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뎅.
청아한 종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은은한 아로마틱 우드와 허브 향이 코끝을 맴돈다. 심신을 안정시키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맑은 목소리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관리 시작하겠습니다.”
번쩍 정신이 들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아연은 흘끗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어둑하게 간접 조명만이 켜진 룸 안, 희수가 옆에 나란히 놓인 마사지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장충동 B 호텔 스파 트리트먼트 룸. 지금 아연이 누워 있는 곳이었다.
“압 괜찮으세요?”
아연이 무심결에 한숨을 푹 내쉬자 마사지사가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앗, 네.”
아연은 다급히 대답한 후 눈을 내리감았다. 뻣뻣하게 굳은 등줄기를 풀어 주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진다. 분명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아연은 평범하게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오후의 평화가 난데없이 깨어진 건, 가게 입구에 달린 유리 종에서 울린 ‘딸랑’ 소리가 나면서부터였다.
‘어서 오세요.’
규영이 상냥하게 인사했다. 또각또각 가까워지는 구두 소리가 어쩐지 불길하게 들렸다. 일종의 직감이었을까.
‘주문하시겠어요?’
‘아뇨, 커피는 됐어요.’
우아한 말투, 냉랭한 어조, 은은한 향수 냄새.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아연은 크게 숨을 몰아쉬며 몸을 돌렸다. 카운터 너머에서 희수가 고상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생각보다 매장이 협소하네. 이왕 해 줄 거면 좀 더 크게 차려 주지. 삼선 의원 딸내미가 하는 가게가 고작 이게 뭐라니? 구멍가게처럼 소박해서는 민망해서 어디 가서 얘기나 할 수 있겠어?’
자리에 앉자마자 희수는 고상한 말투로 고상하지 못하게 투덜거렸다. 인근의 카페 중에서도 아연의 카페는 꽤 큰 규모에 속했지만, 희수의 마음에 찰 리 없었다. 아연은 뭐든 깎아내리기 좋아하는 희수가 마음껏 험담을 이어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카페를 차리는 데에 강준의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반대하던 태도를 바꾸기는 했지만, 희수는 아연이 카페를 오픈한 뒤 이제껏 단 한 번도 카페에 걸음 하지 않았다. 귀하디귀한 제 딸이 물장사나 하고 있는 꼴은 보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못마땅한 눈길로 가게 여기저기를 살피던 희수는 커피 두 잔을 들고 다가오는 규영을 보고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맛있게 드세요.’
‘고마워요.’
규영이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사라질 때까지 기품 있는 태도를 유지하던 희수는 이내 눈썹을 높게 치켜올렸다.
‘아연이 너 인테리어 취향이 이것밖에 안 돼? 엄마가 그렇게 갤러리며 아트 센터며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애써 가르쳐 놨는데 결과물이 겨우 이 정도라니, 솔직히 너무 실망스럽다. 당장 이 소파부터 바꿔야겠어. 비루한 디자인은 그렇다 치고 쿠션이 이렇게 불편해서야 누가 여기 앉아 있고 싶겠니? 이참에 의원님한테 소파 좀 바꿔 달라고 해.’
‘……의원님이 골라 주신 거야.’
‘안목하고는. 하여간 내 손이 닿지 않으면 죄다 이 모양이지.’
희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쯧 찼다.
‘그건 그렇고, 나가 살고 나서 아주 마음껏 먹고 마시나 보다. 얼굴이 아주 달덩이가 다 됐어.’
뼈가 도드라진 섬약한 손이 빠르게 뻗어 와 아연의 허리를 꼬집고 멀어졌다.
‘얘가, 얘가. 관리 안 하지? 게다가 그 옷 꼴은 또 뭐고.’
희수는 아연이 일하기 편하게 돌돌 말아 올린 티셔츠의 소맷자락과 발목이 살짝 드러나는 슬랙스를 흘기듯 훑어 내렸다.
‘저번에 너 보고 나서 해양기업 사모가 뭐라는 줄 아니? 아연이 어디 장례식장 들렀다 온 거 아니냐고. 제 딴에는 농담이라고 그딴 소리 하면서 호호 웃는데, 정말이지 내가 낯을 들 수가 없어서 혼났어. 그러는 자기 아들은 소박맞기 딱 좋게 생긴 주제에 어디서 주제도 모르고 그런 소릴 지껄이는지.’
귀가 따가웠다. 아연은 턱을 괴고 앉아 머릿속으로는 신메뉴의 레시피를 떠올렸다.
‘똑같이 품위 없는 사람 되기 싫어서 내가 가만히 있었지만, 그 집 아들 대체 어느 불쌍한 아가씨가 집어 가는지 내가 지켜볼 거야.’
희수는 싸늘하게 콧방귀를 뀌며 흘끗 시계를 확인했다. 그러더니 옆에 내려놓았던 핸드백을 집어 들며 마른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무튼, 스파 예약 시간 얼마 안 남았다. 얼른 일어나.’
‘무슨 스파? 나도?’
한 치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잔소리 폭격을 한 귀로 흘리던 아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커피 잔은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마사지 예약해 뒀어. 거기 갔다가 너 옷도 좀 사고. 하여간 집에 우환 있는 사람처럼 입고 돌아다니는 꼴 도저히 못 봐주겠다.’
희수의 등장과 함께 얄팍해진 정신이 기억에 영향을 미쳤는지 그 후로 어떻게 카페를 나섰는지조차 희미했다. 그리고 어느새 이곳에 가운만 걸치고 그녀와 나란히 누워 있게 된 것이다.
마사지가 끝난 후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방 한편에 족욕을 하며 즐길 수 있는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연은 뜨끈한 물에 발을 담그고 자연스럽게 견과류와 말린 과일이 올려져 있는 요플레 쪽으로 손을 뻗었다.
찰싹, 따끔한 통증이 손등에 퍼졌다. 아연의 손등을 때린 희수는 요플레가 담겨 있는 작은 그릇을 옆으로 멀리 치우고는 찻잔을 아연 쪽으로 밀어 주었다.
“살쪄. 식사 대용도 아니고, 지금같이 어중간한 시간에 무슨 간식이야. 저녁에 레스토랑 예약해 놨어. 그냥 차 마셔. 너 얼굴 아주 엉망인 거 알아?”
마사지를 마치고 반질반질 윤이 나는 아연의 얼굴을 못마땅하게 훑어본 희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
“이런 걸 마셔야 부기도 빠지고 좀 사람다워 보이지. 네가 아직도 어린앤 줄 아니? 무슨 다 큰 처녀가 달콤한 것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고 달려들어, 달려들기를.”
희수가 내민 것은 아연이 싫어하는 생강 냄새가 지독하게 진동하는 생강차였다.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쉰 아연은 찻잔에 입만 살짝 가져다 대고는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당장 가서 옷도 몇 벌 사야겠다. 어떻게 그 꼴로 바깥을 돌아다닐 생각을 다 하니? 아까 호텔 로비 지나오면서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던지.”
희수는 우아하게 찻잔을 기울이며 아연의 옷차림에 대해 다시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카페에서 입었던 그대로 입고 나온 캐주얼한 차림은 트위드 투피스를 차려입은 희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였다.
“그렇게 같이 다니기 창피하면 혼자 오시지, 왜 갑자기 나까지 불러내서는. 요새 카페 바빠. 나 엄마랑 이러고 다닐 시간 없어요.”
“사람 한 명 더 써. 언제까지 격 떨어지게 직접 다 하려고 그러니? 카페 차려 놓고 소꿉장난하는 거 귀엽게 봐주는 것도 1년이면 충분해.”
아연은 눈을 질끈 감고 숨을 가다듬었다. 희수가 지난 1년 동안 잔소리를 참은 게 신기할 지경이긴 했지만, 역시 하이톤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 것은 심한 고역이었다.
“의원님도 너 이렇게 왈가닥처럼 살라고 가게 차려 주신 거 아니야. 이제 슬슬 신부 수업도 시작하려면 한시가 아까운데, 쓸데없는 곳에 체력을 낭비하고 있으니. 네 나이를 생각하면 이것도 벌써 한참 늦었어.”
드르륵.
그때, 희수의 잔소리 공격을 끊으며 마치 구원과도 같은 핸드폰 진동음이 울렸다.
지금 이 순간이라면 혹여 발신자가 권성현일지라도 지난 며칠간의 어색해진 관계 따윈 까맣게 잊어버리고 반갑게 전화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이 숨 막히는 마수에서 저를 구해 줄 사랑스러운 구원자.
아연은 얼른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 세 글자가 떠 있다.
[김준성]
가슴속에서 부풀던 풍선이 푸시시 쪼그라들듯 일순 맥이 빠졌다. 비록 기대했던 사람은 아니었지만, 아연은 전화가 끊어질세라 재빨리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어, 나 준성인데, 오늘 몇 시쯤 올 수 있는지 해서.
아연은 흘끗 희수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도 핸드폰 화면에 뜬 준성의 이름을 보았는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아, 시간 맞춰서 갈게.”
원래는 늦게나마 얼굴만 잠깐 비칠 생각이었지만, 아연은 순식간에 마음을 바꿨다. 이대로 희수의 손에 붙잡혀 저녁 식사까지 끌려갈 뻔한 끔찍한 상황이었는데 몹시 고마운 핑곗거리였다.
- 오, 웬일이야. 바쁜 척은 다 하더니. 카페로 데리러 갈까?
“괜찮아. 그냥 거기서 봐.”
- 권성현이랑 같이 와?
“아니. 나 지금 장충동이거든. 알아서 갈게.”
- 장충동 어디?
“엄마랑 스파.”
- 모녀 사이 보기 좋네. 그럼 이따가 보자. 조심히 와.
준성은 다시 한번 시간과 장소를 언질 주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어진 후에도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희수가 환하게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불길한 미소였다.
“오늘 모임 있었니?”
“응.”
“설마 그 꼴 그대로 가려고 했어?”
희수는 어느새 미소가 완전히 사라진 사나운 표정으로 아연을 위아래로 훑었다. 티셔츠와 슬랙스, 그리고 의자 옆에 걸쳐둔 헐렁한 트렌치코트.
“아니. 시간 여유 있으니까 집에 들렀다가 가려고.”
“잘됐다. 오늘 이왕 이렇게 나온 거 모임에 입을 옷도 사고, 미용실 들렀다 가면 되겠네.”
아연은 불쑥 치솟는 짜증을 가라앉히려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다양한 방법으로 제게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희수 앞에서 충동을 억누르고 숨을 고르는 것에는 퍽 익숙한 그녀였다.
“됐어. 친구들 만나는데 무슨 미용실이야.”
“엄마 말 들어. 너 거렁뱅이처럼 입고 다니는 것만 보면 이제 머리가 다 아파.”
희수가 정말 두통이 인다는 듯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그 바람에 소맷자락이 벌어지며 뼈가 도드라진 팔목 안쪽에 여러 겹으로 겹쳐진 상흔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