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계획이라고?”
“그래. 이 헌터가 살아 있어야만 가능한 방법이지.”
보현은 준우가 지호를 구하며 꺼냈던 계획에 관한 이야기를 상기했다. 그가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준우는, 지호가 깨어났는지 눈짓하며 보현의 손을 도로 붙잡아 내린 뒤 보현에게 몸을 기울였다. 귓가에 닿는 숨에 목덜미가 찌르르 울렸다.
괴물들의 계획을 전해 들은 보현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거 너무 위험…….”
“위험한 게 죽는 것보다는 나아.”
보현은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를 향한 불신 역시 차올랐다. 이토록 쉽사리 누군가를 죽이자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때 많은 이들을 구하던 그의 파트너의 옛 모습을 겹쳐 보기 어려워졌다. 보현은 한 걸음 물러났다.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 세상이 지옥으로 변한 지는 십 년이 넘었지만, 어떻게든 발버둥 치면서 살아남으려고 애썼는데. 그 시간이 다 무용한 것처럼 느껴지다니.”
“이 균열에서 나가면 헌터 일 같은 거 그만둬. 너한텐 너무 위험한 곳이야. 은퇴했다고 들어서 안심했는데, 여기서 널 봐야 하는 내 심정을 좀 생각해라.”
“지랄한다. 누구한테건 위험하지만, 힘 있는 사람이 해야 하니까 이 일을 했던 거잖아. 괴물 새끼 되더니 잊어버렸냐? 뇌까지 표백됐어?”
“분명 옳은 일이니까 헌터 일을 했었지. 하지만 네 말처럼 이 꼴이 된 지금까지 그럴 필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사실 저 헌터를 죽이는 거야말로 쉬운 해결책인데.”
준우는 건조하게 말을 읊으며 보현을 응시했다. 쉬운 해결이라고 말을 뱉는 그 입술이 미워, 보현은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너 정말 괴물처럼 지껄이는구나.”
“아까도 말했잖아. 어떤 결과가 있다 한들 내가 다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걸 너도 알고 있을 거라고. 그나마 마음 한구석에서 너를 향한 감정이 사라지질 않았으니 여기서 주절거리고 있기라도 한 거야. 사실 너 이외의 다른 인간이 내게 의미가 있던 시절은 애초에 끝났어.”
보현은 으득 이를 갈았다. 준우는 정말로 괴물처럼 이야기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사실 사람인 부분을 찾는 것이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옛 추억이 눈을 가리고, 그리움이 귀를 막았다. 그랬었다는 이야기다.
느릿하게 벗겨지는 감정의 베일을 느끼며 보현은 준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거기에 준우가 있었지만, 옛 준우는 없었다.
보현은 상실감을 느꼈다.
한때 준우는 그 모든 행동의 이유에 보현을 두는 사람이었다. 대균열에서 살아 돌아온 후, 그들 사이는 단순히 연인 관계라고 치부하기엔 좀 더 긴밀하고 각별한 사이로 발전했다. 삶이 워낙 각박해 가슴 뛰는 상황들은 사랑의 설렘보다는 죽음의 공포 때문일 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 힘이 되는 사람이 함께 있었으니.
그러나 돌아온 준우는 보현이 그리워하던 모습을 상당 부분 잃은 채였다. 보현은 거기에서 퀸 패러사이트의 힘으로 움직이는, 그 증오스러운 괴물의 충실한 종복이 된 괴물을 더 많이 볼 수 있었다.
“네가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을 했어.”
보현의 속삭임을 지척에서 들은 준우는 묘하게 슬픈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바로 저 눈. 저 시선이 보현을 헷갈리게 했다. 그러나 그토록 그리웠던 눈으로 준우는 보현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나는 죽지 않았지만, 네가 알던 어떤 나는 죽었다고 봐야겠지.”
“그럼 내 앞에 있는 놈은 퀸 패러사이트의 부하일 뿐이냐?”
“네가 그렇게 보고자 한다면.”
보현은 거칠게 준우를 밀쳤다. 신체 계열 능력자 특유의 단단한 몸이 보현이 떠미는 대로 밀려나 주었다. 당연히 그렇게 해 준 것일 테지. 보현은 이를 악물었다. 그 와중에도 어떤 부분들은 부정할 수 없는 준우였다.
“그럼 내가 예전의 너를 원한다면?”
“그러지 마.”
“뭐?”
“어차피 우리가 만나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일 테지. 그러니 이 균열 이후로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 아마 머지않아 그렇게 되겠지만.”
보현은 뚜벅뚜벅 걸어가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웠다. 손잡이를 쥐자 이형 에너지로 코팅되어 날카로워지는 명은의 발명품. 그 날 끝으로 준우를 겨눈 보현은 서늘하게 말했다.
“왜 그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지? 어차피 퀸 패러사이트의 부하 된 괴물 새끼라면 그냥 내 손으로 죽여 버리는 편이 나은 거 아닌가?”
말을 뱉으면서도 보현은 준우가 뭐라고 대답할지 알 것 같았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준우가 천천히 보현 앞으로 걸어왔다. 바로 뻗은 칼끝, 조금이라도 더 다가오면 찔려도 이상치 않을 거리까지 온 그는 담담히 말했다.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
“도준우.”
“하지만 나를 죽이기 전에 한 가지는 알아 둬. 여왕과 반목하는 괴물들은, 그들이 여왕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다고 하면 그 재앙에 맞서는 대신 다른 방법을 택할 거야. 그리고 최근, 어떤 특정 헌터 하나가 그 방법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지.”
“뭐라고?”
“그 헌터는 운 나쁘게도 어떤 사고 때문에 균열을 넘어가게 됐지. 하지만 괴물들의 세계로 넘어온 적 있던 여느 헌터들과 달리 자기 힘으로 거길 빠져나갔어. 괴물들에겐 놀라운 일이었지. 애당초 균열 경계를 지나는 인간들은 자기들 세계로 돌아가는 게 모두가 아는 규칙이었잖아. 그걸 깰 수 있는 존재가 있단 게 얼마나 놀라운 일이야?”
보현은 어렵지 않게 준우가 말하는 그 헌터라는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지호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래서 말했잖아. 제일 쉬운 방법은 저 헌터를 죽이는 거라고. 여왕은 저 세계 건너편에서 이 헌터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단 말이야. 그래서 악성 균열이 여기에 열렸고. 하지만 이 헌터가 없으면, 그가 감지할 특정한 대상이 없으면 악성 균열이 열리는 일은 한참 뒤로 미루어지겠지. 운이 좋다면 여왕이 너희 세계에서 눈을 돌려 다른 곳으로 떠날 수도 있어. 다른 존재의 몸을 통해야 하니, 간섭하기 좋은 세계는 아니니까.”
“다른 세계가 있……. 아니, 그 헌터에 대해 뭘 알아?”
준우는 보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 솔직한 얼굴을 응시하던 그는 갑자기 말을 돌렸다.
“내 주인은, 여왕이 그러하듯 자기 숙주와 동화하여 그 기억을 일부 읽어 낼 수 있어. 그 방법으로 그는 어떤 헌터가 균열을 넘어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보현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이 새끼 알고 있었어? 그걸 퀸 패러사이트한테 물어다 바친 것도 너야?”
“불가항력이야. 내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
“그럼 놈들이 당연히 나를…….”
“그 헌터를 노리겠지.”
보현은 준우의 표현에 집중했다. 준우는 다시 만나게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보현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것을 깨닫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보현은 자기도 모르게 준우의 말을 흉내 냈다.
“그 헌터를.”
“그래. 놈을 먼저 찾아낸다면 괴물들은 이 계획을 실행할 필요 없이 이 세계를 떠날 거야. 그리고 자신들의 뒤를 따라오지 못하게 이지호 헌터를 죽이려고 들겠지. 하지만 그 헌터를 찾지 못한다면 놈들에게 이지호 헌터는 중요해져. 여왕을 끌어들일 미끼가 될 테니까.”
보현은 숨을 죽였다. 그를 겨눈 채 흔들리던 칼끝이 힘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네 기억을 읽는다던 퀸 패러사이트가 그 헌터의 얼굴을 모를 수가 있어?”
“괴물들이 인간의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이상하게 들리지는 않겠지. 아무리 많은 인간을 먹어도 괴물은 괴물이고, 신체 구조상의 특징을 온전히 구분하고 파악할 만큼 먹잇감에 관해 자세히 알지도 못해. 맛있는 부위가 어디인지 정도나 관심이 있지, 먹을 것과 대화하는 악취미를 가지는 경우는 드물거든.”
“하지만 기억을…….”
“읽는다 해도 소용없을 거야. 내게 남은 그 헌터의 기억 중 대부분은 웃는 얼굴이었지. 미소 짓고, 행복해하고, 즐거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 대부분은 좋은 인상들일 거고. 지금처럼 괴물을 앞둔 채 곧 달려들 것 같은 헌터의 것이 아니라. 말한 것처럼 괴물들은 인간의 표정을 잘 분간하지 못하지. 그것이 인상을 바꿀 정도의 차이를 부르는 감정들이라면 더더욱.”
보현은 할 말을 잃었다.
그가 괴물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느꼈던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발목까지 들어차 보현을 어지럽게 흔들었다. 그러나 괴물이 된 지금도 보현을 바라보는 준우의 시선은 사람일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를까. 사랑?
고작 그런 단어들로 그 감정들을 설명할 수 없었다. 턱없이 부족했다. 그 순간 보현은 지호가 보였던 무수한 행동들을 이해했다. 괴물로 변한 이들을 사람이라고 외치며 그들을 변호하려던 지호의 행동은 지극히 당연했다. 아마 실종자 가족들의 심정 역시 그러하겠지. 돌아온 준우를 마주하고 그 괴물로서의 면모를 본 이후에도, 보현은 준우를 온전히 외면하지 못했다.
보현에게 준우는 여전히 사람이었다.
그토록 큰 애정을 받은 일이 없고, 이후로도 그럴 것이다. 서로를 삶의 목적 삼아 함께 걷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비록 그때와 방식도 장소도 다르지만, 준우는 여전히 그의 파트너였다.
보현은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그때, 지호가 신음을 흘리며 깨어나 두 사람의 주의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준우는 서둘러 지호의 상태를 살폈다. 지윤의 힘으로 조금이나마 회복되던 신체가 도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준우는 혀를 차며 지호의 상처 부위에 손을 얹었다. 지윤의 것과 비교하자면 미약한 수준의 녹색빛이 그의 손을 타고 지호에게 흘러갔다.
“게다가 그 기억들은 괴물이 된 내가 아니라 인간일 적의 도준우가 가졌던 기억이야. 주체도 객체도 다르니 쉬이 그 인간을 찾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겠지. 하지만 너를 만나고 말았으니 이후로 주인이 내 기억을 훑는다면 뒤를 장담하기는 어려울 거다.”
보현은 괴로운 표정으로 준우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부당한 명령은 거절해 버려.”
“뇌가 내리는 명령을 팔이 거부할 수 있나? 때가 오면 어쩔 수 없어. 나는 너를 공격하는 팔이 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오랫동안 너를 피했지.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 나 버렸네. 시간이 얼마 없어. 이지호 헌터가 회복되는 대로 우선 네 동료들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 아마 주인의 형제가, 그러니까 도플갱어라고 부르던가? 그 괴물이 먼저 이 헌터에게 접촉할 거야. 그 이후는 아슬아슬한 줄타기겠지. 하지만 적어도, 놈들이 당장 이 헌터를 죽이려 드는 꼴은 보지 않아도 될 거다.”
“도플갱어와도 협조하고 있다고?”
“그쪽과 협조하는 건 내 독단적인 결정이야. 주인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일이고. 만약, 계획을 진행하는 중에 내 눈이 붉은색으로 변하며 주인이 이 몸을 지배하게 될 때가 온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 그 순간 주인은 내 기억을 온전히 읽어 내겠지. 그리고 그 헌터가 누구인지 명확히 알게 될 거고.”
보현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이다 간신히 질문했다.
“너는?”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해야 할 일을 해야지.”
“그러고 나면, 우린?”
“우리라는 대명사로 다시 묶일 날을 만들기 위해 발버둥 쳐 봐야지.”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혼란 속에서 보현은 숨이 막힐 것 같은 얼굴로 준우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에게 등을 보인 채 무방비하게 몸을 낮춘 모습. 언제고 찌를 수 있는 넓은 등이었다. 그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과 동시에 달려가 끌어안고 싶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보현은 아까 여왕 앞에서 정신 차리려 했을 때처럼 자기 뺨을 쳤다. 미친 생각이었다. 실종자들이 괴물이 되었다고 했을 때 누구보다 목소리 높여 반대했던 주제에. 기준은 엄정하고 분명해야 했다.
그러나 준우가 여전히 사람이라고 느껴진 그 순간에 왈칵 피어오른 안도와 기쁨 때문에 보현은 저 뒤에 칼을 찔러 넣을 수 없었다.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