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3)화 (3/63)

#3화

경이는 넋을 잃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고운 옷차림은 이 마을 여자아이로 보이지 않았다. 말을 걸어보고 싶어 한 발짝 다가서는데 그 순간, 노랫소리가 멈추고 소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 누구시오.”

뭔가 부끄러운 것을 들킨 것처럼 소녀는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생각보다 쌀쌀맞은 반응에 당황한 경이는 뒷덜미를 긁적이며 엉거주춤 섰다. 다행히도 소녀는 제 또래의 어린아이를 보고는 금방 표정을 풀었다.

“이 마을에 사니?”

경이는 저 언덕너머까지 설명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힐끗 내다본 소녀의 손에 들린 책이 눈에 들어왔다. 경이 책 제목을 중얼거리자 소녀는 놀란 눈을 하고는 경이를 바라보았다.

“너, 글을 아는구나?”

들뜬 목소리에 경이가 활짝 웃었다. 아마 경이도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소녀가 들고 있는 책도 처음 보는 것이었고, 서책을 손에 쥐고 있는 여자 아이도 난생 처음 보았다. 소녀가 신기하다며 소리 내어 웃다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어쩌지, 내가 지금 줄 만한 게 없는데.”

“나 거지 아니에요.”

“아, 그래?”

그러자 대나무 숲에 다시 한 번 바람이 사라락 불어 들었다.

소녀는 도성에서 온 아란이라 했다.

“이렇게 큰 대나무는 처음 봤어.”

아란은 방금 경이가 쫓겨나온 향교에 행차한 그 대학자의 딸이었다. 경이는 도성 사람과 마주하는 것이 처음이라 두근거리는 마음에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다. 말을 고르느라 우물거리는 입모양을 찬찬히 기다려주던 아란은 아까부터 손에 들린 책을 힐끔거리는 경이의 시선을 용케도 알아차렸다.

“읽어 볼래?”

“그래도 돼요?”

“그럼, 그전에 어디 좀 앉자, 실은 길을 몰라 아까부터 줄곧 걸었거든.”

둘은 근처 판판한 바위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앉자마자 경이는 아란에게서 받아든 책부터 얼른 펼쳤다. 옛 사람들의 시가를 모아놓은 책이라 했다. 아란은 옆에서 인상을 쓰면서까지 집중하고 있는 경이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글은 어쩌다가 배웠어?”

“그냥, 귀동냥으로 배웠어요.”

“올해 나이가 몇이니?”

“아홉이요.”

아란은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경이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경이는 얼마간 읽어 내리던 책을 덮고는 입을 비죽였다.

“음, 이건 좀 어려워요.”

“한눈에 읽어 내리는 책은 아니야.”

“저기, 도성 이야기 좀 해주세요.”

“도성? 도성에 가본 적 없니?”

“도성은커녕 이 마을 밖으로 나간 적도 없는 걸요.”

다시 풀 죽은 표정이다. 아란은 시시각각 변하는 경이의 표정을 보는 게 재밌었다. 허름한 옷차림에, 등에 엉성하게 매단 보자기에선 사발그릇이 불룩 드러났다. 조금 전만 해도 자긴 거지가 아니라며 치켜세웠던 곧은 눈썹을 어느새 축 내리고 있는 동그란 얼굴은 옅게 그을려 있었다. 낯선 아이와 나란히 앉아 있는 이 상황이 아란은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저, 근데.”

“응?”

“도성 여인들은 아씨처럼 다들 노래를 잘해요?”

그 말에 아란의 얼굴이 붉어졌다.

“너 오늘 일은 못 들은 걸로 하기다.”

“왜요?”

“여인이 노래를 하는 것은 정숙하지 못한 거야.”

“어째서요? 이렇게 고운 목소린데.”

아란은 말문이 막혔다. 스스로는 단 한 번도 노래가 천하다 여긴 적 없지만, 유학자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정숙한 여인은 기생처럼 천한 노래 따위는 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자신은 유학자의 여식으로서 늘 정숙한 여인이여야 했으니, 그 누구에게도 목소리가 곱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아란이 얼마나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오직 아란의 어머니뿐이었다.

“아까 그 노래 한 번 더 불러주시면 안 돼요?”

“못 들은 걸로 하라니까.”

“뭐 어때요 여기 우리 둘뿐인데, 마을 사람들도 여긴 잘 안 오는 걸요.”

경이는 바위에서 폴짝 내려와 대나무 밑둥을 발로 통통 차며 말했다. 아란이 잠시 망설이다 문득, 아홉 살배기 꼬마의 말에 고민하고 있는 제 모습이 우스워졌다.

“안 해, 부르란다고 부르니, 내가 기생도 아니고.”

대나무 옆에 쪼그려 앉아 있던 경이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아란을 살짝 올려다보고는 아란이 들을 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이따가 대학자께서 나오시면 노래가 과연 천한 것인지 여쭈어봐야지.”

아란은 코웃음을 쳤다. 지금 고자질로 겁박하시겠다? 맹랑하기는.

“그런다고, 내가 부를 것 같니.”

제법 단호한 어조로 말을 했더니 경이는 손을 툭툭 털며 일어나 아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작전을 바꾼 요량인지 이번엔 그 앳된 얼굴위로 쓸쓸한 표정을 드리우더니 대나무 사이를 타박타박 걸으며 또 아란이 들으란 듯 중얼거렸다.

“대나무도 바람을 그저 품지 않고 풀어내니 사람들의 이마를 식히지요.”

어쭈? 아란은 방금 전과는 다른 사람인 것마냥 점잖게 목소리를 빼는 아이에게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바람소리의 귀함을 아는 자는 이 대숲을 항상 떠올릴 테고, 허나.”

“허나?”

“기약 없는 산골 계집이 바람보다 고운 소리를 알아버렸으니, 귀한 바람을 잃어버린 셈이지요?”

보통이 아닌 꼬마구나, 아란은 감탄 아닌 감탄을 했다. 그러다 결국 그 능청스런 말장난에 아란이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들은 경이가 뒤돌아 따라 웃는다. 그리고 이번엔 수줍은 얼굴로 아란에게 다시 한 번 노래를 청한다.

“듣고 싶어요, 노래 소리가.”

“뭐, 정 그러하면.”

정중히 청해 오니 아란도 더 이상 빼지 않는다. 어머니가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처음이기에 아란은 별안간 가슴이 설레어 숨을 가다듬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가장 좋아하는 곡조를 흥얼거리기 시작하자, 맑은 목소리는 대나무 잎사귀를 타고 흘렀다. 그 잔잔한 떨림까지 고스란히 전해지는 탓에, 고운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밖으로 새어나갈까 경이는 귀를 기울여 그 소리를 마음에 소중히 담았다.

“나중에, 도성 가면 다시 만날 수 있어요?”

“그 책 다 읽거든 찾아올래? 그럼 다른 책도 줄 테니.”

“제가 가져도 돼요?”

“응.”

아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란을 찾는 듯한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숲을 빠져나가던 아란이 뒤돌아서 말했다.

“나도 노래가 하고 싶어지면, 다시 찾아와도 되지?”

“그…….”

……럼요, 좋지요. 경이가 미처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분홍빛 치맛자락이 대나무 숲 사이로 멀어졌다. 대답은 듣지도 않고 가버린 아란이 야속할 법도 한데, 경이는 아란이 사라진 쪽을 보며 한참을 서있었다. 그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를 타박타박 걸으며 자기도 모르게 아란이 불렀던 노래를 흥얼거렸다. 손에 든 서책이 이리저리 장단에 맞춰 펄럭였다.

마을을 지나 자연스레 언덕을 오르려는데, 저 멀리 누군가 뛰어내려오고 있는 게 얼핏 경이의 눈에 보였다.

아차, 나 짐 싸들고 가출했지.

경이는 그 생각이 그제야 든다. 강무는 경이가 보이자 한달음에 달려와 주저앉듯이 아이를 끌어안았다. 강무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어린 경이는 요즘 들어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만 낯설었다.

“애비가 한 발짝도 나오지 말라고…….”

“아부지 잘못했어요.”

“다시는, 다시는 이러지 말거라.”

강무는 한참을 경이의 어깨를 끌어안고서 고개를 들지 못하다가, 조금 진정이 되자 말없이 경이를 업고는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아부지.”

“응.”

“나 동무 생겼다.”

“그러냐.”

“이 책도 동무가 준거야.”

“그랬구나.”

“아부지.”

“응.”

“나 공부하고 싶어.”

“그러면 애비 속 안 썩일 테냐?”

“응. 나 향교 보내주면 안 돼요?”

“경아, 향교는.”

“치마저고리 입고 안 되는 거라면 바지저고리 입을게요, 응?”

“…….”

고작 아홉 살배기 아이의 말 속에서 한이 사무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비의 대답을 숨죽여 기다리는 조그만 손이 강무의 턱 아래로 초조한 듯 꼬물거렸다. 말없이 언덕을 오르던 강무는 결국은 그러마 했고, 그 대답을 기어코 듣고 나서야 아이는 스르륵 아비의 등에서 잠이 들었다.

잠든 경이를 방에 눕히고 자신의 방에 돌아온 강무는 쌓아놓은 서책들을 한 쪽으로 치우더니, 문갑을 열어 비단 도포뭉치를 꺼내들었다. 강무는 비단 속에 싸인 칼 한 자루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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