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96)

<66화>

네가 왜…….

그가 어떻게 알고 이곳까지 온 건지, 생각은 머릿속을 떠돌았지만 아연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알 수 없는 안도감이 가슴 언저리를 묵직하게 적셨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 혼자 남은 것만 같았는데, 어둠 속에서도 그의 모습만큼은 너무나도 잘 보였다.

잘생긴 얼굴이 희게 질린 채, 남자답게 뻗은 모양 좋은 눈썹이 거칠게 꿈틀거렸다. 성큼성큼 너른 보폭으로 다가온 성현이 눈 깜짝할 사이에 가까워졌다.

“뭐 하는 짓이야! 이 비를 다 맞고! 제정신이야?”

물에 젖은 생쥐 꼴의 아연을 가까이에서 확인한 성현이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어깨를 비틀어 슈트 재킷을 벗어 냈다.

그가 다급하게 재킷을 아연의 어깨 위에 둘러 감싸 주었다. 그제야 아연은 비에 홀딱 젖은 제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연은 멍한 눈으로 더듬더듬 말했다.

“성현아. 엄마가, 없어졌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

성현이 아연을 확 끌어안았다. 으스러지도록 휘감은 팔이 그녀의 등을 꾸욱 눌렀다. 똑같이 비에 홀딱 젖었는데, 성현의 몸은 눈물 나도록 뜨거웠다.

그의 몸 아래에선 쏟아지는 비도 소용없었다. 비도, 소름 끼치는 추위도, 모든 불안과 공포도 그의 품 안에선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아연은 자신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처럼 엉엉 울며 작은 어깨가 가련하게 들썩거렸다.

성현은 그녀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아연의 정수리에 정신없이 입을 맞추며 그가 말했다.

“어머니, 남해에 계셔. 데려다줄게.”

* * *

검은색 세단이 길 위를 부드럽게 달렸다. 큰 도로를 빠져나온 차가 방지턱을 넘자 눈을 감고 있던 아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아연은 천천히 눈을 떴다. 자신의 손을 꽉 감싸 쥐고 있는 커다란 손이 보였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잠들었는지, 단단한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살며시 고개를 들자 아연이 깨어났다는 것을 귀신같이 눈치챈 성현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팔에 더욱 힘을 주어 가까이 당기며 말했다.

“거의 다 왔어.”

창 바깥은 아직 어둠에 잠겨 있었다. 밤새 차를 타고 남해로 달려온 길이었다.

당장 희수가 있는 곳으로 가겠다고 우기는 아연에게 성현은 젖은 옷만이라도 갈아입으라고 애원하듯 말했다. 저 역시 홀딱 젖었던 주제에, 아연이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난 후에야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어서 온도를 확인하는 기척이 잠결에도 몇 번이나 느껴졌었다. 내려오는 동안, 희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전해 들었다.

믿을 수 없게도, 강준이 희수를 육지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한 섬의 정신병원에 집어넣었다고 했다. 그날 아연이 강준에게 절연을 선언한 후, 희수가 지난 30년간 이어졌던 사실혼 관계를 청산하고 재산 분할을 요구했다는 이유에서.

아연은 기가 막혀 몸을 떨었다. 만약 성현이 그 외딴섬의 정신병원에서 희수를 빼내 보호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희수는 언제까지 그곳에 갇혀 있었을지. 아버지란 작자는 대체 자신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작정이었던 건지. 아니, 알릴 생각을 하기는 했을지.

파르르 몸을 떠는 아연을 끌어안으며 성현은 오히려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미리 말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우악스러운 손길에 붙잡혀 강제로 끌려가는 동안 거세게 반항한 탓에 희수의 얼굴이며 몸이 많이 상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병원에 갇혔던 충격으로 의식이 온전치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희수는 정신을 차릴 때마다 아연에게는 절대 연락하지 말라고 흐느끼다가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을 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었다.

“도착했습니다.”

차는 남해의 해안가에 위치한 호텔에 멈춰 섰다. 몸이 약해진 희수를 서울까지 데려가기엔 위험 부담이 따르기 때문에 치료와 모든 생활이 가능하고 보안이 철저한 풀빌라에서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현은 어제까지도 이곳에서 희수를 보살피다가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아연의 소식을 접하고 그녀를 찾아왔다고 했다. 그는 익숙한 걸음으로 아연을 데리고 안쪽으로 향했다.

넓디넓은 거실을 지나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열자 침대 위에 잠들어 있는 희수가 보였다. 이불 바깥으로 드러난 가느다란 팔에 링거가 연결되어 있었다.

심신 안정을 위해 신경안정제를 투여하고 있어서 그런지, 아연이 침대맡에 다가갈 때까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희수가 꼭 죽은 것만 같아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입술과 눈가에 자잘한 생채기로 얼룩진 희수의 얼굴을 보고 아연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제 딸에게도 평생 우아하게 꾸민 모습만 보여 주었던 희수이기에 난생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아연은 희수를 바라보며, 평생을 남편이라고 믿고 산 남자에게 먼저 헤어짐을 고했을 그녀의 마음을 가늠해 보았다.

그날 아연의 절연 선언이 희수의 마음을 움직였을 터였다. 겁 많은 희수가 강준에게 용케 이별을 이야기하고, 끝내 배신당해 낯선 이들에게 끌려갈 때 얼마나 무서웠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눈물이 마르지도 않고 두 뺨으로 흘러내렸다.

희수의 손끝에 연결된 산소포화도가 깜빡거리는 화면을 보면서 아연은 애써 마음을 내리눌렀다. 희수의 손을 이불 안으로 넣어 주고 이불을 목 끝까지 꼼꼼히 덮어 준 다음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거실과 연결된 발코니로 나가니 눈앞에 까마득한 남해 바다가 펼쳐졌다. 저 멀리서 새빨간 먼동이 터 오고 있었다. 며칠째 지겹도록 내리던 비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맑게 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꽉 막혀 있던 가슴에 한 줄기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기분에 아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 순간 어깨에 툭 하고 커다란 손이 닿았다.

돌아보니 성현이 그녀의 어깨에 두툼한 카디건을 덮어 주며 눈매를 가늘게 좁히고 있었다. 해가 다 뜨지 않아 쌀쌀한 바깥공기가 거슬린다는 얼굴이었다. 카디건의 앞섶을 꼼꼼하게 여며 주는 데 열중하고 있는 성현의 잘생긴 얼굴을 아연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엄마를 잃은 줄 알고 정신없이 몰아쳤던 지난 몇 시간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동시에 뜨거운 감정이 점점 차올랐다. 아연은 북받쳐 오르는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물었다.

“우리 엄마, 그렇게 된 건 어떻게 알았어?”

아연의 물음에 더 여밀 것도 없는 카디건의 앞섶을 괜스레 만지작거리던 성현이 손끝을 움찔했다.

“나도 모르고, 경찰도 모르던 걸, 넌 어떻게 알고…….”

“너한테 미련 못 버려서 질척거리다가. 너랑 네 부모님한테 다 사람 붙였거든. 감시하려고.”

태연자약한 대꾸치고는 범법 행위 아닌가 싶었다. 게다가 자신은 매일같이 카페와 집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인데 뭐 감시할 게 있다고……. 아연은 기가 막혀 이마를 짚었다.

“나는 그렇다 치고, 우리 부모님한테는 대체 왜.”

“너한테 나 말고 다른 놈팡이 같은 놈 갖다 붙이면 방해해서 떼어 놓을 생각으로.”

뻔뻔하리만큼 당당한 말투와는 달리, 그의 기다란 눈매에 아연만 알아볼 수 있는 주눅 든 기색이 어렸다. 마치 잘못을 저질러 놓고 주인의 벌을 기다리는 덩치만 커다란 개 같은 모습에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아연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은 채로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널 따라갈 수가 없어…….”

“따라오라는 말 안 해. 너한테 미쳐서 빌빌거리는 놈 쫓아올 필요 없어. 없는데…….”

시선을 내린 채 낮게 읊조리던 성현이 돌연 눈을 들었다. 흑요석같이 아름다운 눈동자에 푸른 불꽃이 탁 하고 이는 것처럼 보였다.

“너 말고는 이제 뵈는 게 없는 놈인데, 너 아니면 누가 날 거둬. 사람 하나 이렇게 눈에 뵈는 것도 없게 만들어 놨으면 책임을 져야지, 아연아.”

협박하듯 말하면서도 그는 타는 듯이 애원하는 눈을 하고 있었다.

“고집 그만 부리고. 응?”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성현이 아연을 가득 껴안았다. 그러고는 아양 부리는 짐승처럼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아연은 작은 한숨을 터뜨렸다.

뭐 이런 사랑스러운 협박범이 다 있어…….

“고집은 누가 부리는데.”

눈매를 찡그린 아연이 성현의 가슴팍을 밀어냈으나 그대로 손이 붙잡혔다. 두 손을 커다란 손아귀에 한데 가두고는 다른 손으로 아연의 턱을 들어 올린 성현이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나만 좋자고 이래? 너도 나 좋아하잖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좋긴 누가 좋다고 그래.”

“너도 나 좋아서 쩔쩔매는 거 다 보여. 넌 나한테 거짓말 못해.”

확신에 찬 시선이 아연을 꽁꽁 묶어 버릴 것처럼 직선으로 쏟아져 내렸다. 졸지에 옷 한 자락 남기지 않고 발가벗겨진 것처럼 모든 게 까발려진 기분이었다.

아연은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어떠한 말도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입 안에서 흐트러졌다. 성현은 그런 그녀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숨기고 싶었다.

그저 외면하고 싶었다.

이미 그에게로 가 버린 마음을.

눈을 가리고 살아가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으리라 여겼다. 가슴에 뻥 뚫린 구멍에 숭숭 들어차는 슬픔과 고통도 시간이 지나면 흐려질 거라 믿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고 또 속이면서도, 그리움이라는 미련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내가 정말 너 없이 살 수 있을까.

돌이켜 본 내 모든 순간에 네가 있었는데.

아연은 숨을 멈추고 눈을 들어 성현을 마주 보았다. 그의 얼굴에 물든 불긋한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따사로웠다.

그 찬연한 빛이 버거워 눈을 찌푸리는 순간, 아랫입술이 빨렸다.

입술을 가볍게 맞댄 채로 성현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나직한 음성에 귓가의 솜털이 와르르 곤두섰다. 이내 강한 압력으로 밀려든 그가 아연의 입술을 벌리고 뭉개뜨렸다.

거친 파도처럼 그가 아연을 휘저었다. 도망가는 혀를 붙잡아 감아올리고 비비는 감각에 여지없이 아랫배가 찌르르 울렸다. 으응, 신음 같은 한숨을 내쉬자 커다란 손이 등허리를 강하게 어루만졌다.

벼랑 끝에 발끝으로 선 것 같은 키스였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이 버거워 아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너도 내가 좋아 죽겠으면서, 왜 자꾸 도망가. 응?”

성현은 아연이 고개를 트는 대로 따라와 입술을 붙이며 쪼는 듯한 입맞춤을 쪽쪽거렸다. 그의 간지러운 행동에 배 속에서 방울들이 톡톡 터지는 것 같았다.

“나 너 절대 안 놓아줘. 도망가면 지구 끝까지 쫓아갈 거야. 너 내 거라고, 온 세상이 다 알도록 집요하게 들러붙어서 내 걸 온통 발라 둘 거야. 그러니까 네가 포기해.”

“뭐라는 거야, 이 변태가…….”

“그래. 그 변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지고 놀면서 흥분하게 만드는 건 한아연, 바로 너고.”

아연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품에 갇힌 채 아연은 무언가에 놀란 듯 몸을 움찔거렸다.

“이 분위기에…… 꼭 이렇게 세워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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