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목이 멨다.
누군가에게 멱살이 틀어잡혀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기억이 휘몰아치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먹먹해진 귓가에 삐이, 하는 날카로운 이명이 파고들었다.
송곳으로 고막을 후비는 듯한 찢어지는 감각. 날카로운 파열음. 비명 소리. 물이 철벅거리는 소리가 어지러이 뒤섞인다.
‘엄마! 엄마! 눈 좀 떠 봐!’
목이 터지도록 외치는 절규는 모두 아연의 것이었다. 그녀의 손에 미역처럼 감긴 섬약한 팔이 자꾸 물속으로 처졌다. 온기 하나 남지 않은 몸은 흡사 시체 같았다.
창백해진 살갗을 절박하게 움켜쥔 자신의 손이 볼썽사납게 벌벌 떨리고 있었다. 자꾸만 손끝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는 느낌에 모골이 송연했다.
축 처진 몸을 붙잡고 또 붙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길 때마다 욕조 안을 가득 채운 물이 파도처럼 출렁거리며 욕실 벽을 때리고 넘쳐서 바닥을 엉망으로 적셨다.
붉은 물. 소름 끼치는 한기. 비릿한 피 냄새.
죽음의 냄새였다.
이가 딱딱 부딪쳤다. 요령 없이 마구잡이로 그어 놓은 손목 위 벌어진 상처를 마주하게 된 두 눈에 절망이 깃들었다.
고작 이 정도 그어서는 죽을 수도 없어, 엄마.
연민, 분노, 낙담, 한심함과 비난이 뒤섞인 한숨이 갈 곳 없이 입술 끝을 맴돌았다. 이를 악물고 축 늘어진 몸을 욕조 안에서 완전히 끌어낸 아연은 차갑게 식은 마른 어깨를 끌어안고 한없이 흐느꼈다.
요란한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지고, 그녀의 등 뒤로 쾅 하는 소음과 함께 다급한 인기척이 다가올 때까지.
아연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시선이 가냘픈 손목의 흉터 위를 하릴없이 맴돌았다. 비릿한 그날의 냄새가 정처 없이 주변의 공기를 떠돌았다.
희수 또한 아연의 눈길이 머무는 자리를 흘끗 내려다보고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내려 소맷자락을 가지런하게 정리했다.
“엄마 말 들을 거지?”
다시금 완벽해진 차림.
아연이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눈빛으로 희수는 그림같이 미소 지었다.
* * *
택시가 멈춰 서자 호텔 직원이 빠르게 다가와 문을 열어 주었다. 안쪽에서 늘씬한 다리가 빠져나왔다. 호텔 외경의 금빛 조명이 구두 위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직원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감사 인사를 표한 아연은 호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지나는 발걸음을 고스란히 내비칠 정도로 반들반들한 대리석 위를 또각또각 걷는 구두 안에서 발이 욱신거렸다. 근래에는 높은 구두를 잘 신지 않았던 데다가, 새 구두의 뒤축이 여린 발뒤꿈치를 마구 짓이기고 있었다.
화장실부터 찾아 들어간 아연은 거울 속의 제 모습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희수의 취향대로 꾸민 모습.
오늘 그녀가 입었던 트위드 투피스와 같은 브랜드의 니트 원피스는 아연의 몸 선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얇은 니트의 재질이 몸에 찰싹 달라붙은 탓에 가슴부터 잘록한 허리, 둥근 골반까지 두드러진 라인을 바라보며 아연은 쓰게 웃었다.
‘속셈이 너무 노골적이잖아.’
희수의 의도는 몹시 뻔했다.
사립 학교에서 S대로 이어진 인연으로 구성된 동창 모임에 속한 네 명 모두 그럴듯한 집안의 자제들이다. 희수가 들이민 맞선 상대와 비교해도 절대 뒤처지지 않는, 아니, 오히려 희수에게는 더욱 구미가 당길 만한 대상이었다.
세속적으로 표현하자면 훨씬 급이 높은 사윗감. 고작 내연녀에 불과한 희수가 긁어모을 수 있는 맞선 상대에는 넘을 수 없는 선이라는 게 있었을 테니까.
정말이지, 어떻게든 아연이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얼른 치워 버리고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느껴졌다.
‘뻔한 속셈에 놀아나 주는 나도 한심한 건 마찬가지지만.’
피식 헛웃음이 터진다. 자조 섞인 실소를 흘린 아연은 세면대의 수도를 틀었다.
졸지에 희수의 손에 붙들려 미용실까지 끌려가고 말았다. 아연은 구불구불하게 어깨 위에서 굽이치는 머리카락을 젖은 손으로 몇 번이고 펴 내렸다. 하지만 무려 두 사람이 달라붙어 정성껏 세팅하여 굵게 웨이브가 진 머리를 완전히 원상 복구 하기란 불가능했다.
거울 안에 화려하게 꾸민 여자의 모습은 어릿광대나 다름없어 보였다. 페이퍼타월에 손을 닦은 아연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화장실을 나섰다.
약속 장소는 호텔 23층에 위치한 정통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직원이 안쪽에 있는 단 하나의 룸으로 아연을 안내했다. 직원이 열어 준 문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도착해 있던 친구들이 왁자지껄하게 그녀를 맞이했다.
“어, 한아연 왔어? 오랜만이다.”
“늦을 것 같다더니 금방 왔네.”
“근데 오늘 왜 이렇게 예쁘게 하고 왔어? 우리 보러 온다고 일부러 꾸민 거야?”
문 가까이에 앉아 있던 준성이 날쌔게 자리에서 일어나 직원보다 먼저 아연에게 의자를 빼 주며 유들유들하게 능청을 떨었다. 아연이 평범하게 하고 왔더라도 빙글거리며 저리 말했을 준성이지만, 실제로 평소답지 않게 화려하게 꾸미고 온 상태로 듣는 말이라 그런지 몹시 민망했다.
“진한이 여자 친구 소개받는 자리니까 예의 차렸지. 넌 좀 꾸미고 오지 그랬어.”
“나 오늘 꽤 신경 쓰고 온 건데? 1년 만에 한아연 만나는 자리라. 머리에 힘준 거 안 보여? 근데 보자마자 상처 주네.”
준성이 가슴에 비수라도 꽂힌 것처럼 가슴팍을 손으로 문지르며 실없이 웃었다.
“진한이는? 아직 안 왔어?”
아연은 룸 안을 슬쩍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신경은 마주 보는 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는 한 사람에게 온전히 집중된 채였다. 성현은 아까부터 줄곧 고요한 눈길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실 들어오자마자 성현을 발견했다. 의자에 느슨하게 기대어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룸 안에서 혼자만 강렬한 핀 조명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러야 했다. 제 눈이 이상해진 게 아니라면 머리가 이상해진 거겠지.
1년 만에 만난 나머지 두 친구, 준성과 욱현은 졸지에 존재감 없는 엑스트라로 전락해 버렸다. 아연은 성현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극도로 주의를 기울이며, 아예 몸을 준성이 있는 방향으로 틀어 앉았다.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뺨이 화끈거리고 간질간질했다.
아연은 사뭇 절망스러워졌다. 권성현과 단둘이 한 공간에 있을 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다 같이 방에 있을 때도 이렇게 온몸이 긴장으로 경직되다니. 자신의 이런 한심한 반응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성현의 시선이 닿는 곳이 하나하나 느껴졌다. 뺨을 핥듯이 내려가 긴 머리카락을 구불구불하게 늘어뜨린 어깨 아래까지. 저도 모르게 손끝이 움찔거렸다.
어쩔 줄 몰라서 안절부절못하는 자신과는 달리, 아무렇지 않다는 듯 평소와 다름없는 여유 있는 태도를 고수한 그가 사뭇 얄밉기까지 했다.
“아니, 왔는데 잠깐 자기 여자 친구 화장실 간다고 같이 갔어. 고작 화장실 다녀오는 건데 길이라도 잃을까 봐 염려하는 건지. 유난도 정도껏 해야지. 진짜 눈 뜨고 못 봐주겠다니까.”
일전의 준성과의 전화 통화에서도 유사한 일화를 들은 바가 있었다. 준성이 그동안 제가 목격해 온 무수한 못 볼 꼴들을 수다스럽게 늘어놓기 시작하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진한이 한 여자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또렷한 이목구비와 청순한 분위기의 여자는 아연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한아연도 왔네. 오랜만이다. 인사해. 나랑 결혼할 여자.”
진한의 옆에 바짝 끌어안긴 간지러운 모양새로 방 안에 들어선 그의 예비 신부도 그들과 같은 대학을 다녔다.
아연과는 전공이 달라 이렇다 할 접점이 없었지만, 당시 진한이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슬쩍 들었기에 한두 번 눈여겨본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소문의 출처는 그들 사이에서 촉새라 불리는 준성이었고.
“안녕하세요. 한아연이라고 해요.”
“서나윤이예요. 반가워요.”
“우리 같은 대학 나왔는데 그땐 가까워질 기회가 없었네요. 아, 결혼 축하드려요.”
“네, 감사합니다.”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 통성명을 하는 중에 다시금 문이 열리며 직원이 들어왔다.
“그럼 이야기는 천천히 하는 걸로 하고, 식사부터 하자.”
모임의 총무 격인 준성이 직원에게 고갯짓하자 본격적인 코스 요리의 서빙이 시작되었다. 캐비어와 수란 블랙 트러플, 성게알 퓨레, 가리비 구이, 비프 타르타르가 차례로 나오고 마지막으로 스테이크까지 테이블 위에 놓였다.
눈앞의 음식들은 모두 먹음직스러운 자태와 훌륭한 향을 자랑했지만, 아연은 그다지 식사에 집중하지 못했다.
평소답지 않게 차려입은 옷차림이 불편한 것도 있었지만,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성현의 존재가 견디기 어려울 만큼 신경을 긁어 댔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카페에서 뻔뻔한 능구렁이처럼 달라붙어 오던 것과는 달리, 그는 어느 순간부터 그녀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대화에 어울리고 있었다.
“성현이 넌 얼마 전에 또 뉴스에 얼굴 비쳤더라. 능력 검증되기 전에 임원 자리 꿰찬 거 가지고 순혈주의식 인사라고 은근히 까이던데, 그거 혹시 너희 매형들 작품 아니야? 지금까지 계속 잘나갔지만 너 회사 들어가면서 위기의식 좀 느끼셨을 거 아냐.”
욱현이 피가 뻘겋게 흘러나오는 레어 스테이크를 커다랗게 잘라 입에 집어넣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성현과 테이블 위에서 잠시 시선이 마주쳤다. 아연은 순간적으로 접시 위를 뒤적거리던 포크를 멈칫했지만 그는 금세 시선을 돌렸다.
나른하게 뜬 눈꼬리를 길게 늘이며 미소 짓는 옆얼굴. 어쩐지 속이 훅 달아오른다.
권성현은 저토록 태연한데 어째서 저 혼자 쩔쩔매고 있는 건지, 이유 모를 억울함이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