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이렇게 결혼이라니, 너무 억울해.”
아연은 손에 쥐고 있던 맥주 캔을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누운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성현이 흘끗 눈만 움직여 아연을 바라보았다.
“억울하면 안 하면 그만이지. 뭘 쓸데없이 고민해.”
심드렁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를 흘리고는 무심한 시선을 다시 핸드폰으로 돌린다.
자기 일 아니라 이거지?
아연은 눈초리를 가늘게 좁히고 그를 흘겨보았다.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는지 성현이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말아 올리곤 피식 웃는다. 그 와중에도 기다란 손가락이 핸드폰 위를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우리 엄마 알잖아. 맞선 날짜 잡는다고 점집까지 다녀오시는 위인인데, 간 김에 결혼 날짜는 안 잡아 왔으려고.”
“애초에 그 맞선부터 안 나가면 될 거 아냐.”
성현의 열의 없는 대꾸에 아연은 제 손목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더욱 음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기운 없이 흘러나왔다.
“……난 우리 엄마 못 이겨.”
“그래서, 성화에 떠밀려서 결혼을 하겠다고?”
성현은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서늘한 코웃음을 쳤다.
“정신 차려. 고작 스물아홉에 왜 인생을 진창에 처박으려고 해.”
진창.
그렇다. 아연은 지금 금방이라도 진창에 처박힐 인생을 앞두고 있었다.
내내 무미건조한 낯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했던 주제에, 결혼이란 말이 나오니 권성현의 말투부터가 뾰족해지는 걸 보아 그가 결혼에 부정적이란 것쯤은 잘 알겠다만, 지금 이 시점에서 그의 결혼관 같은 건 그다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연은 우울한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 속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모친, 희수로부터 전달받은 맞선 상대는 정말이지 한숨만 나왔다. 이상형이 말 잘 듣는 현모양처라니. 게다가 마흔을 앞두었다는 나이도 기가 찰 노릇인데, 사진 속 남자의 얼굴은 실제 나이보다 훨씬 웃도는 연배로 보였다.
아연은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망연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숨이 목구멍까지 턱 차올랐다. 남자를 판단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 외모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 온 한아연 인생이 이런 가당치도 않은 결혼 앞에 제물로 굴러떨어지게 될 줄이야.
성현의 말처럼 맞선이야 안 나가면 그만이라지만, 아연에게만큼은 제 모친을 거역하는 것이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희수가 그녀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윽박지르는 방식을 취했더라면, 이토록 무력하게 순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희수는 아연의 가장 약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또한 그것을 활용해 제 딸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기를 서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 어찌 됐든 결국 제 모친이 원한 바대로 맞선을, 그리고 나아가서는 끝내 암울한 결혼까지 하게 되리란 것을 저 또한 알고 있는 마당에 유일하게 억울한 것은…….
이럴 줄 알았으면 연애라도 실컷 해 볼 걸 그랬지.
대체 전생에 무슨 크나큰 죄를 지었기에, 연애 한 번 제대로 못 해 본 채로 이렇게 갑자기 결혼이라니!
아연은 뜨겁게 타는 속을 주체하지 못하고 새로운 맥주 캔을 낚아챘다. 차가운 맥주가 목 너머로 꿀꺽꿀꺽 흘러 넘어갔다.
희수는 제 딸의 초경이 시작된 해부터 귀에 박히도록 혼전 순결을 강조해 댔다. 그 세뇌의 정도가 심하여 도리어 반발심이 치솟을 정도였다.
이따금 그 강박적인 속삭임을 듣고 있노라면, 당장 집 밖으로 뛰쳐나가 제일 처음 눈에 띄는 아무 남자와 엉망으로 뒹굴고 싶은 자기 파괴적인 충동이 치솟곤 했다.
그러나 스물아홉이 되도록 그 격렬한 충동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데에는 그녀의 비위가 너무 약한 탓이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이제껏 주변의 또래 남자 중 그녀가 수용 가능한 외모 기준을 충족하는 인물의 씨가 말랐기 때문이리라.
아연은 분통을 터뜨리듯 맥주를 벌컥벌컥 입 안으로 들이켠 후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훔쳤다. 팔을 옆으로 툭 떨어뜨린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결국 어떤 이유에서든, 이제 와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보니 제 모친이 짜 놓은 계획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끌려가고 있다는 불안감이 차곡차곡 차올랐다.
점점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며 아연은 침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럴 수는 없어.”
“그래. 그럴 수는 없지. 뭔 놈의 맞선이야.”
성현이 성의 없이 대꾸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가볍게 귓등을 스칠 뿐, 아연의 의식은 이미 깊게 차오른 무참한 생각에 잠식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세뇌처럼 귓가에 반복되어 온 정신 나간 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넌 내 최고의 상품이야. 그러니까 흠집이 나지 않도록 간수를 잘해야지.’
다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속삭이며 제 머리카락을 빗겨 주던 그 살가운 빗질의 감각이 아직도 선명했다.
아연은 눈매를 왈칵 일그러뜨렸다. 주체하지 못할 만큼의 격렬한 반항심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이대로는…… 너무 억울해.
지금까지 살면서 마음에 드는 남자 하나 못 안아 봤다는 게 말이 돼? 이게 세뇌가 아니면 대체 뭐야.
물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전부터 그녀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생물학적 남성이야 지겨우리만치 차고 넘쳤으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아연이 손가락 한 번만 튕기면 만사 제쳐 두고 헐레벌떡 뛰어올 법한 인물이 몇 명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아무나 하나를 골라서 대충 해치우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올라오고 속이 울렁거리는 것은, 역시 비위의 문제였다.
아연은 목 너머로 차가운 맥주를 흘려보내며 분을 삭였다.
비위 상하지 않을 정도로만 생기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어떻게 된 게 멀쩡하게 생긴 남자가 주변에 이렇게 하나도 없을 수가 있는 건지.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남자의 외모를 따지는 데에 있어서 말도 안 되게 높은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적당히 이목구비가 조화를 이룬 얼굴과 어느 정도 큰 키, 품었을 때 묵직한 부피감이 느껴질 정도의 덩치만 갖춘다면…….
“……아.”
입술 사이로 나직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눈매를 가늘게 좁힌 아연은 입술에 맥주 캔을 붙인 채 소파에 길게 누워 있는 성현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성현이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왜. 왜 그렇게 쳐다봐.”
길쭉하다 못해 소파의 풋 스툴을 넘어간 기다란 다리. 검은색 트레이닝팬츠가 들러붙은 허벅지는 굵직한 근육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아무렇게나 누워 있는 바람에 함부로 말려 올라간 티셔츠 아래로 슬쩍 드러난 허리엔 탄탄한 복근이 탐스럽게 짜여 있었다.
내가 왜 지금까지 저걸 못 봤지?
“뭔데.”
저를 훑는 눈길이 못내 불길한지 성현이 허리를 뒤척였다. 그러나 아연의 시선은 한층 집요해졌다.
가슴의 두툼한 근육으로 흰색 반소매 티셔츠가 터질 듯이 팽팽하게 미어졌다. 한 손엔 핸드폰을 쥐고, 다른 한 손은 소파의 팔걸이에 길게 걸치듯 늘어뜨렸는데, 팔의 근육이 뚜렷한 세 갈래로 갈라져 작은 움직임에도 눈에 띄게 꿈틀거렸다.
그리고 대답 없이 물끄러미 자신을 주시하는 아연이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린 그의 얼굴이란, 적당하다는 표현을 붙이기엔 미안하리만큼 필요 이상으로 근사했다.
서늘하게 잘생긴 얼굴이 못마땅한 기색을 띠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아연은 차가운 맥주 캔의 표면을 문지르며 저도 모르게 입술 끝을 까득 깨물었다.
물론 권성현이 지금 이 순간 갑자기 잘생겨진 것은 아니다. 아연이 기억하는 최초의 순간부터 권성현은 줄곧 근사한 낯짝을 유지해 왔으니까.
서로 엇비슷하던 덩치는 학창 시절을 지나며 말도 안 되게 훌쩍 커져 버렸지만, 한때는 조금이나마 그녀가 더 키가 컸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니까 문제는, 두 사람이 햇수로 20년 넘게 함께 자라 온 소꿉친구라는 데 있었다.
미색이 줄줄 흐르던 어린 시절의 인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미묘하게 남아 있는 성현의 얼굴은 친구의 영역에 너무 깊이 박혀 있었다. 그리하여 이제껏 아연에게 차마 남자로 인식되지 않았던 것일 뿐.
“너 속 안 좋아?”
“……그런 건 아닌데.”
그러니까 그동안 잘 둘러싸여 있던 소꿉친구로서의 단단한 껍데기가 이제 와서 불현듯 벗겨져 버리고, 그가 몹시 그럴듯한 남자로 보이는 것은…….
“그럼 왜.”
“너…….”
어쩌면 벼랑 끝에 내몰린 절박한 심정에서 비롯된 치기를 부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일이면 이 충동 어린 순간을 뼈저리게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은 문제였다.
머릿속이 한 가지 생각만으로 가득 찼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그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 묘연했다.
모든 이성적인 판단을 뒤로하고 알 수 없는 조바심이 전신을 꼼짝도 할 수 없게 휘감았다. 아연은 잠시간 참아 삼켰던 숨을 터뜨리듯 급하게 입술을 떼었다.
“네 거, 커?”
돌연 그녀가 내뱉은 말에 성현은 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크냐고? 뭐가.
그는 고장 난 로봇처럼 한동안 움직임을 멈춘 채 눈을 감았다 떴다. 벼락이라도 맞은 양 얼어 있던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그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리더니 이윽고 높이 치켜 올라갔다.
“너 지금……. 뭐라고?”
“네 거기, 크냐고.”
슬쩍 하체를 향했다 올라온 아연의 시선이 쐐기를 박았다. 작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 성현은 핸드폰을 쥐고 있던 손을 스르르 내려뜨렸다. 이제껏 그가 열중해 있던 게임 화면에 캐릭터가 죽었다는 문구가 조롱처럼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