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한해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소월이네. 배 그만 타고 음악을 한다고 했었는데.”
그 순간, 노래하던 소월의 시선이 한해와 마주치고 그와 팔짱 끼고 있는 수진에게로 흘렀다.
홍대 버스킹 거리에서 마주친 두 커플이었다.
놀라서 잠시 연주를 실수했던 소월은 금방 제 음을 찾았고, 레오와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해가 조심스럽게 수진에게 물어보았다.
“불편하면 갈까?”
수진은 빙긋 웃어 보였다.
“이렇게 날 배려해주다니 스윗하기도 해라. 난 괜찮아. 노래 너무 좋은데?”
“그러네. 음원 나온 줄도 몰랐는데.”
“난 아무렇지도 않아. 오빠하고 제대로 사귀었던 사이도 아니고. 또 그랬다 해도 예전 얘기잖아. 결혼까지 하고 돌아온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어.”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심이었다.
그녀는 한해가 다른 여자와 팔짱을 끼고 가는 모습을 직접 봐도 안 믿을 만큼 한해를 신뢰했다.
이토록 나를 사랑하는데 다른 사람을 사랑할 여유가 있다면, 그건 인간의 범주가 아닐 테니.
감미로운 노래가 끝났을 때 가장 열렬하게 박수를 친 사람도 수진이었다.
“공연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 쉬고 다시 시작합니다. 혹시 사진 찍으실 분은 열심히 찍어드리겠습니다. 아직은 무명 가수지만 곧 유명해질 테니까요. 하하.”
레오의 말에 관객들은 무대로 나가 같이 사진도 찍고 사인을 받기도 했다.
“우리도 가자.”
수진은 머뭇거리는 한해를 이끌고 갔다.
다른 관객들에게 팬 서비스를 해준 다음 그들을 마주한 소월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었다.
“아……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녀는 수진에게 꾸벅 인사했다.
“저는 윤소월이라고 해요. 한해 오빠하고 같이 배를 탔어요.”
“잘 알고 있어요. 좋은 동료였다고. 우리 오빠가 힘들 때 큰 힘이 되어주셨다고요.”
“아…… 네…….”
“노래 정말 좋네요! 당장 음원 다운받고 홍보도 할게요.”
“아, 정말요?”
수진은 소월의 첫 인상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밝고 건강한 기운이 가득해. 너무 예쁘고 발랄하잖아. 까딱했으면 한해 오빠를 뺏길 뻔했네!
그런 감정과 별도로 지금 막 들은 노래도 정말 좋았다.
“제가 드라마 제작사에서 기획자로 일하는데 이 노래를 막 드라마에 쓰고 싶은 생각까지 드네요.”
그 말에 소월이 입이 딱 벌어졌다.
옆에 있던 레오도 반색하며 끼어들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레오라고 합니다. 이렇게 실물로 뵙는 건 처음이네요.”
수진은 레오의 얼굴도 어딘가 눈에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랑 뵌 적이 없나요?”
“저희 누나랑 뵌 적이 있다면서요. 그래서 인상이 익숙할지도.”
수진은 레오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옆에 서 있던 한해는 레이나로부터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끼어들지 않았다.
“제가 레오 씨 누나를 안다고요?”
“그닥 좋은 기억은 아닐 것 같은데…… 레이나라고.”
수진은 자기도 모르게 헉 숨을 뱉었다.
“그쪽이 레이나 씨의 친동생이라고요?”
“네. 그리고 소월이 남자친구이기도 하고요.”
수진은 입을 벌린 채 잠시 머릿속으로 엇갈린 관계들을 정리해보았다.
예전에 한해가 말해준 적이 있었지만 실제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잠시 혼란스러웠다.
“아…… 얘기는 들었는데……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레오는 한해에게도 꾸벅 인사했다.
“아마 두 분이 잘되기를 제일 애타게 빌었던 사람이 저일 거예요. 덕분에 저도 오랫동안 기다렸던 연애를 할 수 있게 되었네요.”
그는 씩씩하게 소월의 어깨에 팔을 둘렀고, 소월은 피하지 않고 어색하게 웃었다.
뿌듯하게 보고 있던 한해가 레오에게 악수를 청했다.
“반가웠어요. 우리가 너무 오래 공연을 방해하는 것 같네요. 다음에 같이 봐요.”
“좋습니다!”
수진도 소월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는 한해를 데리고 관객 속으로 돌아왔다.
“소월 씨 너무 사랑스럽다.”
“좋은 동료였어. 항해사였으니까 사실 배에서는 내 상관이었지.”
“나중에 같이 항해해도 되겠다.”
“우리 둘이 같이 배에 타면 어떤 배라도 아무 문제없이 항해할 수 있지.”
“와, 진짜 이건 운명이다. 우리 꼭 커플 데이트하자.”
“정말 괜찮아?”
“안 될 게 뭐가 있어? 노래나 듣자.”
그녀는 한해를 꼭 끌어안고 다음 라이브에 귀를 열었다.
“이번 노래는 이선희 선배님의 명곡 ‘그 중에 그대를 만나’를 듀엣곡으로 다시 불러보려고 합니다.”
노래를 시작하기 전에 레오가 마이크를 잡았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 사람에게만 이끌린다는 사실은 정말 기적이지요.”
그는 옆에 돌아보았다.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고 기다리는 소월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엄청난 행운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저도 잊지 않겠습니다. 오늘 우리 공연을 봐주시는 모든 연인에게 바칩니다.”
노래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대단한 운명까진 바란 적 없다 생각했는데, 그대 하나 떠나간 내 하루는 이제 운명이 아님 채울 수 없소.”
첫 소절은 소월이, 그다음 소절은 레오가. 그리고 함께.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중에 그대를 만나 꿈을 꾸듯 서로를 알아보고, 주는 것만으로 벅찼던 내가 또 사랑을 받고, 그 모든 건 기적이었음을.”
소월과 레오는 노래 속의 주인공이 되어 서로를 보며 노래했고, 구경하는 수진의 가슴은 감격으로 흠뻑 젖었다.
저들도 우리처럼 먼 길을 돌아 만났을까? 아득한 고개를 넘고 넘어 서로의 손을 잡았을까?
그들의 노래는 절정을 향했다.
“나를 꽃처럼 불러주던 그대 입술에 핀 내 이름. 이제 수많은 이름들 그중에 하나 되고. 그대의 이유였던 나의 모든 것도 그저 그렇게.”
수진은 한해의 품에 안겨 노래를 따라 불렀다.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중에 그대를 만나 꿈을 꾸듯 서로를 알아보고, 주는 것만으로 벅찼던 내가 또 사랑을 받고, 그 모든 건 기적이었음을.”
그녀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기적 같은 이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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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 건설 본사. 토요일 밤인데도 이태화 회장은 집무실에 잠깐 들렀다.
특별한 미팅 때문이었다.
비서실에서 도청장치가 있는지 검사까지 받은 호영이 집무실로 안내되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그는 이 회장에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밤도 늦었는데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지.”
호영은 곧장 테이블 위에 사진들을 늘어 놀았다.
“일주일을 미행했는데 거의 매일 만나더군요.”
사진 속에는 수진과 데이트를 즐기는 한해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티 없이 웃는 얼굴로 행복한 남과 여. 그 순간의 즐거움이 사진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부지런히도 놀러 다니는구나.”
이 회장은 다양한 장소에서 찍힌 사진들을 보며 냉소를 머금었다.
“아주 신났어.”
지그시 이를 물고 사진을 확인한 이 회장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파이프 담배를 물었다.
“낮에는 이곳으로 출근합니다.”
호영은 역삼동 빌딩으로 출근하는 한해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 건물에 입점해 있는 회사들이 꽤나 많은데, 투자회사는 여기 두 곳입니다.”
호영은 대기업 계열의 금융회사 한 곳과 SH 인베스트먼트 두 곳의 홈페이지를 출력한 서류를 내밀었다.
이 회장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SH 인베스트먼트를 골랐다.
“여기네. 뭐하는 곳이야?”
“제가 이쪽 전문은 아니어서 다른 쪽을 통해 알아봤더니 일종의 사모펀드였습니다. 그런데 자본금 대부분을 투자한 사람이 한 명입니다.”
그는 사토시와 관련한 서류를 건네주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교포입니다. 일본 이름은 사토시. 전 세계에 1조 이상의 상업용 부동산을 갖고 있는 재력가입니다. SH 인베스트먼트는 그 부동산을 담보로 해서 만든 자본금으로 운영됩니다. 중소형급 펀드를 여러 개 운용하는데 다 합치면 2천억 정도 되네요.”
이 회장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
“왜 하필 여기일까?”
호영은 자기한테 묻는 질문이 아니면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그 아이인가요?”
“그 아이?”
“14년 전에 제가 울진에서 처리했던 그 선장 아들입니까?”
이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덧붙였다.
“이 여자애도 그 배에 같이 타고 있던 뱃놈의 여식이야.”
악마도 치를 떨 이야기였지만 호영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
“혹시 이놈이 알고 있습니까? 자기 아버지가 왜 죽었는지?”
“아니. 그냥 태풍에 휩쓸려서 난파한 줄 알지. 만약 진실을 알게 되면 지옥까지 쫓아올 놈이야.”
“태풍에 휩쓸려서 난파한 건 맞죠.”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지.”
“회장님께서 원하시면 아버지 품으로 돌려보내주죠.”
이 회장은 파이프 담배를 깊이 빨며 생각을 태웠다.
“서울 한복판에 살면서 테헤란로로 출근하는 놈인데, 사고나 범죄로 위장할 여지가 있을까?”
“그건 명령을 하시면 고민해보겠습니다.”
“좀 더 알아봐. 무식한 방법을 안 쓰고도 놈을 철저하게 파멸할 방법이 있는지.”
“네, 회장님.”
“정 안 되면 지 애비를 만나게 해줘야지.”
파이프를 힘주어 빨면서 이 회장의 주름진 눈가에 힘이 들어갔다.
*
늦잠을 잤다. 침대라는 충전기에서 배터리를 꽉 채우고 나왔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화장실로 들어간 레이나는 세면대 거울 앞에서 얼굴 근육을 이리저리 움직여 다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잠에서 깬 다음 제일 먼저 치르는 그녀만의 의식이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이를 닦으며 오늘 하루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그것 역시 그녀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세수는 하지 않고 질끈 머리를 묶고 조깅을 하러 나갔다.
강은 러닝화와 조거 차림으로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 늦을 뻔했어. 완전 늦잠 잤거든.”
레이나는 강에게 머리를 기댔다.
“많이 피곤했구나.”
“어젯밤에 너무 뜨겁게 사랑을 나눴나 봐. 오빠가 더 잘 알겠지만.”
“우리 레이나 쌤, 야한 소리를 대낮부터 잘도 하시네.”
“후훗! 실컷 잤으니까 이제 좀 달려볼까?”
레이나가 먼저 달려 나갔고, 강도 경쾌하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한강 시민공원으로 이어진 길을 지나 한강을 따라 달렸다.
어디까지 달리자고 정해놓지 않은 조깅이었다. 그들은 몸이 땀에 젖을 정도로 달리고 약속한 듯 자연스럽게 멈췄다.
편의점에서 차가운 물을 사서 한강 다리 아래 그늘에 앉아 땀을 식혔다.
“어머님은 좀 어떠셔?”
“여전히…… 갇혀 계시지.”
“나도 좀 더 생각해봤는데 뾰족한 수가 없더라. 괜히 오빠가 어머니를 데리고 나왔다가 오히려 회장님 분노만 더 살 것 같기도 하고.”
“아버지가 가만히 놔두지 않겠지. 내가 어머니를 데리고 나온다면, 아버지와 전면전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야. 뭐…… 난 그럴 수도 있는데…… 오히려 어머니한테 더 피해가 갈까 봐 그게 걱정이야.”
“빨리 인사드리고 싶다. 내가 또 어르신들한테 애교 하나는 끝내주거든.”
“아무렴.”
강은 물을 마시고 멀리 강 건너 남산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빠 무슨 하고 싶은 말 있어?”
“어떻게 알았어?”
“오빠 표정만 봐도 알지. 힘든 말이 있으면 꼭 먼 산을 보잖아.”
그녀는 강의 팔짱을 끼며 몸을 기댔다.
“뭔데. 얘기해봐.”
“우리 같이 살아볼까?”
레이나는 놀란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동거 제안하는 거야?”
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가 어쩐 일로 이렇게 적극적으로?”
“솔직히 우리 둘이 같이 살기에도 너무 넓은 집이잖아. 그런 집을 각각 갖고 있는 건 너무 낭비지. 매달 월세가 얼만데. 그 돈으로 차라리 기부를 해.”
강은 그녀를 보지 않고 말했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오빠. 날 보고 다시 대답해봐. 갑자기 동거 얘기는 왜 꺼냈어? 정말로 내가 내는 월세가 아까워서? 그럴 리가.”
강은 남산에 걸쳐놓았던 시선을 옮겨 그녀를 마주 보았다.
“문득 깨달았거든. 정말로 널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앞의 한강처럼 차분하게 그의 목소리가 흘렀다.
“수진이에게 매달리고 집착했던 마음과 달라. 수진이를 대할 때면 나는 어른이 아니라 소년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어. 너는 달라. 어른 남자가 어른 여자를 좋아하는 거야. 안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기대고 싶고, 기대게 해주고 싶어. 그렇게 너를 원해.”
레이나는 아아…… 신음을 흘렸다.
가슴속에 달콤한 비가 내리잖아. 이러면 기분이 너무 황홀하잖아.
그녀는 강을 덥석 안았다. 땀과 물로 젖은 둘의 몸이 착 붙었다.
“잘하고 있어, 오빠.”
“무슨 소리야.”
“그렇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거야. 그러다가 프러포즈도 하고 결혼도 하고 우릴 반반씩 닮은 애도 낳는 거야. 나 닮은 아들 하나 오빠 닮은 딸 하나 낳으면 딱 좋을 것 같아.”
“너무 나간다, 레이나.”
“네 시작은 미약하지만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 우리는 이제 겨우 동거를 시작하겠지만 나중엔 그렇게 될 거야.”
강이 잔잔하게 웃으며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아 레이나는 그의 팔을 지그시 물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
“이제 슬슬 갈까?”
강이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녀가 잡아끌었다.
“잠깐만. 우리 잠깐만 더 이러고 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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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나온 김에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레이나는 당장 집주인에게 연락해서 이사를 나가겠다고 했다. 어차피 몇 달만 살다가 언제든 나갈 수 있는 단기 계약이어서 집주인은 흔쾌히 다른 세입자를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일단 꼭 필요한 짐만 강의 집으로 옮겼다.
“나 왜 이렇게 두근거리지?”
“뭐야. 한두 번 와본 것도 아니면서. 여기서 자고 간 것만 몇 번이냐?”
“그거야 여친 남친으로 그런 거고. 이제 어엿한 동거인이 되는 거잖아.”
“동거인이라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우리 같이 살면서 필요한 규칙은 서로 합의하고 시작하자.”
“오빠가 집주인이니까 먼저 말해. 아무리 특이한 규칙이라도 다 존중해줄게.”
강은 이미 충분히 고민한 듯 망설임 없이 말했다.
“첫째. 보통 동거를 하면 월세를 같이 내잖아. 어차피 이 집은 내 집이니까 월세를 낼 필요는 없고 원래 내던 월세의 절반만큼만 기부를 해줬으면 해.”
“오케이. 내가 정기적으로 기부하는 곳이 있으니까.”
“네가 기부를 해왔다고?”
“대체 날 어떤 인간으로 본 거야?”
레이나는 폰을 꺼내 올해 기부내역을 보여주었다. 어려운 가정형편의 아이들에게 교육비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에 웬만한 직장인의 연봉을 기부한 그녀였다.
강은 레이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다시 봐야겠네. 참 잘했어요.”
“됐고, 두 번째 규칙은?”
“침실이 여러 곳 있으니까 잠은 서로 다른 방에서 자도록 하자.”
“그 이유는?”
“매일 같이 자다 보면 아무래도…….”
강은 말꼬리를 흐렸고 레이나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아무래도 뭐? 넘치는 사랑이 감당이 안 될 것 같아?”
“너도 가끔 힘들다며. 오늘도 늦잠 잤다는 사람이 누군데.”
“그렇게 내가 탐나?”
레이나는 놀리듯 물었지만 강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순간 레이나는 미치도록 강이 탐났지만 욕망을 겨우 달랬다.
“또 다른 규칙은?”
“저녁은 같이 먹는 걸로 하고 약속이 생기면 미리 알려주기.”
“스윗하기도 해라. 좋아!”
“나는 그 정도야. 레이나의 규칙도 들어볼까?”
“나는 한 가지 규칙밖에 없어.”
그녀는 강의 뺨을 양손으로 소중히 감싸고 말했다.
“힘든 감정이 생기면 담아두지 말고 털어놓기.”
강의 표정이 스르륵 허물어졌다. 얼어붙은 마음이 누군가로부터 진심 어린 위로에 녹는 순간이었다.
“당신은 많이 상처받았지만 그 상처를 드러내지 못하고 살았던 사람이야. 어쩌면 그런 인내가 습관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이제 그러지 않았으면 해.”
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그녀는 그의 머리를 가슴에 품었다.
“아니야. 난 아직도 삐뚤어진 곳이 많아.”
그녀는 강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삐뚤어진 구석이 있더라도 나에겐 꼭 맞는 퍼즐이야. 정수리 냄새마저도 내 취향.”
“뭐야. 그건 좀 변태 같잖아.”
“정말인데. 당신 체취를 병에 넣어 다니고 싶은데.”
“나도 가끔 너의 냄새를 떠올릴 때가 있어. 예전에는 꽤나 진하게 뿌리던 향수를 요즘은 거의 안 쓰는 것 같더라고.”
레이나는 그의 관찰력에 감동했다. 그의 말대로, 최근에 그녀는 향수를 거의 쓰지 않았다. 만들어진 향으로 기억되기 싫어서.
그는 그녀의 긴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고 그녀가 그랬듯이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애정 어린 입맞춤은 자연스럽게 키스로 이어졌다.
그의 손길은 느리고 따스하게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어루만졌고 레이나의 맥박은 다시 속도를 높였다.
공존할 수 없는 감각들, 이를테면 나른함과 짜릿함이 함께 그녀의 신경계를 교란시켰다.
그녀는 강의 귀에 입술을 밀착하고 촉촉한 속삭임을 불어넣었다.
“당신 침대로 갈까, 내 침대로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