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무서운 소릴 아무렇지 않게 뱉은 명은은 아차 하고 입을 막았다.
“나도 모르게 임 헌터랑 비슷한 농담 하네. 위험한 사람이에요. 조심해요.”
“언니가요?”
명은은 심각한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같이 있다 보면 그 이상한 면을 닮게 된다니까? 그렇게 인간적인 사람이라 비인간적인 면모 하나는 필요했던 건지, 아무튼 농담 포인트가 좀 이상하잖아요. 그쵸?”
“저만 그렇게 느끼는 건 줄 알았어요.”
“다들 적응해서 대충 흘리는 방법을 터득한 거예요. 잘 관찰해 봐요. 혹시 우리 각성자 연합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이 보현 씨! 하고 부르면 그 사람은 그 농담에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는 거라니까. 우리 흉내 내면서. 보통은 임 헌터, 임보현 헌터 하고 부른다고요. 헌터의 대명사 같은 사람이니까.”
“언니가요?”
똑같은 질문을 좀 전에도 했던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명은은 난잡하게 어지럽혀진 책상 위를 황급히 정리하며 대꾸했다.
“어. 1세대에서도 유명한 헌터니까.”
“처음 알았는데…….”
“각성자들 사이의 이야기라서 그렇죠. 일반인들한테 유명한 헌터래 봐야 뭐, 유튜브 하는 그런 헌터들 정도 아니겠어요? 구독자 되게 많던데.”
“저도 챙겨 봤어요. 생존 방법 같은 거 알려 주는 채널도 있고 그렇던데. 저 그거 보고 시험 준비도 했었는데.”
“이쪽 계열 일 하려고? 특채로 들어온 셈이네요. 결과적으로는.”
명은은 껄껄 웃으며 책상의 도면과 설계, 만들던 것으로 보이는 도구들과 완성된 것 같이 생긴 물건들을 모두 쓸어 버렸다. 와르르 상자로 떨어지는 것들을 불안하게 쳐다본 지호의 시선을 뒤늦게 눈치챈 명은은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뭐 별거 없어.”
“뭐 만드시는 거예요?”
“아, 이거 정제된 마정석을 건전지처럼 넣어서 쓰는 건데요. 짜잔!”
집어넣으려던 도구에 마정석을 끼워 넣은 명은의 손바닥 위가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줄 하나 연결된 것 없다. 보통 마정석을 쓰는 기계들이 전력에 어느 정도 의존하면서 핵심 기능 정도만 마정석의 힘을 빌린다는 상식과 철저히 반하는 물건이었다. 지호는 입을 쩍 벌렸다.
“와, 이런 건 어떻게 만들어요?”
“관심 있어요? 내 도제 자린 다 찼는데 어쩐다.”
명은은 윙크하며 마정석을 도로 뺐다. 작은 태양 같던 빛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실내가 갑자기 어두워진 기분이었다. 충분히 밝은 곳인데도 그랬다. 명은은 손바닥으로 눈 덮는 시늉을 하며 따라 하도록 시켰다. 몇 초 정도 그러고 있다가 손을 떼자 본래대로 환하고 밝은 실내였다.
“사실 공격용으로 개발하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을 받는 기술인데 이건 뭐 아군이고 적군이고 가리지 않고 공격하는 눈뽕이라 안 되겠더라고요. 광도를 좀 낮춰서 광산 같은 데서 전선 없이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여러모로 들여다보는 중이랍니다. 신기하죠?”
지호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에 명은은 이것도 구경해라, 저것도 구경해라 하며 제 발명품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진귀한 물건들이 사방에 가득한 탓에 지호는 하마터면 헌터 일 관두고 이쪽 일을 알아보면 어떨까 고민을 시작할 뻔했다.
“저는 각성하기 전에도 이공 계열이었거든요. 좀 큰 기업에서 연구 개발 일을 했어요. 그 전공 살려서 이쪽 일 하는 건데, 이공계 쪽 나오면 그래도 어렵지 않게 이쪽 길로 빠질 수 있어요.”
“아…….”
보현이 천재라고 지호를 칭찬해 주었던 그 어떤 능력도 이런 머리를 트이게 해 줄 수는 없다. 그는 어설픈 미소와 함께 발명품들을 내려놓았다. 평범한 사람이 갑자기 슈퍼 파워를 얻어도 보통은 스파이더맨의 일에 도전할 수 있지, 아이언맨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 능력이 아무래도 전투 쪽에 많이 치우친 것 같아요. 이런 건 아는 게 많아야 할 수 있잖아요…….”
“뭐, 아는 것만 있으면 능력이 없어도 도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금 더 많은 각성자들에게 매력적인 직업인데요! 일반적으론 지호 씨가 말하는 그 능력이란 게 부족하기 마련이라서.”
명은은 헌터 전투복을 입고 있는 소심한 임시 각성자를 보며 씩 웃었다. 이번에 꺼낸 건 진짜 전투용 물품이었다.
“이건 지호 씨한텐 필요 없는 물건인데, 일반적인 전투 계열 헌터들이 많이 사용하는 무기예요. 여기에 이형 에너지를 흘려 내 봐요. 천천히요.”
“어, 어떻게 하는 건데요?”
명은은 지호가 이제 막 전투 훈련을 시작한, 그것도 에너지를 화살 모양으로 쏘아 내는 훈련을 받기 시작한 지 며칠 된 것이 전부인 햇병아리 헌터 지망생이란 걸 알고 당황했다.
“어, 음. 임시인 건 알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 훈련은 받았을 줄 알았어요. 그 전투복은 그렇게 쉽게 내주는 게 아닌데.”
“급성 균열 터진 현장에 다녀왔어요. 다른 헌터분들은 다 그쪽으로 파견되거나 파견 예정이거나 해서 한동안은 훈련이 없을 거래요.”
“아, 교대 쪽? 학교 방면이라 안 그래도 걱정들 하던데 거기 다녀왔어요? 뭐 할 수 있는 게 있나?”
“사고 칠 수는 있었던 것 같아요…….”
지호는 시무룩해졌다. 거기에서 있었던 일을 듣고 지호의 뒤통수를 친 남자의 생김새를 대강 들은 명은은 잠시 기다려 보라며 벽면 한쪽을 두드렸다. 빈 벽인 줄 알았던 공간에 웬 시스템 인터페이스가 떠올랐다.
“어디쯤이더라. 어, 오늘 계양구에 뜬 급성 균열 파견자 명단 띄워 봐.”
지호의 눈이 동그래졌다. 수백 명의 이름이 순식간에 명단을 채운 까닭이었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해요?”
“얘들이 다 우리한테 무기며 방어구며 받아 가니까 신상 정보 제공 정도는 하거든요. 그걸 데이터베이스화 해서 여러 가지에 쓰는데, 그중에는 범죄 예방과 범죄자 추적 기능도 있답니다. 우리 임 헌터가 보호하는 꼬마 친구를 괴롭힌 못된 아저씨가 누군지 볼까요?”
명은은 빠르게 목록을 추렸다. 신체 강화 계열 제외, 여성 제외, 풋내기 제외.
“마지막은 뭐예요?”
“뭐 숙련된 헌터니 운운하면서 가르치려고 했다면서요. 진짜 초짜는 얼어 있거나 시키는 것만 할 테니 이제 막 임시 이름표 뗀 놈이 그런 짓을 할 리는 없지. 어느 정도는 책임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헌터뿐 아니라 모든 각성자는 생긴 거로 나이를 유추하는 게 무의미하니까 나이대는 추리기가 어려워요. 보자, 인상이 좀 험악했나? 키는 어때요?”
지호가 읊은 신상 정보로 몇 명의 사진이 떴다. 그중 그 남자가 있었다. 지호가 저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하자 명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 이 새끼였어요? 꼰대한테 걸렸네. 아니 뭐, 잘했다는 건 아닌데 그래도 애를 그렇게 괴롭힐 것까지 있나.”
간략히 투덜거린 명은이 남자의 신상 정보를 간단히 읊었다.
“이쪽은 김동주. 2세대 헌터고 정신 계열 능력자예요. 괴물보다는 사람한테 잘 쓰이는 능력이라 보통은 문제아들 상대하러 다닌다고 알고 있고요. 그래서 손도 막 나가고 입도 험하고. 뭔가를 통제하는 데 폭력을 쓰는 게 익숙한 사람인데.”
“다른 각성자분들도 서로 이렇게 남의 정보 막 열어 볼 수 있나요?”
“공개된 정보라면요. 임시 떼고 정식으로 등록할 때 본인 능력 공개 여부 정할 수 있고요. 원치 않으면 능력 비공개하는 사람도 많아요. 근데 이렇게 정신 계열 쪽은 다 정직하게 자기 능력 까놓고 시작하죠. 나중에 백안시당하기 쉽거든요.”
“왜요?”
“그런 능력 숨겼다가 남한테 무슨 짓 하려고? 하는 소릴 들어서 그렇죠. 사실 뭐, 그렇게 따지면 범죄로 빠지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뭐가 있겠느냐마는. 아무튼, 누가 그런 시비 못 걸게 미리 오픈해 놓는 거예요. 경고하는 의미도 있고.”
문이 벌컥 열렸다. 보현이었다. 벽면에 뜬 얼굴과 사색이 된 명은,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으로 저를 보는 지호를 슥 훑어본 보현은 한숨 쉬었다.
“당당하게 쓴다고 불법 아닌 거 아니에요. 명은 씨.”
“아니, 아니 우리 애가 한 대 맞았다잖아요!”
제 발명품에 보낸 환호와 감탄이 마음에 든 탓이었을까. 어느새 지호를 우리 애라고 부르며 싸고도는 명은을 본 보현은 고개를 저으며 화면을 껐다.
“관계자만 보게 되어 있다고요. 이렇게 외부자한테 보이면 안 돼요.”
“지호 씨가 왜 외부자예요? 우리 임 헌터 식군데.”
“시공 계약 떨어졌어요. 한동안 바빠지시겠어요. 가서 계약 내용 확인하고 재료부터 주문하시죠?”
“억, 뭐요? 야근 끝난 게 엊그젠데 이 양반들을 그냥!”
명은은 팔을 걷어붙이며 뛰어나갔다. 지호는 그 팔팔하고 에너지 넘치는 기능공 아가씨의 뒤통수가 빠르게 멀어지는 것을 내다보다 웃었다. 재미있는 사람이다.
“구경 좀 했어요? 명은 씨 방에 볼거리가 많을 것 같아서 맡겼는데.”
“완전 많이 봤어요. 기능공 일도 좋을 것 같다고 좀 생각했는데 이것도 할 줄 아는 게 많고 배운 게 많아야 할 수 있는 일이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뭐.”
“으음, 명은 씨 일은 특히 그렇죠. 개발이란 게 문외한이 들여다본다고 뿅 하고 생겨나는 그런 게 아니다 보니까.”
보현은 아쉬운 기색을 잠시 드러냈으나 곧 평소와 같은 태연한 얼굴로 돌아왔다.
“아까 자동 주행 장치 왜 고장 났나 보니까 제가 고장 냈더라고요. 구경꾼들 핸드폰 부술 때요.”
멋진 핑거 스냅이 부른 부작용이 너무 어마어마했다. 지호는 설마 또 보현의 차를 타야 하는가 싶어 눈치를 살폈다.
“어차피 헌터 일 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지만, 그래도 여기는 자주 올 테니까 사람들하고 인사나 나눠요. 당장은 균열 파견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교육받기도 어려워졌으니까.”
“마정석 추출이라도 도울까요?”
“지호 씨가 돕는다면 속도가 빨라지긴 하겠죠? 근데 지금 당장 마정석 양이 모자라거나 하진 않아서요. 대신 다른 장인들 물건 테스트나 좀 도와줄래요? 전투 계열 각성자가 들었을 때 간혹 부작용이 생기는 경우가 있어서요.”
지호의 머릿속에 금세 부천 협회 실험실이 떠올랐다. 그때의 부작용은 너무 어마어마해서 지호는 한동안 밥을 잘 먹지 못했었다.
“그……. 각성 실험 같은 그런 부작용인가요?”
“누가 죽거나 다칠 일은 거의 없어요. 그냥 거부 반응이 일어날 때도 있고, 아니면 다른 힘을 증폭시키기 위해 에너지가 깎이거나 뭐 그런 반응이 일어날 때가 있어서요. 다양한 능력자들이 들었을 때의 반응을 테스트해 볼 수 있으면 좋은데, 이쪽에 전투 계열 각성자가 다양하진 않으니까요. 보통은 물건 가지러 오는 헌터들한테 테스트 맡기곤 하는데 요샌 다들 진이 빠져서 직접 안 오거든요. 다들 테스트할 수 있다고 하면 좋아할 거예요.”
어렵지 않으면서 지호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의 표정이 밝아지자 보현은 다른 곳을 보는 척하며 투덜거렸다.
“헌터 일 말고 이쪽 테스터 일 해도 좋을 텐데. 진짜 도움 많이 될 텐데.”
물론 지호는 그 말을 은근슬쩍 흘렸다. 보현은 아침 혹은 저녁에 집에서 마주칠 때마다 내내 저런 소릴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