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지호는 균열을 걷고 있었다.
어둡고 조용하고 살벌한 풍경들. 익숙한 것과 익숙하지 않은 것이 뒤엉켜 더더욱 낯설게 보이는 정경들.
깨진 아스팔트와 망가진 차량. 반파된 가로등 같은 것들을 보며 이곳을 휩쓸고 지나간 괴물들의 여파를 상상했다. 뒤에 남은 것은 그런 상상의 여지뿐이다.
왜 걷고 있었더라.
지호는 무작정 앞으로 나가던 걸음을 멈추며 생각했다. 언제부터 걷고 있었지. 어디에 있다가 여기로 왔을까. 멀리서 들리는 발소리 외에 아무것도 느껴지는 것이 없다.
균열 밖 세상은 먹빛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지호는 자신의 시야 밖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을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 보이지 않는 곳 너머에서 무수한 생명들이 꿈틀거리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지금 묘한 경계에 서 있었다.
“맞아. 내가 그렇게 만들었지.”
한참을 무시하던 발소리가 멎으며 드디어 목소리가 들렸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지호와 비슷한 키의 누군가가 나타난다. 이쪽으로 길게 드리워지는 그림자는 외형과 달리 아주 거대하고 복잡한 모양이었다. 지호가 그림자를 보고 있음을 안 상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내 본래 모습이야.”
지호는 어떤 이름을 떠올리려다 멈추었다.
희뿌연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떠오르지 않는 기억이 있다. 분명 알고 있는 건데 선명하지는 않은, 경험한 것인데 낯설게 느껴지는, 타인의 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한데도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기억 같은 종류다.
여왕은 고개를 기울인 채 지호를 응시했다.
“왜 끝까지 네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다른 것들보다 유독 지능이 높기도 하지만, 너희 종은 유별나. 힘을 얻게 되면 그까짓 겉모습이나 정체성 정도는 당연히 포기할 수 있는 일 아니니?”
여왕의 말투는 다른 고지능 개체들의 것과 비슷했다. 어쩌면 그들이 여왕을 닮아 그렇게 이야기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대를 잘못 태어난 듯, 어찌 보면 우아하기까지 하던 퀸 패러사이트의 말투가 떠올랐다.
괴물들의 특징을 떠올리며 지호는 차츰 베일에 가려진 동료들의 이름자도 떠올렸다. 이름. 그들을 칭하는 것들. 가끔은 다른 말로 불리기도 하지만, 자신의 것임에도 타인이 가장 많이 향유하는 바로 그것.
희멀겋고 투명한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난 동료들이 하나하나 지호를 스쳐 지나갔다. 대부분 경멸하거나 두려워하고, 일부는 슬퍼하거나 격렬한 거부감을 표한다. 그것이 단순한 환상이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지호는 마음이 깎여 나가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반쯤 꺾인 가로등에 올라앉아 지호와 기억들을 보고 있던 여왕이 가볍게 웃었다.
“그것이 그들의 본모습이야.”
“웃기지도 않는 소릴 하시네.”
“내 힘으로 보여 준 미래야. 괴물이 된 너를 두려워하거나 싫어하고, 배척하며 피하게 되지. 일부는 너를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리고 싶어 해. 변한 너를 받아들이지 않는 거지.”
“그럴 리 없어.”
“믿고 싶지 않니? 그럴 수도 있지.”
여왕은 다리를 까딱이며 투명한 형체들을 먼지로 되돌렸다. 지나친 고요가 기묘하다. 지호는 인상을 찡그리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왜 이렇게 번거로운 짓을?”
지호가 퀸 패러사이트를 떠올리자 즉각 그 형체가 눈앞에 나타났다. 덕분에 지호는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죽은 것과 기만, 거짓으로 이루어진 환상들. 본래라면 이것이 환상임을 인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호의 미약한 정신 방벽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현실을 인지하려 안간힘 쓰는 그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이미 죽은 괴물을 내려다보며 여왕은 간결하게 설명했다.
“네 정신을 죽이는 일보다는 너를 굴복시키는 쪽이 자주 쓰기 편하니까.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겼을 때 알아서 대응하는 건 시체보다는 살아 있는 부하거든.”
“멋대로 굴게 놔두지 않을 거야.”
“어쩔 건데?”
비아냥이 아닌 평범한 질문처럼 돌아온 물음에도 지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여왕이 보여 주는 낯설고 공격적인 환상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왕이 지호를 속이기 위해 꾸며 낸 환각인지 아니면 진짜 그들의 미래 모습인지 알 수 없는 그 부정적인 환상들은 정말로 지호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러나 타인에게 상처받았다는 슬픔에 매몰되어 삶의 의지를 잃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호는 어린 시절부터 균열 생존자들과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들이 어떻게 상처를 치유하며 살아가는지도 다른 이들보다 훨씬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호가 상처받았다는 것을 알아챈 것인지, 환상이 실체를 갖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유독 짙어지는 형상들. 투명한 연기와 같았던 형태는 곧 질감과 무게를 가지며 현실로 튀어나왔다.
지호 부근으로 사람의 그림자처럼 보이는 것들이 길게 솟아났다. 바닥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형체를 이루어 간 것들은 마치 진짜 사람 같은 모습으로 지호 주변에 빙 둘러섰다. 그러나 그들이 동시에 손을 뻗자 느껴지는 건 지독한 두통이었다.
지호는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여왕의 환상이 실질적으로 신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지호는 간신히 힘을 주어 자신을 내리누르는 에너지에 맞서며 낮게 중얼거렸다.
“네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들이 나를 미워하게 된다고 해서 내가 네 밑으로 들어갈 이유는 어디에도 없지 않겠어?”
압박이 견딜 만한 정도로 익숙해지자 지호는 참지 않고 그 무리 중 하나에게 달려들었다. 뒤쪽에서 다른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와 지호를 쳐 냈다. 마치 이주리 헌터의 것 같은 동작.
표범처럼 날렵하고 군더더기 없는 그림자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동료와 닮아, 지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들의 모습은 나타났을 때처럼 푹 가라앉아 사라지고, 주변은 다시금 폐허만 남는다. 지호는 욕설을 퍼부으며 허공에 팔을 휘둘렀다. 무언가 부딪친 듯한 느낌. 그러나 보이는 것은 없다.
보다 공격적인 그 반응이 마음에 든 것일까. 여왕은 짧게 웃으며 가로등 아래로 폴짝 내려섰다. 지호와 비슷한 키, 비슷한 체격. 어쩌면 닮은 것 같은 얼굴이다. 분명한 비슷함 속에서 다른 면이 보였다. 지호는 그가 누구의 얼굴을 택했는지 알고 이를 악물었다. 사진 속에서만 보았던 엄마의 어린 얼굴이 거기에서 순진한 얼굴을 한 채 비수를 꽂고 있었다.
“내 피와 살이 된 것들의 기억을 내가 가지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
“이상한 일이지. 먹은 것을 기억하면서 그것들을 끝끝내 상처 입히고 죽이다니, 결과적으로 자신이 될 것을 괴롭히는 꼴이잖아.”
“그래서 나는 아이들을 꽤 존중해. 지금도 네 목을 비틀어 꺾어 버리지 않고 설득하려고 하고 있잖니. 옛날의 나였다면 좀 더 인내심 있고 다정한 방법을 쓸 줄 알았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고작해야 이런 허상이나 보여 주며 너를 들쑤시는 게 다로구나.”
여왕의 모습 뒤편으로 하얗게 빛나는 그림자 같은 것이 보였다. 도훈이 가르쳐 주었던 그의 본체와 비슷한 형상이다.
지호가 자기 뒤를 본다는 것을 느꼈는지 여왕은 그 환상을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처음으로 그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뭘 보고 있는 거야?”
여왕의 본체에 가까운 환상이 그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지호는 그 당황의 이유를 몰라 멀뚱히 고개만 갸웃거렸다.
“댁의 본래 모습을 보고 있는데?”
여왕의 눈에 빠르게 차오른 분노. 퀸 패러사이트의 환상체가 사라지고 재와 먼지, 타인의 살과 피로 이루어진 괴이한 모양이 바닥에서부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구부러진 등 뒤로 툭툭 불거진 뼈마다 가시가 튀어나왔다. 무수히 많은 팔과 그보다 더 많은 다리. 서로 다른 형태의 날개나 꼬리들은 어떠한가. 여왕의 몸은 각기 다른 종의 것을 이어 붙인 듯, 사방이 어울리지 않는 형태로 꿰매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형태들은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희끄무레한 빛이 명확한 형태를 가리고 있어, 지호에게는 그저 어떠한 형체의 일부 정도로만 비추어 보였다.
지호는 또렷이 보이지 않음에도 이질적인, 나아가서는 거부감과 구역질을 일으키는 모양새에 당황하여 물러났다. 오른팔뿐 아니라 곳곳에 돋아난 비늘이 거칠게 일어나 그 기분이 어떠한지 보여 주고 있었다.
“왜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지 궁금했었다. 잔꾀를 부려 놓은 모양이로군.”
여왕의 음성 마디마디마다 서늘한 경멸이 스며 있었다. 괴상한 형체는 몸을 뒤틀고 비틀거리면서도 그 형체를 치덕치덕 쌓아 가기 시작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추악함들만으로 빚어낸 듯한 생물이 몸을 일으키려 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땅이 거칠게 흔들리며 지호와 여왕 모두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구축되던 허상은 사라지고, 뒤에서부터 온 거친 충격에 지호는 피까지 토해 가며 바닥에 엎어졌다. 여왕은 성난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 무슨!”
아무도 없던 균열 내부인 줄 알았던 풍경 속에 실체가 겹쳐졌다. 현실과 허상이 교차하는 순간,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주변에 생동감 있는 진짜 헌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인식한 건 맹렬한 공격이었다. 지호는 그를 향해 쇄도하는 다섯 번의 변칙 공격을 쳐 내며 뒷걸음질 쳤다.
뭐라고 소리치려 했으나 여러 감각이 아직 지호의 것이 아니었다. 심장을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손을 다급히 피한 지호는 도준우의 매서운 시선을 마주하곤 식은땀을 흘렸다.
주변 시야가 일그러졌다. 여전히 환상 비슷한 형태로 보이는 사람도 있고, 보다 현실적으로 인지되는 형태도 있었다. 그중 단연 독보적인 실체를 가진 도준우는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뒤편을 턱짓했다. 애석하게도 시야 역시 지호의 것이 아니다. 사방으로 흩어진 헌터들이 무언가 하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지호가 명확히 볼 수 있는 것은 도준우뿐이었다.
지호가 좀 전에 보았던 그림자로 이루어진 환상들처럼 특수반 헌터들이 띄엄띄엄 거리를 둔 채 지호를 둘러싸고 있었다. 여전히 들고 있는 손. 아까 본 것이 사실 환상이 아니었던 것일까? 지호는 충격을 받았다. 그가 환상인 줄 알고 공격했던 것이 진짜 헌터이고, 그의 공격을 받아 낸 것도 진짜 이주리 헌터였을까?
준우의 공격은 하나하나가 묵직하고 위협적이다. 지호는 딴생각에서 벗어나 그를 상대하는 데 집중하면서 잡스러운 걱정을 떨쳐 버렸다.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와중에 도준우만이 유일한 실체였다.
그가 왜 헌터들과 연합하여 자신을 공격하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저 헌터들처럼 보이는 일렁임들은 사실 헌터가 아닐 수도 있었다. 무엇 하나 확실한 것 하나 없는 와중에 오로지 도준우의 공격만이 명확하다. 지호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했으나 뒤따르는 다른 자들의 공격까지는 피하지 못했다. 정확히 보이지도 않았고, 지호가 보려는 방향으로 눈이 돌아가지도 않았다. 오로지 감각에 의존한 회피. 전신의 비늘이 곤두섰다.
입 모양이 움직인다. 명확히 보지도 못하고 소리에 집중하지도 못하는 와중이라 읽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공격이 직선으로 날아온다는 점, 그것을 피하거나 맞받아치기 위해서는 그쪽을 돌아봐야 한다는 점 덕분에 지호는 도준우가 하는 말을 이해했다. 사실 단순한 외침이다.
“조금만 더 버텨!”
지호의 신뢰 대상에서 벗어나 있는 자의 말이지만, 지호는 그가 헌터들과 함께 있다는 점 때문에 그 말을 믿기로 했다. 준우의 것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날아오는 무수한 공격들이 지호를 스쳤다. 중요한 건 급소를 노리거나 직격으로 날아오는 공격이 없다는 점이다. 여왕의 감각은 분노하며 날뛰고 있었으나 지호는 필사적으로 ‘버티기 위해’ 집중했다. 차라리 앞을 명확히 보지 못하는 편이 나았다.
요란한 소리가 귓전을 울렸고, 동시에 지호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주변을 감싸는 기묘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깨질 듯한 두통. 정신계 능력이 그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다. 여왕이 지호의 목을 빌려 호통치는 와중에도 지호는 착실하게 도준우의 공격을 피했다. 팔을 휘감아 움직임을 봉쇄하는 이형 에너지들이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쳤다. 다리가 아니라 팔이다. 이유를 생각하는 순간 지호의 팔이 제멋대로 움직여 누군가의 등을 공격했다.
통증만은 멀게 느껴지지 않아 지호는 신음 한 번 흘리지 못하고 고통을 감내했다. 몸 안에서 분노가 날뛴다. 그의 것이 아닌 분노였다.
흐릿하게 흔들리는 그림자들 속에서 얼핏 헌터들의 얼굴이 보였다. 박 팀장도 있고, 김 반장도 본 것 같다. 이주리 헌터도 있었던가? 그 옆에 보현이 보인 걸 보니 맞는 것 같다.
지호를 바로 코앞에서 붙든 도준우를 제외하고는 전원이 지호와 거리를 둔 상태로 그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전투 상황인 것에 반해 소리가 극도로 적은 편이다.
지호는 시야를 확보하려 애썼고, 여왕은 그것을 자기 휘하에 두려고 애썼다. 감각이 돌아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앞이 보였다 안 보였다 왔다 갔다 하여 어지러웠다.
속이 울렁거리는 와중에도 지호는 그들이 일정 거리 안으로는 접근하지 않는 것을 알았다. 웃긴 상황도 아닌데 웃음이 났다.
‘뭔가 작전이 있겠죠,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