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곧 아비가 돌아올 것 같아 소녀는 어질러놓은 방안을 대충 정돈하고는 아비의 방을 나왔다. 아궁이에 막 불을 붙이려는데 마침 마당 쪽에서 아비의 발소리가 들렸다. 읍내에서 돌아온 아비는 자그만 보따리를 하나 들고 있었다.
“아부지 다녀오셨어요.”
“밥은 먹었냐.”
“아부지랑 먹을라고 기다렸는데.”
“해 넘어가는데 여태 굶고, 그러다 앓는다.”
“읍내에 사람은 많아요? 아부지, 다음엔 나도 데려가면 안 돼요?”
“안 된다, 읍내는 사람도 많고 위험해.”
마루에 걸터앉아 묵묵히 발 끈을 푸는 아비의 시큰둥한 반응에 소녀는 입을 삐죽였다. 씨알도 안 먹히는 말에 금방 체념하고 저녁상 차리러 부엌으로 가는데 아비가 슬쩍 소녀를 불러 세운다.
“저녁상 차릴 거 없다, 여 떡이랑 뭐 좀 있으니 먹고. 나는 먹고 왔으니.”
녹진한 개떡 한 입 베어 물고 금방 기분이 좋아진 소녀가 속없이 웃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소녀의 아비는 끌러진 보자기에서 서책 하나를 꺼내 슬쩍 소녀 쪽으로 내민다.
“어? 아부지 나 천자문 다 읽었는데.”
“읽을 줄만 알지, 쓸 줄도 알아야 할 것 아니냐.”
“나 쓸 줄도 알아, 이것 봐.”
소녀는 먹던 떡을 입에 털어 넣고 마당에 쪼그려 앉아 나뭇가지로 하늘 천, 따 지, 하며 글자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엉성하게나마 막힘없이 글자를 써내려가는 소녀를 보던 아비가 슬쩍 웃자 소녀도 따라 웃었다. 그 순간, 소녀는 들뜬 마음에 아비에게 뭔가를 더 뽐내고 싶어졌다.
“나 아부지 이름도 쓸 줄 알아.”
낮에 본 그 검집에 새겨진 글자를 나뭇가지로 꾹꾹 눌러쓴 소녀는 뿌듯한 표정으로 아비의 표정을 살폈다. 분명 칭찬을 기대하고 한 행동이었는데, 일순간 굳어버린 아비의 얼굴에 소녀 또한 당황하여 멈칫했다. 소녀의 눈에 비친 아비의 얼굴은 그저 놀라움이라고 하기엔 어떤 두려움마저 느껴지는 매우 기괴한 표정이었다.
“누가, 아니, 어디서 본 것이냐.”
“아, 아부지.”
“어디서 본 것이냐 물었다.”
소녀를 다그치는 아비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소녀는 난생 처음 보는 아비의 표정이 낯설어 그만 그 자리에서 엉엉 소리 내어 울어 버리고 말았다. 소녀의 아비는 아이를 달랠 생각도 않고 차갑게 굳은 얼굴로 꺼냈던 서책을 도로 보자기에 감싸 묶었다.
“애초에, 애초에 계집아가 글을 알아봤자 하등 쓸모없다 말했거늘.”
“아부지.”
“이 집에 있는 서책들도 모두 불 태울 것이다, 그리고…….”
“왜, 왜요 아부지, 왜.”
“앞으로 방문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갈 줄 알거라.”
자신이 뭘 그리 잘못한 걸까. 아비의 방을 뒤진 것이라면 전에도 더러 있던 일이었다. 차라리 회초리를 맞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서럽지도 않을 것이다. 소녀는 이 좁은 집도 모자라 방 안에 저를 가두려는 아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비밀이 많고 과묵한 아비가 야속했고, 분명 과분한 것을 바라는 게 아닌데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아비가 원망스러웠다. 소녀는 자리를 박차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문을 닫자마자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에 문 밖에서 아비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엎드려 울었다. 다시 한 번 문 밖에서 ‘경아’ 하고 소녀를 부르는 아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쾅, 소리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가 버린 아이를 보며 강무는 몇 번이나 경이를 불렀지만 대답대신 서러운 울음소리만이 돌아왔다. 평소 같으면 회초리라도 들어 버릇을 고치겠다 벼를 테지만 오늘 강무는 그럴 수 없었다. 굳게 닫힌 문을 보며 잠시 고민하던 강무는 문 앞을 서성이다가 이내 발길을 돌렸다. 한창 궁금한 게 많을 나이의 어린 아이에게 너무한 것일까 하다가도 이내 강무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다음날, 밤새 얼마나 울었던지 퉁퉁 부은 채로 힘겹게 눈을 뜬 경이는 아침 해가 중천까지 갈 즈음 잠이 깼다. 방문 밖에선 강무가 일부러 소리를 내며 집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지만 경이는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강무는 결국 목검을 챙겨들고 마루에 나가 앉았다.
“경아 아비 나간다.”
방 안은 여전히 조용하다.
“집 안에 얌전히 있거라.”
강무는 한숨을 내쉬며 집을 나서 수련장으로 향했다. 강무가 집을 나간 후에 삐걱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뭔가를 결심한 듯 비장한 표정의 경이는 치마저고리 한 벌과 사발 그릇 하나를 넣은 짐 보따리를 허리춤에 매고서 방문을 나섰다.
“더 이상 이렇게 못살아.”
경이는 미련 없이 성큼성큼 마당을 지났다. 싸리문을 지나 언덕을 내달리던 경이는 저 멀리 마을 어귀가 보이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아버지 몰래 나서던 길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홀로 마을 밖으로 나가는 것은 겁이 나니, 마음 같아선 탁발하러 온 스님이라도 따라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오늘따라 마을 분위기가 평소와 달리 어수선했다. 경이는 향교 앞에 못 보던 가마와 말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 했다. 그리곤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치듯, 자연스레 향교의 담을 가볍게 넘었다. 평소처럼 곳간 뒤에 숨어들어 강연을 하는 마루를 내다보니, 마루 앞마당에까지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다. 양반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이 마을 글눈 트인 사내들이란 자는 죄다 여기 있는 것 같았다.
“얼레, 요것 봐라?”
때마침 지나가던 향교 노복이 경이를 발견하고는 놀래서 다가왔다. 그는 곳간 뒤에 바짝 붙어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는 경이를 내려다보며 재빨리 주위를 살피고는 목소리를 낮춰 다그쳤다.
“니 전부터 요 얼쩡거리던 아지? 여가 어딘 줄 알고, 썩 나가라!”
“아무것도 안 훔쳤어요, 그냥 저, 귀동냥하러 온 거예요.”
“도성에서 귀한 분이 내려오신 날이라 안 그래도 정신없고만, 여 있다간 나도 큰일 나 이것아 응?”
“도성이요? 도성 사람이 여기 있어요? 아저씨, 저 진짜 얌전히 있을게요, 한 번만요.”
“몽둥이 들고 오기 전에 썩 꺼지지 못해, 얼렁!”
도성에서 내려온 학자가 강연을 하는 모양이었다. 경이는 살면서 도성 사람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도성이라는 말에 귀가 번뜩여서는 제발 부탁이니 조금만 있다 가게 해달라고 빌었지만 노복은 난처해하다가도 이내 또 누가 볼까 싶어 경이의 팔뚝을 잡아채다가 집 밖으로 내쫓았다.
“암만 그래도 기집아는 여 들어오면 큰일 난다야, 다시는 얼쩡거리지 말어!”
꽝, 소리와 함께 향교 대문이 경이의 코 앞에서 닫혔다. 도성에서 온 대학자의 강연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눈앞에서 놓친 경이는 허탈한 마음에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이깟 담이야 얼마든 다시 넘을 순 있지만, 경이는 기분이 영 상했다. 분명 향교 안 앞마당에는 저 말고도 동네 아이들도 있었는데.
“바지저고리 입으면 나도 들여 주나.”
경이는 자신이 입은 치마를 내려다보다가, 금방 피이 잇새로 바람 빼는 소리를 내며 휙 돌아섰다. 집에서 신나게 뛰쳐나올 때의 설렘은 다 어디 갔는지 기운이 쭉 빠졌다. 도로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마을에 내려온 김에 향교 뒤편에 있는 대나무 숲으로 향했다. 이래저래 속상한 날이면 경이는 이곳으로 와 향교에서 엿들은 대목을 소리 내어 읊으면서 마음을 풀었다.
대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기분이 좋아진 경이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스, 소리를 내며 지나는 바람과 함께 생소한 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얼핏 누군가의 노랫소리 같기에, 경이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겨 다가갔다. 빽빽한 초록들 사이로 분홍빛 치맛자락이 얼핏 보였다 사라졌다.
다시 고개를 쭉 내밀어보니 누군가 대나무 숲을 자박자박 거닐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한 손에는 서책을 들고서, 남은 손으론 하늘하늘 손짓을 하는 소녀였다. 경이는 숨을 죽이고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참으로 고운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