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가 있음에 (1)화 (1/63)

#1화

소녀는 훌쩍, 담을 넘었다. 능숙하게 말아 올린 치맛자락은 담을 넘는데 그다지 방해가 되지 않았다.

"또 담을 넘었느냐."

손바닥에 묻은 흙먼지를 탁탁 털어내던 소녀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엄한 표정으로 소녀 앞에 섰다. 한 손엔 반질반질하게 닳은 목검이 쥐어져 있었고 다른 한 손엔 너덜너덜해진 책이 들려 있었다. 소녀가 담을 넘기 전에 앞서 던져놓은 책이었다. 소녀는 그대로 고개를 푹 숙였다. 불호령이 떨어지길 눈을 꼭 감고 기다리고 있는데 남자는 한동안 말없이 소녀를 응시하다가,

“어두운데 담은 넘지 말거라, 몸 다친다.”

어쩐 일인지 그 말만 하고는 그대로 소녀를 지나친다. 골목을 지나 언덕을 오르는 내내 소녀는 남자와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남자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언덕을 올랐다. 어느새 덩그러니 나타난 낡은 초가집 안으로 남자가 먼저 들어섰고, 뒤따르던 소녀는 싸리문 밖에서 슬그머니 걸음을 늦췄다.

방문이 닫히자, 그제야 소녀는 잔뜩 움츠리던 어깨를 늘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때늦은 기지개를 쭉 켜고는 어슬렁어슬렁 마당 평상까지 걸어가 털썩 주저앉는다. 해가 넘어간 지는 오래였고 하늘엔 별들이 촘촘히 떠 있었다. 소녀는 아예 평상 위에 드러누워 손을 뒷머리에 대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올라간 적삼 때문에 소녀의 뽀얀 배가 드러났지만 개의치 않았다. 소녀의 맑은 눈망울 위로도 별들이 떠올랐다.

“하필이면, 바보같이 졸아서는.”

중얼거리던 소녀는 고개를 들어 방 쪽을 힐끔 살폈다. 아직 방 안에 불은 켜져 있으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녀는 도로 누워서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렵게 구한 건데.”

글 깨나 읽는 동네 양반네들이 많은지라 마을 사내라면 다 읽고도 남은 책일지라도, 이런 산골 마을에선 그마저도 구하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기어코 그 책을 빼앗겨 버렸으니 소녀는 속이 상했다. 차라리 혼 좀 나고 말지, 이렇다 할 말도 없이 책만 가져가 버리니 조금은 분한 마음도 들었다. 책이 없으니 이젠 향교에 가더라도 귀동냥이나 하게 생겼다. 아니, 향교엔 갈 수나 있으려나. 소녀는 오늘따라 유난히 선명하게 뜬 별을 망연히 올려다보았다. 별이 밝으니 내일은 날이 맑겠구나, 그럼 아침엔 언덕 위로 올라가 볼까. 금방 다른 데로 새어가는 소녀의 생각들이 별과 함께 총총 떠올랐다.

소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남자의 방엔 여전히 불이 있었다. 주무시라고 말을 할까 문 앞을 서성이다 소녀는 그냥 방에 들어가 누웠다.

방문 앞에 어른거리던 아이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건너편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남자는 다시 시선을 책으로 돌렸다. 흙먼지를 털어냈음에도 책은 겉표지부터 손때로 너덜너덜했고 몇 번을 본 것인지 끈이 다 해져 있어서 금방이라도 종이들이 흩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처음엔 산에서 뛰어노는 것도 싫증난 아이가 방에 들어와 장난삼아 서책을 뒤적거리기에 천자문 정도는 알고 있어도 괜찮겠지 싶어 몇 번 읽어준 것도, 같이 놀 또래가 없으니 마을을 몰래 오가는 걸 몇 번 눈감아 준 것도 괜한 짓이었다. 설마 아이가 마을 향교에 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아이는 이미 향교에서 쓰는 교재를 홀로 다 읽고 있는 것 같았다. 괜한 기우인가, 책을 쓸어보는 남자의 눈은 근심이 가득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 남자는 일찍부터 나갈 채비를 했다. 마루에 걸터앉아 발목 끈을 동여매는데 소녀가 졸린 눈을 비비며 나와 남자를 바라보았다.

“일어났느냐.”

부드럽게 묻는 목소리에 소녀는 남자의 눈치를 살피더니 슬쩍 마루에 걸터앉아 물었다.

“아버지 어디 나가요?”

“잠깐 읍내에 좀 다녀오마.”

“읍내? 나도! 아부지 나도!”

읍내라는 말에 소녀는 후다닥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제 하루 종일 볕에 충분히 말려 곱게 개어놓은 치마저고리를 허겁지겁 꺼내고 있는데, 등 뒤로 단호한 아비의 음성이 들렸다.

“어디 나가지 말고 집 안에 꼼짝 말고 있거라, 금방 올 테니.”

소녀는 잔뜩 풀이 죽어 치마저고리 든 손을 폭 떨구었다. 잔뜩 골이 난 마음에 뒤돌아 나서는 아비의 등에다,

“나도 읍내 구경하고 싶단 말이야!”

하고 꽥 소리를 질렀지만 아비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는 싸리문 밖을 나섰다.

“맨날 혼자만 나가고.”

소녀는 마을 촌락들이 모인 곳에서도 뚝 떨어져 언덕 하나를 더 올라야 있는 초가집에 살았다. 언덕 위까지 마을 사람이 왕래할 리도 없고, 그러니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소녀의 존재감이란 그저 어쩌다 한 번 마을에 나타나는 거지 꼬마애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사방을 둘러봐도 산등성이와 감자밭뿐인 이런 촌구석에 양반댁 규수마냥 얌전히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라니 이건 뭐, 토벽 구석에 둥지를 튼 제비새끼만도 못했다. 제비새끼는 날개 퍼덕일 줄만 알아도 언제든 날아가 버릴 수나 있지.

소녀는 속상한 마음에 싸리문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그래도 청소라도 깨끗이 해놓고 기다리면 기특해서라도 다음번엔 데려가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손을 털고 일어섰다. 작은 손으로 온힘을 다해 행주를 쥐어짜 마루도 닦고 마당도 쓸었다. 빨랫감들은 괜히 개울가에 혼자 나갔다고 혼날까 봐 도로 제자리에 두었다. 그러다보니 좁아터진 초가집에 세간도 별로 없는 터라 한식경 남짓하니 청소가 끝이 났다.

지금쯤이면 아비가 마을을 지나고 있을 것이다. 읍내에 나가는 데에만 한참이니 금방 온다고 해도 오후 저녁이나 되어야 할 것이다. 소녀는 아궁이에서 감자 두어 개를 구워다가 치마에 감싸고는 종종 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렀다.

뜨끈해진 치맛자락을 툭툭 털며 언덕에 걸터앉으니, 역시나 날이 청명하여 소녀의 발 아래로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밭농사를 넓게 지을 땅이 부족하여 주민 대부분이 감자농사를 지으며 검소하게 살지만, 오뉴월이면 한 데 모여 오밀조밀 피어 있는 감자꽃이 볼 만한 아주 조용한 마을이었다.

예로부터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학자들이 모여들어 자리 잡은 마을이라 학식 높은 양반들이 제법 많이 살지만 대부분 가난하여 권세 없이 그저 학문만 하는 자들이었다. 그래도 마을 중앙엔 향교가 자리하고 있어 조용한 마을에 글 읽는 소리만은 끊이질 않았다.

마을 향교엔 제 또래 아이들보다는 약관의 나이를 넘은 선비들이 대부분이었다. 작은 마을이다 보니 평민 사내들도 향교 마당에 둘러앉아 글을 읽곤 했지만, 여자아이는 향교 출입이 금지되었다. 그나마 강연시간에는 향교에서 일하는 노비들도 행랑채 밖으론 잘 나오지 않아서 소녀는 몰래 담을 넘어 곳간에 숨어들 수 있었다. 특별한 놀거리도 없던 소녀는 글 읽는 것에 금방 재미를 붙였고, 향교 안에서 교수와 생도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마을 밖 세상을 꿈꾸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마을을 죽 내려다보던 소녀는 품속에서 감자 한 알을 꺼내 한 입 베어 물었다. 질리도록 먹는 감자 맛이 입 안에서 텁텁했다. 요즘 소녀의 관심사는 온 마을을 둘러봐도 감자밭뿐인 이곳을 하루 빨리 벗어나는 것이었다. 말로만 듣던 도성에 한 번 가보는 게 소원이지만, 그보다 눈치 안 보고 마음 편히 시장 구경이라도 해보는 게 먼저였다. 도성에서는 여자아이에게도 글을 가르쳐 준다고 들었다. 물론 그마저도 양반집 규수들에게만 해당되겠지만.

스스로 글을 깨우치고 향교에서 듣는 세상이야기에 점점 귀가 뜨이기 시작해서일까. 소녀의 머릿속은 하루가 다르게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올랐다. 자신을 지나치게 싸고도는 아버지 때문도 있지만, 점점 답답함을 넘어선 뭔가가 강렬하게 소녀의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그런데 읍내엔 뭐 때문에 가신 거지?”

소녀의 아비는 산 속 작은 수련장에서 마을 청년들에게 무예를 가르쳤다. 강인한 신체에 깃든 강인한 정신을 중히 여기는 마을 선비들은 날마다 산 속에서 홀로 무예를 단련하는 비범한 사내를 기꺼이 스승으로 모셨다. 그러다 보니 쌀도 얻고 옷감도 얻고, 굶지 않고 춥지 않게 살 수 있었다. 생계를 위해 수련장에서 마을 청년들을 가르치긴 했지만 소녀의 아비는 과묵하여 마을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나마 검을 다루는 사람인지라 마을 대장장이와는 조금 가까이 지내는 정도였을 뿐. 그렇게 아비가 수련장에 가 있는 동안, 따분한 소녀는 몰래 마을로 내려와 향교의 담을 넘어 곳간 옆에 기대어 글을 따라 읽다가, 아비가 돌아오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제처럼 가끔 깜빡 조는 경우를 빼면.

입 안 가득 감자를 우물거리던 소녀는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집어 들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수련장에서 본 아비가 그랬던 것처럼 소녀는 나뭇가지를 쥔 두 팔을 곧게 펴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사정없이 허공을 향해 휘둘러봤지만, 붕-붕-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 몇 번에 소녀는 금방 어깨가 뻐근해져 왔다.

제 몫을 다한 나뭇가지는 소녀의 손을 떠나 다시 언덕 위를 뒹굴었다. 금방 싫증이 나버린 소녀는 또 사방을 둘러봐도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산골을 멍하니 보다가, 이내 번뜩 떠오르는 생각에 먹다만 감자알을 들고선 집까지 후다닥 뛰었다.

오늘처럼 아비가 오래 집을 비우는 날은 드물다 보니, 소녀는 이 틈에 아비의 방에 있는 서책을 베껴다가 쟁여놓을 생각이었다. 아궁이에서 숯 조각을 집어 들고 아비의 방으로 들어간 소녀는 무명천으로 두른 책 꾸러미부터 찾았다. 혹여 지난밤 아비에게 빼앗긴 책이 있나 방 안을 살피던 소녀는 문갑 안 쪽에서 비단 도포자락으로 감싸진 기다란 무언가를 발견했다.

구경만 몇 번 해봤다 뿐이지 직접 비단을 만져본 것은 처음이라 소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손을 뻗었다. 보들거리는 감촉을 느끼며 비단을 들추니 그 무언가의 정체는 웬, 제 키만한 검이었다. 아비가 검을 다루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거의 항상 목검만을 들고 다녔기에 소녀에겐 낯선 물건이었다. 까맣게 옻칠이 된 검집에는 은으로 음각된 용무늬와 강무(姜武)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강무?”

글자는 읽을 수 있다지만 뜻을 모르니 소녀는 그저 아버지 이름이 강무인가 보다 싶었다. 검을 다시 곱게 싸서 문갑 안에 넣어놓고 소녀는 마저 서책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날이 저물자 산골엔 금방 어둠이 찾아왔다. 골라잡은 서책을 홀린 듯 읽다가 베껴 쓰는 것도 잊은 소녀는 뒤늦게야 컴컴한 방안에서 호롱불도 켜지 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쩐지 눈이 침침하더라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