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25. 진실들
지윤은 거칠게 숨을 토하며 깨어났다.
소민을 제외한 다른 헌터들은 대부분 정신을 차린 이후였다. 멍청한 얼굴로 어두운 도로를 둘러본 그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괴물, 이상한 괴물이 나타났었는데! 지호 씨!”
“저 멀쩡해요. 일단은요.”
지호는 초췌한 몸으로 지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붙잡고 일어난 지윤은 얼떨떨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백색 점액질을 연료로 타오르던 불도 꽤 많이 꺼진 채라 주변은 상당히 어두워져 있었다.
“저 사람은 뭐임?”
“어, 어떻게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일단 아는 사람인 거네. 처음 보는 헌터인데.”
지윤은 지호의 어정쩡한 대답을 들으며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사실 거기만 털어서 끝날 일은 아니었다. 여전히 기절한 건 소민뿐이다. 지호 역시 곧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죽어 가는 인상이긴 했지만, 다행히 아직까지는 살아 있었다.
김 반장과 보현, 그리고 낯선 헌터가 한쪽에서 심각한 얼굴로 대화하는 것을 확인한 지윤은 별생각 없이 곁의 친구 상태를 확인하다 질겁했다. 본디 오른손만 변형되었던 몸 곳곳이 괴물의 것처럼 변이되고 있는 까닭이었다.
“아니 이 미친, 지호 씨 눈이 빨개지고 주변이 지랄 났던 것까진 기억나는데 뭐예요?”
“제 몸을 조종하려던 괴물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몸은 좀 괜찮아요?”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지윤은 어이없어하며 지호의 상태를 재차 확인했다. 심각한 상처 부위마다 괴물의 살갗으로 덮여 있다. 일부는 파충류의 가죽 같은 느낌도 들었다. 신체 괴변이가 더 진행된 까닭일 것이다. 지호는 가릴 수 있는 부위는 어떻게든 옷을 끌어 가리려 애썼지만, 물론 불타고 찢어진 부위가 대부분인 옷으로는 그러기 어려웠다.
“저놈은 죽은 거겠죠? 다시 일어나서 우릴 습격하고 그런 일은?”
“거의 다 탔어요. 생체 반응도 얼마 없고요. 남은 흔적으로 마정석을 만들려고 했는데 뭉치는 것도 거의 없더라고요.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흠. 갑자기 엄청 든든하네여, 지호 씨.”
지윤은 별생각 없이 지호의 몸을 눌렀다. 흐억 소리와 함께 바들바들 떨며 몸을 움츠린 지호는 앓는 소리를 내며 손을 내저었다.
“마, 만지지 마요. 간신히 버티고 있다고요.”
당황한 지윤은 손대지 않는 거리에서 느리게 치유력을 불어넣으며 지호를 회복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거의 다 마른 수건이나 다름없는 본인을 아무리 쥐어짜 봐야 효과적인 수분 공급이 어려움은 자명한 일이었다.
무용한 노력을 반복하는 둘의 행동을 중단시킨 건 김 반장이었다. 그는 피로한 얼굴로 손을 내저어 둘의 주의를 끌었다.
“둘 다 정신이 들었나? 움직일 시간이다. 아파트로 돌아가야 해.”
“나쁜 소식이라도 있나요?”
끙끙대는 지호를 대신해 질문한 지윤은 김 반장이 고개를 끄덕인 것에 당황했다. 무지막지한 괴물을 잡았는데 또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퀸 패러사이트가 아파트 단지의 방벽을 뚫는 데 성공했나? 소식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전기가 나가며 중계기도 망가졌는지 통신 지역 이탈 표시가 떠 있을 뿐이었다.
지윤이 전파 끊긴 핸드폰을 들며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김 반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아파트 방향을 가리켰다.
“봐. 우리 싸움 때문에 전기가 끊겼어. 마정석은 방벽을 유지하는 힘의 원천이지만, 그걸 가능하게 보조하는 건 전기란 말이야.”
“헉, 구조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요?”
“임시 전력으로 건물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단지 안으로 괴물들이 들어갔을 테고, 사람들은 건물 내부에 고립됐겠지.”
지윤은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펄쩍 뛰어올랐다. 신음하던 지호 역시 인상을 찡그리며 김 반장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응시했다. 신체 계열 능력자 특유의 시야로도 잘 보이지 않는다. 눈앞을 가리는 어둠. 보현과 대화하던 헌터가 다른 방향으로 훌쩍 떠나 버리자 지윤은 당황했다.
“뭐야, 병원 쪽에 남아 있다던 헌터 아니었어요? 같이 움직이는 줄.”
“헌터는 아니야.”
“네? 하지만 헌터 복장을…….”
“헌터였던 놈이긴 하지.”
김 반장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그 헌터가 사라진 어두운 골목 쪽을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지금 중요한 건 저 사람이 아니야. 바로 돌아가자. 최소민 헌터가 일어나지 않으니 뛰어가든 날아가든 해야지. 이지호 헌터, 염동력 사용 가능한가?”
할 수 없어도 어떻게든 힘을 짜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염동력 능력자 둘을 돌아본 김 반장은 한숨과 함께 소민을 들어 올렸다.
“숨 좀 돌렸으면 바로 가자. 우리가 여기서 미적거리면 시체만 늘어날 수도 있어.”
휴식이 사치인 시기다. 지호는 눈앞이 허옇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속도를 조절할 새가 없다. 자신을 포함해 헌터들 전원을 허공에 띄운 그는 신호도 없이 출발했다.
아파트 단지는 멀지 않았지만, 지호는 하마터면 헌터들 중 몇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아파트 단지가 보이자 누군가 신음을 흘렸다. 외벽의 방벽이 사라지고, 아파트 단지 부근을 돌아다니는 괴물들만 눈에 띄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보인다 해도 토막 난 시신 일부가 떨어져 있을 뿐이다.
아파트를 향해 빠르게 가까워질수록 1층으로 진입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괴물을 막는 특수 처리가 된 까닭에 외부에서 진입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당황하는 지호의 어깨를 두드린 보현이 자기 집을 가리켰다.
“우리 집 창은 열려 있잖아요. 내가 항상 드나드니까.”
다른 괴물이 그쪽으로 침입한다면 재앙에 가까운 일이 되겠지만, 모든 창을 흔들어 보지 않는다면 그곳이 열려 있다는 것을 파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거의 힘이 다 소진되어 지호는 부드러운 착륙으로 일행을 내려놓는 대신 창을 향해 헌터들을 내던져야 했다. 유리가 깨지지 않고 걸쇠만 망가져 다행이었다. 덕분에 바닥에 험하게 나동그라진 헌터들이 신음하며 바닥을 굴렀다. 심지어 지호는 11층 턱에 걸려 하마터면 아래로 떨어질 뻔하기까지 했다. 간신히 창틀에 매달린 그는 앓는 소리와 함께 가까스로 몸을 끌어 올렸다.
소파에 앉아 있던 보현의 가사 도우미인 정애란은 눈만 휘둥그레 뜬 채 자기 주변에 바닥재처럼 퍼질러진 헌터들을 돌아보았다. 말을 하지 못하는 까닭에 애란은 우선 아는 얼굴을 향해 달려갔다. 보현은 애란의 도움을 받아 몸을 일으키곤 해쓱해진 얼굴로 미소 지었다.
“아, 이모님. 누구랑 부딪히고 그러진 않으셨죠?”
애란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걱정 어린 낯으로 보현의 상태를 살폈다. 애란은 보현이 다친 몸으로 돌아와 치료기에 쓰러져 기절하던 것을 자주 보아 온 사람이었다.
그걸 다룰 줄 알았던 이가 보현의 도우미뿐이었던 까닭에 애란은 베이스캠프가 된 그 집에서 부상자들을 돌보는 역할을 담당했다. 설명을 요구하기엔 당장의 긴 대화가 어려운 사람이었기에, 애란은 다른 사람을 데려오겠다며 황급히 집을 나섰다. 얼마 뒤 그가 데려온 사람은 다름 아닌 승찬이었다. 훤히 열린 창으로 거칠게 바람이 불어 눈을 찡그린 승찬은 가까스로 문을 닫으며 헌터들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무사히 돌아오긴 하셨네요.”
“여기 상황은?”
“보다시피 좋진 않습니다. 갑자기 전기가 나가면서 밖에 있던 사람들이 많이 죽었어요. 건물과 건물끼리도 연락이 안 되고, 그나마 안쪽으로 괴물이 들어오지 못하는 게 다행이라서요.”
“죽었다고요?”
지윤은 허옇게 질렸다. 여기 남아 있었을 하나 때문이다. 승찬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사상자 중에 각성자는 없었습니다. 번갈아 가며 바깥 상황을 지켜보던 민간인 자경대 중 몇 명이 당했고요. 도망치는 데 성공한 사람도 많지만, 방벽이 갑자기 없어지는 바람에 피해가 상당했습니다.”
본래 아파트 주민들은 상황이 좀 나았지만, 근처 거주민들은 마땅히 머물 곳이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나마 일부 마음씨 좋은 주민들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해 준 쪽은 상황이 좀 나았다. 놀이터와 산책로 부근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가장 피해가 컸고, 다른 이들도 우선 살아남았으나 마음이 꺾인 자들이 많았다.
“여러분이 그래도 늦지 않게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외벽 방비는 튼튼했던 모양인데, 건물 현관 잠금쇠가 그리 튼튼하지 않더군요. 정문에서 제일 가까운 101동이 놈들에게 뚫렸거든요.”
김 반장은 신음을 흘렸다. 전기가 끊긴 후에도 당연히 동작해야 할 보호 설비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의 질문에 승찬은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면 다른 건물들도 다 위험했겠죠. 도망치려던 사람이 너무 많아 문이 닫히질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살려 달라는 비명이 들렸다. 유리를 부수며 생존자 한 명을 허리에 끼고 붕 날아오른 주리가 옆 건물 외벽에 매달리는 것이 보였다. 습관적으로 지원 나가려던 지호는 눈앞이 두 개로 나뉘는 감각에 휘청였다. 김 반장은 혀를 차며 아까 닫은 문을 도로 열었다.
“장거리는 효율이 안 나오는데.”
그는 창틀을 짚은 채 주리 뒤로 달려드는 괴물 쪽으로 손을 뻗었다. 지호가 관찰하지 못하는 교전이 벌어졌다. 다행히 정신 계통 공격에 면역이 없는 놈이었는지, 주리를 낚아채려고 앞발을 휘두르던 괴물 하나가 엉뚱한 곳을 휘젓다가 아래로 추락했다. 주리는 주변을 돌아보다 금방 열린 창 쪽 헌터들을 발견했다. 간단한 신호. 도움을 요청하는 모양새에 김 반장은 지호를 돌아보았다.
“대원, 움직일 수 있나?”
“당장은 좀…….”
김 반장이 부정적인 신호를 보내자 주리는 곧 생존자를 고쳐 들고 다른 건물 외벽으로 뛰었다. 묘기에 가까운 기술이었다. 무게가 꽤 나가는 신체 능력자 특성상 발코니나 실외기 같은 것에 매달리면 추락하기에 십상이라 어쩔 수 없었을 터였다.
곡예를 부리며 건물과 건물 사이를 펄쩍펄쩍 뛰어올라 아파트 옥상에 도착한 주리는 그제야 생존자를 내려놓았다. 기절한 지 오래라 차라리 옮기기 쉬웠을 것이다. 김 반장이 다른 곳에서 고군분투하는 헌터들을 지원하기 위해 환상 트랩을 던지려 준비하는 동안, 승찬은 휘청이는 지호를 부축했다.
“지호 씨,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이는데요.”
지호는 대답 대신 손만 대충 휘저었다. 통증 때문에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보현이 치료기에 마정석 필터를 끼워 넣다가 손을 삐끗해 욕을 퍼붓는 동안 지윤은 김 반장을 보조했다. 지윤 덕분에 더 먼 곳까지 힘을 쓸 수 있게 된 김 반장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놈들의 머리를 집중적으로 노렸다. 날개 퍼덕이던 것들이 건물에 부딪쳐 깩 소리와 함께 추락했다. 승찬에게 몸을 기댔을 때 마정석들이 달그락 소리와 함께 존재를 상기시켰다. 지호는 몇 시간쯤 전에 도훈을 만났던 곳에서 수확했던 마정석들을 뒤늦게 떠올렸다. 진작 생각해 냈어야 했다. 전기를 끊어 가며 무리할 필요까진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다. 근육을 움직이는 것만도 힘에 부쳐, 지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저씨, 제 주머니에서 마정석 좀 꺼내 줘요.”
“네? 어느 쪽에…….”
“뒤져 봐요. 오른쪽에 있을 거예요.”
헌터 전투복에 익숙지 않은 승찬은 머뭇거리며 주머니가 있을 법한 위치를 더듬었다. 찢어진 전투복 아래로 사람의 살이 아닌 부위가 손바닥에 닿는다. 그는 움찔하며 놀랐으나 떨며 다른 쪽으로 손을 움직였다.
다행히 오래 지나지 않아 투명하다 못해 뒤가 비칠 정도로 순도 높은 마정석을 찾은 그는 보현 쪽을 돌아보았다. 본래 마정석 필터에는 정제된 가루를 쓴다. 그건 기본 상식이었다.
그러나 당장 필요한 치료기는 보현이 사용하고 있었고, 승찬의 손에 들린 건 가루가 되기 전의 마정석이다. 지호는 손바닥을 펴며 단호히 말했다.
“저한테 줘요.”
신체 계열 능력자라 마정석을 가루로 만들 수 있는 것일까. 승찬은 별 의심 없이 지호의 손바닥에 마정석을 놓아 주었다.
그의 예상은 틀렸다.
에너지원이 될 것과 바로 접촉하기 무섭게 지호의 몸은 마정석에 담긴 이형 에너지를 빠르게 빨아들였다. 기화되는 것과 비슷한 느낌으로 마정석이 사라지는 장면을 목격한 승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호는 재차 요구했다.
“몇 개 더 꺼내 줘요.”
마정석을 대여섯 개는 더 흡수한 뒤에 정신을 차린 지호는 승찬에게 기대어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따로 챙겨 두었던 마정석을 대부분 회복하는 데에 사용하면서도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경악한 승찬의 표정을 본 지호는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방금 그건 도대체…….”
“제가 반쯤 괴물이 되어서 그럴 거예요. 놈들 에너지의 근원이잖아요.”
지호는 말을 둘러대며 고군분투하는 김 반장 옆을 지나 밖으로 뛰어나갔다. 다시금 충전된 에너지 덕분에 아파트로 돌아올 때보다 훨씬 속도가 빨랐다. 매섭게 날아가 외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놈을 격추한 지호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지호 헌터 지원 나왔습니다! 엄호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