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사장님, 내일 뵐게요.”
“민재 씨도 조심히 들어가요.”
민재는 쭈뼛거리며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몸을 돌려 버스 정류장 쪽으로 멀어져 갔다. 아연은 민재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이윽고 성현 쪽으로 몸을 돌려세웠다.
성현은 삐딱하게 서서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은 채 아연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눈을 조용히 마주한 채 아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부터 담배를 피웠어?”
그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까마득하게 먼 기억 속에서야 어린 날의 치기 어린 일탈이었으니 예외로 하고, 성현에게선 늘 기분 좋은 냄새만 났기 때문에 그가 담배를 피우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어둑한 그림자에 섞여 담배를 태우던 성현의 모습이 얼마나 낯설고 생경했던지.
그 와중에 붉고 매끄러운 입술 사이로 어른어른 흩어지는 몽환적인 연기가, 기다란 손가락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담배를 끼운 모양새가 어쩐지 근사해 보인다는 정신 나간 생각 따윈 차치하고서도, 아연은 그가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는 모습에서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몹시 낯설게 보이는 순간의 위화감.
권성현이 내게 숨기고 있는 모습은 또 어떤 것이 있을까.
그를 속속들이 파헤치고 싶었다. 내가 모르는 구석을 단 하나도 남겨 놓지 못하도록.
유치하고 조잡한 감정이 머릿속을 어지러이 휘저었다.
“종종 피워. 기분 별로일 때.”
성현은 별거 아니란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연은 그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기분이 왜 별로인데?”
성현에게 한 걸음 정도 되는 거리를 두었던 두 사람 사이가 이제는 아연의 한 걸음만큼 좁아 들었다. 손을 뻗으면 와락 끌어당길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가로등의 주황색 조명이 성현의 높은 콧대를 비추며 그 너머로 흐린 음영을 만들어 냈다. 그늘진 쪽의 다갈색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이는 빛을 반사했다.
느슨하게 내리뜬 눈이 아연을 비스듬히 바라보았다. 성현은 아연의 어깨 아래에서 구불거리는 긴 머리카락의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며 툭 내뱉듯이 말했다.
“글쎄. 질투하나?”
아연은 반쯤 웃고 반쯤은 찌푸린 눈을 들었다.
권성현이 질투라니. 이렇게 우스운 농담이 또 있을까.
메마른 실소를 흘리는데, 성현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
“……설마, 민재 씨를?”
“그 새끼 말고 내가 질투해야 할 놈이 또 있어?”
어이가 없어서 묻는 말에 더 어이없는 질문이 되돌아왔다. 그가 민재를 질투한다는 가정도 기가 막힐 따름인데, 다른 놈이 또 있냐고 묻는 눈에는 차마 숨기지 못한 투기가 이글거렸다. 단정한 입매에 만들어 낸 가식적이고 다정한 미소가 무색해질 정도로 살벌한 눈빛이었다.
“있으면 지금 말해. 뒤통수 맞는 거 질색이니까.”
“있긴 뭐가……. 아니, 애초에 네가 민재 씨를 왜 질투해. 질투할 만한 게 있어야 무슨 변명이라도 해 볼 텐데 이건 너무 밑도 끝도 없어서…….”
“그 새낀 하루 종일 너랑 붙어 있잖아.”
민재를 부르는 호칭은 이제 아예 대놓고 저속한 단어로 굳어진 모양이었다. 그나마 ‘직원 놈’이라고 불러 주던 것도 이제껏 꽤 예의를 차렸다는 양, 은근슬쩍 ‘그 새끼’로 격하시키는 것에 아무런 주저함도 없었다.
“그건 당연히 나랑 같이 일하는 직원이니까…….”
“너랑 일도 하고, 밥도 먹고, 널 보호한다는 핑계로 같이 밤길도 걷고. 빈틈이 보이면 어떻게 손이라도 한번 잡아 볼까 호시탐탐 좆같은 기회나 엿봤겠지.”
중간에 불쑥 끼어든 상스러운 단어가 그의 단정하게 잘생긴 얼굴과 큰 괴리감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곱상한 입꼬리에 스며든 질 나쁜 미소와는 아무런 위화감 없이 잘 어울렸다.
도대체가 도련님의 탈을 쓴 양아치인지, 양아치의 탈을 쓴 도련님인지. 성현의 실체는 갈수록 묘연해지는 것만 같았다.
아연은 찌푸린 눈으로 성현을 쳐다보며 말했다.
“야한 짓은 너랑 다 하는데, 왜 그런 걸 질투해?”
이번에 헛웃음을 터뜨린 것은 성현 쪽이었다.
정말이지 내 머리 꼭대기에서 노는 한아연을 어찌해야 할지.
예상을 벗어난 발칙한 아연의 말에 뒤통수부터 척추를 따라 뻐근하게 열이 올랐다. 그를 올려다보는 순진해 보이기만 하는 얼굴에 등줄기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하. 허탈한 실소를 뱉어 낸 성현은 거짓말처럼 표정을 바꿨다.
“듣고 보니 그러네.”
“…….”
“그럼 우린 늘 그랬듯이, 야한 짓이나 하러 갈까?”
성현이 기다란 눈매를 장난스럽게 휘어뜨리며 손을 내밀었다. 아연은 잠자코 그 손을 잡았다. 그가 손을 당겨 가 손등에 짧게 입술을 부딪치고는 깍지를 끼워 왔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엉키는 체온이 종이에 스며드는 물처럼 전신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손끝부터 손바닥, 어깨와 가슴 언저리까지 금세 저릿거렸다.
아연은 성현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손바닥에 온 신경이 몰려 감각이 예민하게 날뛰었다. 심장을 움켜쥔 것처럼 그와 맞닿은 부분이 두근거리고, 손끝이 불규칙적으로 움찔거렸다.
두 사람은 빈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문이 닫히면 곧장 달려들 거라 예상했건만, 성현은 의외로 점잖게 서서 숫자가 올라가는 디스플레이만 바라볼 뿐이었다.
애가 타는 건 저뿐인지, 한껏 민감해진 귓가에 차분하기만 한 숨소리가 간질간질 와닿았다.
아연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이 버거워 작게 심호흡을 내쉬었다. 그러자 성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분한 기분에 손을 빼내려고 파르르 털어 냈지만, 줄기처럼 감긴 손은 떨어질 줄 몰랐다.
아연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히고 그를 흘겨보았다. 성현이 달래듯이 아연의 손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고는 몸을 불쑥 기울여 귓가에 입술을 대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좀 참아 봐.”
“……내가 뭘!”
“보는 눈이 있을지 모르는데, 참을 줄도 알아야지.”
성현이 눈으로 엘리베이터 천장 구석에 설치된 보안 카메라 쪽을 흘끗 가리키며 짓궂게 웃었다. 아연은 기가 막혀 입을 벙긋거렸다.
매번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참을성 없이 허겁지겁 입술부터 붙여 오던 게 대체 누군데!
애써 표정을 가다듬은 아연은 자꾸 나른하게 풀리는 몸에 힘을 주고 똑바로 섰다. 갇힌 공간에 나란히 선 성현에게서 기분 좋은 냄새가 유혹하듯 풍겨 나와 자꾸 후각을 자극했다. 여지없이 아랫배가 욱신거려 아연은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빠르게 바뀌던 숫자가 이윽고 가장 높은 층에 이르렀다. 띵, 엘리베이터의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없이 많은 날을 그의 집에 오르내리며 매번 들어온 소리인데, 특별할 것 없는 그 소리가 어쩐지 가슴을 쿵 하고 짓눌렀다.
* * *
샤워를 마치고 샤워 부스에서 나온 아연은 몸의 물기를 닦으며 잠시 벗어 놓은 옷가지들을 바라보았다.
하루 종일 입고 생활한 데다, 심지어 고기 냄새마저 풍기는 옷을 다시 주워 입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벌거벗고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수건으로 가리고 나가자니 너무 노골적인 모습이 아닌가 싶어 망설여지는 것이었다.
섹스를 앞두고 이런 것을 고민하기는 처음이었다. 이제까지는 어째선지 늘 성현에 의해 옷이 벗겨졌고, 어쩌다 운 좋게 혼자 샤워를 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가 중간에 들이닥쳐서 정신없이 몰아붙였다. 그 탓에 샤워 후엔 항상 옷을 다시 입을 겨를도 없이 곧바로 몸을 섞게 되는 식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서.
아연은 의아함과 약간의 불안감이 섞인 눈으로 욕실 문을 돌아보았다. 욕실 바깥은 고요하기만 했다. 웬일로 오늘은 침실에서 얌전히 그녀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회식 메뉴도 메뉴였던 만큼, ‘하기 전에 꼭 샤워부터 사수해야지’ 하고 경계 태세를 단단히 세웠던 것이 무색하게 성현은 집에 들어선 후에도 평소답지 않게 여유로웠다. 으레 아연의 혼을 빼놓을 기세로 달려들던 것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 풀며 “씻을래?” 하고 묻기에 당연하게도 같이 씻자는 뜻으로 알아들었는데, 그가 게스트 욕실 쪽으로 미련 없이 몸을 돌려 혼자 들어가 버렸을 때는 사뭇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아연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어색한 얼굴로 응시했다.
욕실 안의 더운 기운에 발갛게 상기된 뺨. 거울 속에서 마주친 두 눈동자에는 하나로 정의하기 어려운 복잡한 심경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으로부터 애써 시선을 떼어 낸 아연은 한쪽 벽에 붙은 커다란 서랍장을 열어 보았다. 호텔처럼 각 잡힌 수건과 샤워 제품이 가득한 사이에서 곱게 접힌 샤워 가운을 발견했다.
가운을 꺼내 입고 허리에 단단히 매듭을 지은 아연이 욕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욕실 바로 앞에 커다란 거울이 붙어 있는 드레스 룸 공간을 돌아 나오자,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성현이 보였다.
“평택 현장에서 공항으로 바로 가는 것으로 하죠. 네, 그런 건 문제가 안 됩니다.”
성현은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그가 통화하는 소리를 듣고 아연은 걸음을 멈춰 섰다. 전화 내용으로 보아 비서인 김 실장과 통화 중인 듯했다.
그는 물기가 남은 머리카락을 습관처럼 쓸어 넘기며 몇 가지 지시를 더했다. 문득 눈을 들어 멀찍이 서 있는 아연을 발견한 성현이 가까이 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아연은 통화를 마저 하라는 뜻에서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성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짓고 이내 통화를 계속했다. 잠시 후 전화를 끊은 그가 협탁에 핸드폰을 툭 내려놓으며 명령하듯 말했다.
“이리 와.”
그가 평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서일까. 알 수 없는 긴장감에 발끝이 머뭇거렸다. 한 걸음씩 내딛는 발걸음마다 타닥타닥, 정전기가 이는 것처럼 저릿거렸다.
그의 침실에 가득 채워진 기분 좋은 냄새는 성현에게 점점 가까워질수록 아찔하게 짙어졌다.
무심코 숨을 깊게 들이켜는 순간, 허리를 낚아채듯 감싸 오는 커다란 손에 아연의 몸이 불쑥 딸려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