금방이라도 또르르 눈물이 떨어질 것 같던 연한 눈매가 그제야 부드럽게 휘어지며 웃었다.

성현은 아프게 미소 짓는 아연의 목을 감싸 제게 당겼다. 그녀의 머리카락 위에 또 한 번 입을 맞춘 후에야 그는 아연의 손을 꼭 쥔 채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딸랑.

“죄송하지만, 저희 조금 전에 마감되었…….”

카페 입구에 달린 유리 종에서 울린 소리에 뒤를 돌아본 아연이 말을 멈추었다. 카페 입구를 가로막듯이 선 커다란 인영은 다름 아닌 성현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성현이 싱긋 웃는다. 아연은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내일 온다고 했잖아.”

미국 공장의 대규모 정전 사태로 인해 생산 차질이 벌어져 그를 수습하기 위해 성현은 일주일 전 출장길에 올랐다. 오전에 잠깐 그와 통화했을 때만 해도 귀국 일정이 당겨졌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짓궂을 정도로 갑작스러운 등장이었다.

깜짝 놀라서 카운터 안쪽에 선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뜬 아연에게 다가온 성현이 몸을 불쑥 기울였다.

“이 놀란 얼굴이 보고 싶어서.”

순식간에 다가온 입술이 살짝 붙었다 떨어졌다.

“나 없는 동안 주변에 날파리가 꼬이지는 않았는지 감시도 할 겸.”

성현의 실없는 농담에 아연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바람이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는 이내 성현에게 잡아먹혔다. 아연의 턱을 가볍게 당긴 다정한 손길과는 달리 키스는 성급하고 짙은 욕망을 담고 있었다.

숨이 차올라 아연이 그의 가슴팍을 서둘러 짚으며 밀어냈다. 아쉽다는 듯이 뿌리까지 감아올리고 혀를 진득하게 비벼 대고 나서야 성현은 아연을 놓아주었다.

“대충 끝날 시간인 것 같아서 왔는데, 아직 할 거 남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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