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지호의 목소리는 작았으나 의지는 명확했다. 각성자는 지호를 흘깃 보곤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어두운 탓에 표정이 잘 보이지 않으리라 오해하는 것 같았지만, 지호는 그 생각을 정정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차라리 어두워서 다행일 수도 있었다. 지호는 본인의 앳된 얼굴이 이 사람을 안심시키기보다는 불안하게 하기 좋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까 헌터님이 괴물한테 하는 이야길 들었어요. 내려갈 수가 없어서. 밑에 괴물이 돌아다니거든요. 그러니까, 알죠? 밑에 괴물들이 사람들을 다 죽였어요. 시체가 사방에 있어요. 그래서…….”
“밑에도 괴물이고 위에도 괴물이라 무서우셨어요.”
“맞아요. 그쵸. 근데 그 괴물이 하는 이야기가 너무 이상했어요. 헌터님도 괴물한테 먹혔나요? 어디 다치신 것 같지는 않거든요. 그러니까,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죠? 요즘 헌터웹에 흉흉한 소문 많이 올라왔잖아요. 남의 모습을 훔치는 괴물 같은 것들……. 제 말은…….”
지호는 횡설수설하는 각성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헌터웹. 이름만 들으면 헌터들이 이용하는 사이트 같지만, 실상은 비각성자들이 온갖 헛소문과 잡다한 정보들을 주워들으러 모이는 별것 아닌 사이트 중 하나다. 어디서 소스가 흘러 나가는지 가끔 그럴싸한 정보가 끼어 있기도 했다.
지금처럼.
“도플갱어 이야기가 일반인들에게 퍼졌나요?”
“이런 젠장, 맞아요, 그 이름이었어. 어떻게, 이게 사실이에요? 균열에 남의 모습을 훔치는 괴물이 있단 거요. 그래서 사람들이 서로를 믿지 않고 문도 안 열어 주고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서로를 공격하고 그랬단 말입니다.”
신뢰가 무너진 사회는 문명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균열에 휘말려 헌터들과 구조대가 오기를 기다리며,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일까. 괴물에게서 살아남는 동안 등진 타인은 몇이고, 모른 척 잠근 문 너머에서 죽어 간 사람은 몇일까.
지호는 그들을 비난할 생각이 없었다. 힘이 없으니 숨는 건 당연하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남을 도울 수도 없을 테지.
그리고 이 사람은 어차피 각성자다. 헌터가 되지 않더라도 기본적인 것 정도는 배울 테고, 언젠가 그들에게도 코드 레드 개체들의 정보가 공유될 것이다. 그래서 지호는 그 사실을 숨기는 대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 어마어마한 놈이 흔한 건 아녜요. 놈을 쫓아 최정예 헌터들이 움직이고 있으니 너무 염려 마세요. 여긴 없었어요.”
“하지만 괴물이랑 이야길 하셨잖아요. 괴물은 사람 말을 못 한다고요.”
지호는 난처한 기색으로 고심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더 어려웠다. 차라리 약간이라도 배경지식이 있는 사람이면 좋았을 것을.
지호는 그가 처음 각성자가 되었을 때 왜 그렇게들 사방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지 이해했다.
“나중에 배우면 알 수 있을 거예요.”
박 팀장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좌표를 불러 주자 그가 창백한 얼굴로 근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진짜 죽을 것 같은 얼굴이라 농담 건넬 마음조차 사그라들었다. 물론 박 팀장은 평소처럼 빙그레 웃으며 농을 걸어왔지만.
“지호 씨. 멀쩡하네. 진짜 다친 데 없고.”
“이형 에너지 계열 새 각성자예요.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요. 보자, 미등록 각성자 발견 시에 해야 할 거 다 한 것 같죠? 방벽 치고 보고 올리고 구조 후 동행.”
“사태 마무리되면 시간 좀 내요. 방호복 뒤로 구매한 놈 중에서 심상치 않은 것들이 있었어요. 실마리 잡아 가던 중에 이 지경이 돼서 지금은 좀 어려운데, 아무튼 나중에 같이 좀 가요. 지호 씨의 무력이 필요해요.”
“얼마든지요. 혹시 이 사태 범인일까요?”
“알 수 없죠. 아직은요.”
박 팀장은 최대한 단서를 흘리지 않도록 이야기를 줄이며 떨고 있는 새 각성자를 인계받았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호를 쳐다보지 못했다. 지호를 도플갱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터무니없는 오해를 받아 본 적이 없어 지호는 해명하기를 포기했다. 길게 말하면 변명 같을 거고, 아무 말 않으면 수상할 것이다. 하지만 배우면 대충 알게 되긴 하겠지. 도플갱어에 대해서까지 배울 순 없을 것이다. 아직 정보가 모자라니까.
그나저나 헌터웹. 별의별 정보가 다 올라온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진짜배기 중에서도 헌터들 사이에서까지 취급 주의 정보인 코드 레드 괴물들 이야기까지 올라가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것도 한가해지면 알아봐야 하나. 할 일이 너무 많고 시간은 없었다.
김서영 헌터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파트 단지에서 소대 단위로 인원을 쪼개 이동하기로 했다고. 단지가 균열 경계에 가까워서 군인들의 호위하에 생존자들이 모두 탈출할 수 있었다는 말도 들었다.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몸은 몹시 피곤하다.
여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연신 전투를 겪었다. 피로가 누적되어 몸이 무거웠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도 지호는 서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지호 : 나머지 인원 한 번에 데려와요. 놈은 처리했어요.]
서영이 표시되는 곳은 몇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위치였다. 아까 그 괴상한 놈을 제외하면 괴물들이 기어들어 오지 않는 안전거리 내. 지호는 각성자 연합으로 가는 길목과 아파트 단지 사이의 직선거리 중간쯤에 서서 합류를 기다렸다.
많은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웠으나, 침묵과 고요로 가득 찬 균열 공기가 이때만큼은 반가웠다. 멀리서 군인들이 뜀걸음 해 오는 것이 보였다. 겁에 질린 얼굴에 무거워 보이는 군장. 척 봐도 힘겨워 보였다.
“아까 그 괴물을 잡은 거예요? 잡을 수는 있었나?”
“놈이 자살했어요.”
서영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지호는 그 이상 설명하기 어렵다며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군인들 보는 앞에서 처음 나타난 괴물의 형질적 특징에 관해 논할 수는 없었으니까.
“호위 요청을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헌터님. 각성자 연합으로 가서 주요 인물들을 보호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군인들이 왜 무리하게 어둠 속 행군을 강행했는지 알게 되었다. 아마 명은을 비롯한 장인들이 무사한지 궁금했겠지. 그러고 보니 피해 상황 파악은 제대로 못 했다. 다들 쉬는 게 우선인 것 같아서였다.
“장인분들도 싸우느라들 많이 다쳤어요. 지금은 쉬고 있고요. 이 인원이 다 들어가면 너무 좁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분들을 데리고 균열을 빠져나오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이런, 대규모 이동이 되겠는데.”
“최우선 보호 대상은 장인들뿐입니다.”
중대장이 조그맣게 덧붙이는 말에 서영은 헛웃음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럴 줄 알았어. 어쩐지 이쪽에만 군인들이 빨리 투입되더라.”
“민간인들은요?”
“특수 부대가 아닌 한 괴물에게 유효타를 먹일 순 없습니다. 저희 저지력으론 다수를 보호할 수는 없고요. 구조대가 후발대로 준비 중입니다. 저희는 우선 투입되어 주요 인물들을 먼저 데려가고…….”
“데려갈 거면 다 데려가야죠.”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도 최대한 많은 사람을 구해 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걸음이 빨라졌다. 누가 중요하고 누가 덜 중요하고, 목숨에 경중이 있을까. 다들 살고 싶어 바둥거리고들 있는데.
연합 입구에 도착하자 버스를 부수려고 펄쩍펄쩍 뛰고 있던 괴물들이 뭔가에 찔린 듯 놀라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눈대중으로 가늠해도 그렇게 멀지는 않다. 처음보다는 많이 가까워진 것 같았다. 놈들은 지호의 눈치를 보며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오려는 몸짓을 보였다.
지호는 당연히 앞으로 걸음을 콱 내디디며 위협적으로 에너지를 흘렸다. 괴물들은 단박에 몇십 미터는 더 달아났고, 군인들은 어둠 저편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들에 당황하며 무기를 쥐었다.
“괜찮아요. 가까이 오진 않을 거예요. 지금은요.”
어두울 때 이동하는 게 낫다는 덕팔의 말은 조금 다른 방면으로도 이해가 갔다. 놈들의 꼴을 보니 앞서는 놈을 쫓아 우르르 휩쓸리고 단체 행동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앞에 보이는 것만 보고 무작정 달려드는 머리 나쁜 놈들도 있기 마련인데, 그런 놈들이 사람이 보인답시고 내달리기 시작하면 얼결에 한 무리가 이쪽으로 올 수도 있었다. 그 정도가 되면 지호 역시 막기 어려울 터였다.
“쉴 새도 없이 바로 이동하겠네요. 피곤들 하시겠지만, 여기 남은 사람이 좀 많아서요. 서두르죠.”
지호를 가운데 두고 사람들을 옮기는 쪽이 좀 더 효율적이긴 할 것이다. 그러나 지호는 괴물들이 자기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전달하기 어려웠고, 그 말을 사람들이 믿을지도 확신할 수 없어 군인들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헌터 한두 명보다 무장한 집단이 훨씬 더 든든한 법 아니겠나.
그러나 모두에게 군인을 믿으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애초에 그들이 괴물을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장인들의 대표로 선경이 나섰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었으나 그는 꼿꼿하게 버텼다. 군인들이 경계까지 호위할 거라는 말에 선경은 앳된 얼굴의 청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지호에게 속삭였다.
“장인들만 데려가고 싶어 했겠지. 전례가 없던 것은 아니었어. 부평은 균열에 잘 휩쓸리는 구역이라서. 아마 한 번 갈라진 틈새가 이공간과의 간섭을 손쉽게 만드는 모양이지.”
“생존자들 모두 데려갈 수 있을 거예요.”
“고작 헌터 두 사람으로? 아니면 지친 연합 사람들을 믿는 거냐?”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저를 믿어 주세요. 괴물들이 제 사정거리 안으로 안 들어오더라고요.”
“경계 저편에 다녀온 이후부터?”
지호는 어색하게 웃었다.
“대충 비슷해요. 원인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사람들 구하는 데는 유용할 거예요.”
“원인을 알아내는 건 나중에 해도 돼. 그게 사실이면 서둘러 움직이자. 어두운 쪽이 움직이기 좋겠지.”
선경은 예리하게 상황을 파악하곤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때까지 잠들어 있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던 사람들은 허겁지겁 짐을 챙겨 떠날 채비 하느라 갑자기들 바빠졌다. 덕팔은 선경의 설명을 전해 들으면서도 지호를 향해 던지는 근심 어린 얼굴을 거두지 못했다.
아마 위험하다고 말하고 싶겠지. 지호가 아는 덕팔은 그런 사람이다. 또 혼자서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걸린 목숨이 워낙 많다. 그런 잔소리는 생존 앞에서 사치스러운 행동일 뿐이다.
이백여 명 가까운 중대 인원에 각성자 연합 사람들, 그리고 부근에서 도망쳐 온 일반인들까지 더하자 수가 오백여 명이 넘었다. 지호는 근심을 숨기려고 일부러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어둠 너머를 끊임없이 확인했다. 괴물들이 내던 간헐적인 소리가 사라지고 균열이 완전한 고요에 접어든 까닭이다.
지호의 경험상, 균열은 고요할 때 더 위험하다.
몸을 숨기거나 피해야 할 놈이 있다는 뜻이니까.
대인원이 이동하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경계 부근에 도착했을 때 경계 저편에서 잡히는 감각이 지호의 덜미를 쭈뼛 서게 했다. 지호는 곧장 서영의 손목을 붙잡았다.
“서영 씨, 다른 방향으로 가야 돼요.”
“네? 왜요? 안 보이는 괴물 있나?”
“경계 너머에 뭔가 있어요.”
서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신체 계열 능력뿐인 헌터는 저도 모르게 자세를 낮추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연히 보이는 건 없다.
“위험한 놈일까요?”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느껴지는 기척은 하나다. 크기는 사람에 가까운 것. 경계로 다가설수록 사람들이 조금씩 긴장을 풀었다. 안도하는 얼굴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던 지호는 정지 신호를 보냈다. 중대장이 지호의 신호를 보고 군인들을 멈춰 세웠다. 사람들도 함께 멈추며 뭐야, 뭐야 하고 술렁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앞에 뭐가 있어요.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거의 다 왔는데요?”
타당한 의문이었다. 지호는 자기 감각을 설명하는 대신 경계 앞부분 지면을 염동력으로 폭발시켰다. 뻔뻔히 자작극을 저지른 뒤 그쪽을 손짓한 지호는 또박또박 말했다.
“저기, 뭐가 있다고요.”
중대장은 두 번은 토 달지 않았다. 군인들의 인솔에 따라 사람들의 방향이 틀어진 뒤, 지호는 서영에게 속삭였다.
“저는 여기 앞에 있어야 돼요. 괴물들이 측면에서 올 수도 있으니까 경계 부탁해요.”
“이렇게까지 안 보이는 걸 보면 어디들 몰려간 거 아닌가 싶은데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럼 거기 있는 사람들이 위험한 거잖아요. 괴물들끼리 싸우는 상황일 경우였으면 좋겠네요. 경계 저편에 있는 놈이 거의 다 넘어왔어요. 뭔지 몰라도, 안 되면 바로 튈게요.”
서영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군인들 앞으로 달려갔다. 지호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온몸에 방벽을 둘렀다. 정신 계열 괴물만 아니기를. 다른 것들은 다 상대할 수 있었지만, 그것들은 아니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흰빛. 경계 저편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하얗게 점멸했다. 사람 형태다. 빛이 꺼지자 천천히 모양새를 갖춘 그것은 방호복이었다.
판교 균열에서 사라졌던 여자가 생각났다. 방호복 안면부 덮개가 깨진 채다. 이형 에너지 차단 효과는 없겠는데, 하고 생각하던 지호는 이를 악물었다.
깨진 헬멧 안에는 머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