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아연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금방이라도 발아래가 쑥 꺼질 것 같은 야트막한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리고 있는 반듯한 옆얼굴을 따라 시선을 내렸다. 곧고 두꺼운 목 빗근, 흰 티셔츠가 들러붙은 탄탄한 가슴팍이 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가쁘게 오르내렸다. 그 움직임에 어쩐지 덩달아 아연의 숨도 더워지기 시작했다.
바르르 끓어오른 열기가 금세 턱 끝까지 차올랐다. 긴장으로 입술이 바르르 떨려 왔다. 더 내려간 시선의 끝에선 바지의 앞섶이 여전히 터질 것처럼 한껏 부풀어 있었다.
배 속에서 무언가 펑 폭발하는 것만 같았다.
“싫다고 안 할…… 읏.”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코앞까지 가까워진 성현은 성급한 손길로 아연의 뒷덜미를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연이 채 끝마치지 못한 말은 전부 그에게 집어삼켜졌다.
“흣.”
아아.
이런 감각이리라곤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다. 권성현과 키스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과 마찬가지로. 입술이 맞붙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전율이 일었다.
무심코 벌어진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입술과 동시에 허리를 휘감는 손길이 느껴졌다. 성현은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양 그녀의 등허리를 바짝 당겼다.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도무지 어찌할 바 모르는 것처럼 갈급한 몸짓이었다.
서로의 배를 빈틈없이 찰싹 맞붙여 놓고는 경직된 아연의 등을 어루만지는 손이 온순하기 짝이 없다. 그러면서도 불쑥 치솟는 욕정을 애써 억누르는 것처럼 커다란 손이 그녀의 등을 꾸욱 짓누를 때마다, 두 사람의 아랫배 사이에 끼워지듯 자리한 발기된 페니스가 뜨겁게 맥동했다.
뜨거워. 어지러워.
흐읏. 앓는 듯한 신음이 하릴없이 목 안을 울렸다. 송두리째 뒤흔들며 덤벼드는 듯한 키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너 내가 경고했지.”
아연의 아랫입술을 쪽 빨아 당긴 그가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문 채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아연은 저도 모르게 내리감겼던 눈을 반짝 떴다. 사냥감을 잇새에 끼워 놓고 삼키기 직전의 포식자의 그것처럼 형형하게 빛나는 눈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단단한 콧대가 일순 느긋하게 콧잔등을 위를 문지르자 그에게 물린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왜 가만히 있는 사람 들쑤셔. 아무것도 모르는 게.”
그는 성질 더러운 짐승이 신경질을 부리듯 아연의 입술을 아프지 않을 만큼의 힘을 실어 콱 깨물고는 금세 야릇한 움직임으로 쪽 빨아 삼켰다. 읏, 하는 짧은 신음은 곧바로 혀가 엉키는 소리로 변했다.
성현의 말처럼 가만히 있던 그를 들쑤신 건 맞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아연은 아랫배를 비벼 오는 크고 단단한 그것이 제게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까마득한 세계를 열어 주리란 것을 알았다. 입 안을 정신없이 헤집어 대는 뜨거운 혀만큼이나.
“내가 모르긴 뭘 모른다고 자꾸…….”
그녀는 복수라도 하는 것처럼 성현의 혀에 제 혀를 맞대고 느릿하게 핥아 올렸다. 그 행위가 주는 갑작스러운 자극에 잠시 경직되는가 싶던 혀가 도리어 억세게 얽혀 왔다.
뿌리까지 옭아매고 혀를 잡아 뽑을 듯 난폭하게 빨아 대며, 그것만으로는 도무지 해소되지 않는 맹렬한 격정을 실은 성현의 팔이 그대로 아연의 몸을 불쑥 들어 올렸다.
“까불지 마. 내가 신사답게 경고했을 때 멀찍이 도망갔어야지.”
“신사는 무슨…….”
세상에 아래를 이렇게 무식하게 세우고 다니는 신사가 어디 있다고. 뻔뻔하기도 하지.
“아직까지 내빼지도 않고 내 손에 허술하게 잡혀 있는 것부터가, 네가 너무 순진하다는 거야.”
들쑤시기 시작한 건 그녀 쪽이라고 제 입으로 책임을 전가했던 주제에, 이제 와서는 또 너무 순진하다니.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소리를 해 대는 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권성현의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것 같았다.
짙은 흥분이 밴 괴물 같은 힘이 아연의 허리를 깊숙이 휘감았다. 한쪽 팔만으로 그녀를 가뿐히 안아 든 성현은 다시금 입술을 겹쳐 왔다. 서슴없이 키스를 이어 가며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까지도 어디로 옮겨지고 있는지조차 모른 채 그저 허겁지겁 입을 벌려 그의 혀를 받았을 뿐이니,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것은 사실 아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살던 건물로 성현이 이사 온 이래로 수없이 드나들었던 공간이지만, 가장 사적인 영역인 그의 침실까지 들어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침실 문을 박차듯 열었다.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서자, 평소 성현에게서 나던 익숙한 냄새가 방 안 전체에서 느껴졌다. 비에 젖은 나무껍질에서 나는 듯한 은은하고 기분 좋은 잔향이었다.
“흐읏…….”
등허리에 푹신한 침대 시트가 닿는 것과 동시에 몸 위를 덮치듯 내리누르는 묵직한 무게감이 쏟아졌다. 온통 생경하기 짝이 없는 감각에 아연은 어깨를 작게 옹송그렸다.
잔뜩 경직된 목덜미에 찍어 누르는 입맞춤이 이어졌다. 촉, 쪼옥, 살갗을 여기저기 빨아 대는 야릇한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간지러우면서도 지끈거리는 감각에 아연이 몸을 움츠리자, 그가 몸을 구부리며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귓바퀴를 빨고 광대와 뺨, 그 아래로 이어지는 목선에 차례로 입을 맞춘 성현은 이윽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하아, 아연은 달아오른 숨을 내뱉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팔을 교차해 티셔츠를 위로 들어 올리는 모습이 어쩜 저렇게 색정적인지.
그는 단번에 벗어 낸 티셔츠를 침대 바깥으로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무심코 바닥으로 팽개쳐진 티셔츠 쪽으로 시선을 옮기던 아연은 그 순간 아랫배 부근에서 천을 들추고 안으로 파고드는 손길에 흠칫 고개를 돌렸다.
곧장 위에서 쏟아지는 짙어진 눈빛과 마주쳤다. 숨이 멈추었다. 우습게도 약간의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포악한 포식자의 송곳니에 꼼짝없이 꿰뚫린 가련한 사슴 따위가 이런 기분일까.
조금 전까지 ‘권성현과 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라고 충동적으로 생각했을 땐 채 떠올리지 않았던 감정이었다. 그의 가장 은밀한 부위를 눈으로 희롱하고, 짐승처럼 혀를 맞대고 얽었을 때조차 미처 몰랐던 선득한 감각.
결국, 낯선 침대에 드러누워 저 거대한 몸 아래 꼼짝없이 깔리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이 난 것이다.
이제 곧 권성현의 손에 발가벗겨지고, 나아가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맨살을 부딪치며 그와 몸을 섞게 되리란 사실이.
“이제 와서 겁먹었네.”
성현이 피식 웃으며 낮게 읊조렸다.
그의 손이 아랫배를 쓸어 올리고 허리를 스칠 때마다 아연이 깜짝깜짝 놀라며 몸을 움츠리는 게 느껴졌다. 흘끗 쳐다보니 커다란 눈망울에 뒤늦은 혼란의 기색이 어린 채 겁에 질린 듯 글썽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도리어 흥분의 불씨만 키웠을 뿐.
그러니까 가만히 있는 사람을 왜 함부로 건드려, 건드리긴.
“흣……. 아, 잠깐.”
티셔츠를 밀어 올린 손이 브래지어째로 가슴을 움켜쥐었다가 이내 브래지어마저 벗겨 버렸다. 티셔츠와 함께 뒤엉켜 아연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브래지어가 침대 바깥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성현은 눈앞으로 출렁 쏟아져 내린 가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의 헐벗은 가슴팍이 흥분으로 크게 오르내렸다.
“…….”
한아연의 가슴이 꽤 큰 것쯤은 대충 알고 있었다. 가끔 아연이 장난스럽게 팔짱을 끼어 올 때면 팔뚝에 뭉개지는 물컹한 살덩이의 감촉이 심상치 않았던 탓에 모를 수가 없었다.
제 가슴이 비벼지는 것도 모르는지, 어색하게 경직된 제 옆에서 혼자 해맑은 한아연을 보며 얼마나 복장이 터졌는지.
주변에 침을 질질 흘려대는 사내새끼들이 호시탐탐 파고들 틈만 노리면서 저를 상대로 얼마나 음탕한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야말로 ‘어떻게 한번 해 보고 싶어서’ 환장한 놈들이 도처에 널린 위험한 세상을 살면서 저리도 허술해서야.
친구로서의 깊은 염려와 답답함에 혀를 쯧 차며 팔짱 낀 아연의 팔을 떼어 내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뿐이랴. 학창 시절에는 으레 질 낮은 사내새끼들이 그렇듯 뒤에서 음침하게 한아연의 몸매를 평가질하던 쓰레기들만 모아도 한 트럭은 되었다. 그 쓰레기들의 단골 멘트가 한아연 가슴에 대한 찬양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구역질 나는 숭배 덕분에, 굳이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까 운동장에서 오래달리기 할 때 진짜 쩔더라. 나 계속 한아연만 쳐다봤잖아. 체육복 입고 달리니까 가슴 막 위아래로 흔들거리는데 존나 꼴려, 씨발.’
‘봤냐? 하……. 나 쌀 뻔했잖아. 존나 여신 같아. 한아연 가슴 한 번만 만져 보면 진짜 소원이 없겠다. 존나 부드럽겠지?’
‘헉……! 야. 야. 그만해.’
‘아, 왜. 다음 시간에 오래달리기 또 하자고 체육한테 건의해야겠어.’
‘야. 씨발, 그만 닥치라고.’
‘으헉! 궈, 권성현……. 어, 언제 왔어?’
어째 쓰레기들은 치워도 치워도 계속 쏟아지는지. 하여간 한아연은 알아서 주변 청소까지 해 주는 나 같은 친구를 뒀다는 걸 고맙게 여겨야 할 텐데.
자신을 상대로 더러운 상상이나 하는 쓰레기들이 산재해 있다는 불편한 현실을 그녀가 아는 것은 바라지 않지만 말이다.
“왜 그렇게 봐.”
물끄러미 가슴을 쳐다보는 시간이 수 초간 이어지자, 부끄러웠는지 아연이 눈살을 찌푸리고 뾰로통하게 타박했다.
그러는 자기는 내 좆에서 쿠퍼액이 질질 흘러내릴 때까지 눈도 깜빡 않고 마음껏 쳐다봤던 주제에.
“예뻐서.”
“……뭐야.”
아연은 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어이없다는 듯 성현을 흘겼지만 대충 둘러댄 말은 아니었다. 한아연의 가슴은 진짜 예뻤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