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성현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아연은 그런 그를 외면하며 말을 이었다.
“네가 그랬잖아. 선택권은 나한테 있다고. 얼마든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아연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속살거리던 성현을 떠올렸다. 이상하리만치 그날의 성현이 가슴에 오래 남았다.
몇 번이고 곱씹고 되뇌었던 말. 아마도 이런 순간이 오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해서였을까.
“솔직히 말하면 너랑 하는 거, 괜찮았어. 그래서 좀 몰입했던 것 같기도 해. 근데 네 말대로 나 착해 빠져서, 결혼하라는 우리 엄마 말 거역하기 귀찮아. 반항하는 것도 피곤하고.”
“그러니까 왜. 내가 있는데, 네가 왜 딴 놈이랑 결혼을 해.”
성현의 말에 아연이 믿을 수 없다는 눈을 들었다. 끝내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었다는 듯이.
짙은 늪처럼 일렁이는 눈과 마주치는 순간, 성현은 아연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연의 몸이 훌쩍 딸려 갔다. 품 안에 가두듯 아연을 껴안은 그가 음산하게 뇌까렸다.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해, 맞선. 나가서 다른 놈들은 어떤가 이것저것 재 보고 따지고 마음껏 저울질해. 어차피 나보다 괜찮은 놈 없을 테니까.”
“무슨……, 이거 놔!”
아연은 팔을 휘저으며 성현을 떼어 내려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아무리 할퀴고 꼬집어도 그녀를 줄기처럼 휘감은 커다란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단단한 등을 퍽퍽 둔탁한 소리가 날 정도로 때려 대는데도 오히려 더욱 으스러지게 안아 올 뿐이었다.
“아니, 씨발……. 내가 방금 한 말 다 개소리야. 네가 선을 왜 봐.”
상상만으로도 내장이 꼬인다는 듯 성현이 빠드득 이를 갈았다.
“다른 놈 만나지 마. 맞선이든 결혼이든, 나랑 해.”
물어뜯을 것처럼 아연의 어깨에 얼굴을 깊숙이 묻은 그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키를 맞추느라 잔뜩 구부러진 성현의 등을 때리던 아연의 손이 점차 멎어 갔다.
커다란 바위같이 단단하고 듬직한 등이 연약한 짐승처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등에서 얼마쯤 떨어진 허공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연의 손 또한 잘게 흔들렸다.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우리가 어떻게 결혼을 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
굵직한 글씨로 쓰인 기사의 헤드라인이 눈앞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글씨가 커졌다가 작아졌다 하며 어지러이 뒤섞였다.
진땀으로 젖은 손바닥 안에서 구겨지던 종이의 감촉, 제게 쏘아지던 태준의 고깝고 언짢다는 눈빛.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한 채 초라하게 앉아 있었던 순간. 아연은 눈꺼풀을 질끈 내리감았다.
그 탓에 아연은 보지 못했다. 상처로 얼룩진 성현의 눈을.
“너 사람 미치게 하는 거 알아?”
“…….”
“우리 어제까지 벗고 신나게 뒹굴었잖아. 내가 너 빨고, 너도 나 빨고. 근데 하루아침에 나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산뜻하게 밀어내 버리고 다른 새끼랑 결혼하러 가겠다고?”
바짝 끌어안고 아연의 등을 어루만지던 손에 돌연 힘이 들어갔다.
“어떡하지. 난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
짙은 소유욕이 밴 커다란 손이 등줄기를 훑으며 한 치의 틈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듯 상체를 밀착시켰다. 올가미같이 빠듯하게 감겨든 품에 갇힌 채 몸을 버둥거렸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아연은 진이 빠져 헐떡거렸다.
“정신 차려. 나랑 몇 번 좀 잤다고, 네 그 같잖은 책임감으로 이러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 정말 질리니까.”
단호하게 읊조린 말은 마치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처럼 들렸다.
책임감에 불과할 뿐이라고. 옛날부터 권성현은 제게 이상한 책임감을 갖고 있었으니까.
자신에게 쏟아지는 음습한 관심이 싫어서 어깨를 움츠리고 어둠 속으로 숨어들려 할 때마다 그녀에게 그림자를 만들어 주던 커다란 손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힐끔거리는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사라지고, 주변을 맴도는 뒤숭숭한 소문들이 잦아든 것은 다 성현이 손써 놓은 짓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 든든한 등 뒤에 몸을 숨기면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어스름한 그림자가 너무도 안락해서, 언제까지고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책임감? 내가 고작 그런 걸로 이러는 것 같아? 미안한데 나 그렇게 착한 놈 아니야, 아연아.”
성현이 쓰게 웃는 얼굴을 들었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순해 빠진 놈으로 보이려고 그동안 갖은 애를 다 썼더니.
순진한 한아연은 제 머릿속이 얼마나 지저분한 생각으로 가득한지 꿈에도 모르고서, 그를 올려다보는 얼굴에는 까닭 모를 안쓰러움까지 서려 있었다.
그게 곧 내다 버릴 개새끼를 쳐다보는 개 주인의 미안한 표정 같아 초조함에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분노와 울분, 서운함으로 시뻘겋게 열을 토하는 짐승 같은 눈동자를 마주 보며 아연이 달래듯이 말했다.
“그럼 너 왜 이래. 아쉬운 거 없는 사람이잖아, 너. 나한테 이럴 이유 없잖아.”
아연의 말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성현이 눈썹을 왈칵 찌푸렸다.
“이유가 없어? 너 다 알잖아. 너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 있잖아. 근데 왜 모르는 척해, 내가 너 좋아하는 거.”
덜컥, 사고가 멎었다.
아연은 벌어진 입술을 다물지 못한 채 뻐끔거렸다. 귀라도 닫고 싶은 심정인데, 아픈 말이 귓가에 계속 쏟아졌다.
“내가 너 좋아해서, 갖고 싶어서 하루에도 열댓 번씩 얼빠진 등신처럼 빌빌거리는 거, 이 예쁜 눈으로 너는 다 봤잖아.”
성현이 붉어진 아연의 눈가를 쓸었다. 깨어질까 두려운 연약한 물건을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잃어버릴까 염려하는 것처럼.
당혹감에 물든 눈이 하릴없이 배회했다.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성현은 오히려 아연의 두 뺨을 감싸고 자신에게 고정시켰다.
“다른 새끼가 너 눈독 들이는 거 보면 죽여 버리고 싶어. 그냥 다 죽여 버릴까? 응? 아연아.”
아연은 눈을 감고 마른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바싹 마르다 못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너울지는 감정의 해일을 간신히 삼키고 아연이 차분히 눈을 떴다.
“……너 자존심도 없어? 너랑 자면서 다른 남자랑 선보고 온 여자가 뭐가 좋다고 이래.”
빈정거리는 말에도 성현은 동요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자존심 같은 건 모른다는 듯 빤히 내려다보는 눈길이 뜨거워서 목이 메었다.
“그딴 거 상관없어.”
남한테 고개 한 번 숙여 본 일 따위 없었을 그가 애처롭게 매달리는 눈을 하고 있었다. 훌쩍 큰 키로 비스듬히 내려다보고 있는데도 어쩐지 바닥에 꿇어앉아 올려다보는 것처럼 보였다.
직선으로 파고드는 시선에 도리어 구차하고 볼썽사나워지는 것은 그가 애원하듯 바라보고 있는 자신 쪽이었다. 오기로 점철된 마음이 헤집어진 넝마처럼 볼품없이 너덜거렸다.
아연은 발끝에 힘을 주고 섰다.
“나는 너 안 좋아해. 너도 나 좋아하는 거 아냐. 뭔가 단단히 착각한 모양인데, 나랑 한 섹스가 그렇게 좋았어? 우리가 그동안 한 게 섹스밖에 더 있어? 근데 어떻게 확신해.”
함께했던 시간이 머릿속에 눈보라 치듯 휘몰아쳤다. 보지도 않는 영화를 틀어 놓고 귓가에 키득거리던 웃음소리가, 함께 걸었던 바다가, 발가락을 간지럽히던 모래의 감각이.
마음 한구석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맥없이 휘청거리는 몸을 안간힘으로 버티면서 아연은 일부러 더 위악을 부렸다.
“설마 아쉬운 게 남아서 그래? 마지막으로 진하게 한 번 하고 끝낼래?”
“……씨발,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성현의 눈매가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태어나 처음으로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아연한 낯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성현은 짐짓 순진한 소년 같아 보였다.
“그렇게 말하면 누가 신나서 달려들 줄 알고…….”
“……확신하지 마.”
손으로 성현의 중심을 훑어 내리자 그가 아연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상처 입은 짐승처럼 앓는 소리를 냈다.
그의 성기가 단단하게 일어서는 게 느껴졌다. 아연을 옭아매듯 끌어안고 있던 성현이 어느새 그녀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힘을 실어 왔다.
어깨 위로 뜨거운 한숨이 흘렀다. 아연은 성현의 바지 위로 드러난 기둥의 윤곽을 쓸어 올리면서 다른 한 손으론 그의 등허리를 어루만졌다.
단단한 등줄기가 씨근덕거리듯 꿈틀거렸다. 가운데의 움푹 들어간 등골을 길게 문지르자 성현이 낮은 신음을 터뜨렸다.
아연은 엉망으로 부풀어 오른 바지의 앞섶을 응시하며 벨트 위에 손을 가져갔다. 탁, 성현이 아연의 손목을 낚아챘다.
“얘기 안 끝났어.”
“끝난 것 같은데. 네 꼴 좀 봐. 그래 가지고 무슨 이야기를 해.”
하, 씨발. 성현이 욕지기를 내뱉으며 고개를 떨궜다. 가라앉혀 보려 해도 제 마음대로 안 되는지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가 뜨거웠다.
아연은 자신의 손목을 붙든 손을 억지로 떼어 냈다. 그러자 그가 아연을 확 끌어안았다. 버림받을까 봐 두려움을 집어삼킨 짐승처럼 필사적인 힘으로.
눈 깜짝할 겨를도 없이 들어 올려진 몸이 아일랜드 식탁 위에 앉혀졌다. 식탁 위에 있던 쇼핑백과 용기들이 와르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것은 그와 동시였다.
인간 같지 않은 힘에 떠밀려 상체가 뒤로 불쑥 기울어졌다. 등허리를 감싸 안아 받쳐 주는 단단한 팔이 아니었다면 발랑 뒤로 넘어갔을 만큼 급작스러운 몸짓이었다. 아연은 성현의 목에 팔을 두르고 끌어안으며 쓰게 웃었다.
오늘 하루만 더.
아연은 이기적인 자신을 언제나 너그러이 받아 주었던 성현의 뒤통수를 당겨 입을 맞췄다.
그가 물어뜯을 듯이 키스하며 아연의 등 뒤로 손을 가져갔다. 고개가 꺾이고 혀가 빨렸다.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혀가 질척하게 뒤엉키는 소리에 섞여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