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잠자리에서 들었던 남편의 음성이 귓가를 스쳤다.
-어느 날 잔뜩 술에 취해 들어온 아버지가 혼잣말하는 걸 들었어. 누나 이름을 부르면서, 당신이 누나랑 참 닮았다고. 남편은 틀렸다. 닮은 것이 아니라 똑같다!
이목구비뿐만 아니라 표정과 분위기까지, 수진이 봐도 헷갈릴 정도로 똑같다.
도플갱어인가? 아니면 억울하게 죽은 그녀의 혼이 구천을 떠돌다가 나에게 온 것인가?
시아버지는 잃어버린 딸과 똑같이 생긴 나를 붙잡고 있는 건가?
남편뿐만이 아니라 시아버지의 집착까지? 무섭다.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에 갇힌 것 같아.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했다는 시어머니의 저주 혹은 예언이 떠올랐다.
-아가야. 너도 결국 나처럼 될 거야. 그러니 가당찮은 동정 따윈 넣어둬. 네 자신에게 쓰기도 모자랄 테니. 떨어뜨린 핸드폰을 주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수진은 어린 시절의 사진만 들고 벌벌 떨었다.
혼돈의 낭떠러지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나오던 순간, 서늘한 목소리가 등을 밀었다.
“너 지금 뭐하냐?”
남편이 등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얼어붙어버렸는지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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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도 레이나도 같은 말을 했다.
혼자서 마음을 다스리기 힘들면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가보라고.
강은 비서에게 부탁한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고, 이른 오후에 정신과 병원을 찾았다.
그래. 아예 모르는 사람에게는 좀 더 편안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겠지. 게다가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치유해주는 의사니까. 비밀이 새어 나갈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고.
오히려 진작 병원을 찾을걸, 후회하는 마음으로 의사 앞에 앉았다.
단정하게 머리를 묶고, 검은색 니트를 입은 의사는 3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였다.
책상 위에는 ‘정신과 전문의 김야화’라는 명패가 놓여 있었다. 병원을 물색할 때부터 참 특이하다 싶었던 이름.
의사 등 뒤로 진료실 벽은 책장처럼 꾸며져 있었는데 정신과 전문서적만큼이나 소설책이 많이 꽂혀 있는 점이 특이했다.
유명한 정신과 의사를 소개받을 수도 있었지만, 강은 일부러 인맥이 전혀 없는 낯선 병원을 골랐다. 가능하면 같은 남자가 아닌 여자 입장에서 이야기해줄 수 있는 여의사로.
“저희 병원은 처음이시죠?”
의사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서늘했다.
왜 병원을 찾았는지, 그전에도 정신과 상담을 받아본 적이 있는지, 대략 어느 정도로 전체 세션을 예상하고 있는지 등등 일반적인 질문과 대답이 오간 후, 본격적인 상담이 시작되었다.
“이강 씨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 뭔지 들어볼까요?”
자신이 약점을 인정하는 일. 강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며칠 전, 아내에게 털어놓았던 고해성사는 술기운까지 빌렸을 정도로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한결 홀가분했다.
“저는 외도를 하고 있습니다.”
의사는 표정의 변화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 정도 고백은 이 진료실에서 수백 번은 들어봤다는 식으로.
“관계가 오래되지는 않았는데 외도 그 자체보다는 아내에 대한 제 감정이 저를 힘들게 합니다. 이런 이야기, 불편하신가요?”
“아닙니다. 이곳은 도덕이나 윤리를 기준으로 환자분의 잘잘못을 따지는 곳이 아니니까 편안하게 다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실제로 이강 씨와 같은 문제로 찾아오는 환자분들도 많고요. 외도를 하는 입장도 있고, 배우자의 외도로 인한 스트레스로 찾아오기도 하고요.”
의사의 표정에는 인공지능처럼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서 오히려 강은 편안했다.
“아내와 제 사이에 있는 어떤 남자가 오래전부터 제 신경을 갉아왔습니다.”
강은 한해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그가 처음 한해와 수진을 만났던 어린 시절부터.
그가 쌓아온 거짓의 탑과 결혼, 한해의 등장과 레이나와의 재회, 며칠 전에 있었던 외도까지. 모두 털어놓았다.
“어제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어요.”
고백을 하는 내내 무거운 표정이었던 강의 얼굴이 조금 홀가분해졌다.
“제가 잘해주니까 아내도 한결 기분이 나아 보였습니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의사가 입을 뗐다.
“이강 씨가 아내에 대해 갖고 있는 마음은 일반적인 남자와 여자의 감정과 매우 다르군요.”
“그런가요?”
“아이들이 부모에 대해 갖는 감정도 겹쳐져 있어요. 부모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고, 그 욕구가 좌절되었다고 느낄 때 부모가 싫어하는 짓을 하는 행동 패턴과도 일치하고요.”
“미성숙하다는 뜻인가요?”
“정신과적인 표현은 아니지만 비슷합니다.”
“저도 그걸 알고 고쳐보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습니다.”
“마음 고쳐먹는 일이 쉽다면 저 같은 정신과 의사들은 존재하지도 않았겠지요.”
의사가 처음으로 웃는 표정을 내비쳤다.
“수많은 사례를 상담해봤는데 외도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단순히 성욕에 이끌려 저지르는 경우도 있고, 해방감을 느끼기 위해,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또는 복수심에 외도를 하는 경우도 있지요.”
“제 경우에는 아내에게 집착하는 마음이 괴롭고, 그 마음을 부정하기 위해 외도를 하는 건가 싶습니다.”
“그런 심리기제도 가능하죠. 누군가에게 집착하는 마음은 사람들 대부분이 갖고 있습니다. 그 크기와 방식이 문제인데 이강 씨의 경우엔 실제로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인 거고요. 아마 배우자분도 괴로울 겁니다.”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살펴봐야 할 점은 아내에게 집착하는 마음이 왜 누그러지지 않느냐는 겁니다. 만약 그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면 외도도 막을 수 있을 테니까요.”
“아내가 저를 사랑하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내분이 결혼했을까요?”
“제가 거짓말을 했으니까요. 강한해가 죽었다고.”
“네. 제가 보기에도 이강 씨가 첫 단추를 잘못 키운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겠죠. 이제는 아내분도 그 거짓말에 대해서는 용서하고 넘어간 것 아닙니까?”
“이제 제가 용서가 안 되죠. 아까도 말했지만 신혼여행 기간 중에 아내가 그놈을 만났으니까요.”
“우연이라면서요?”
“그건 아내의 말이고. 저는 믿지 않아요.”
담담하게 이어지던 강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분명히 저 몰래 따로 연락해서 만났을 겁니다.”
의사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외도를 저질렀다?”
강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가 한숨과 함께 인정했다.
“그런 심정도 없지 않았습니다.”
“이강 씨. 냉정하게 마음을 들여다봅시다. 의사인 제가 보기에는 의처증이라고 볼 만한 증세도 보이거든요?”
“의처증이라니요. 제가 아무 근거도 없이 의심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둘이 저 몰래 만나는 광경을 제가 목격했고 아내도 시인했습니다.”
“이강 씨가 본 장면에 외도라고 할 만한 요소가 있었나요?”
의사가 깊이 따져 묻자 강은 말문이 막혔다.
“남녀 간의 접촉이라든가, 감정이 담긴 메시지라든가.”
“그런 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내 분과 한해 씨의 고향인 그곳에서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럴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어요?”
“이강 씨. 이 세상의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0에 가까운 확률입니다. 마주 오던 차가 갑자기 중앙선을 넘어 내 차에 정면으로 충돌할 가능성은 0에 가깝지만 매일같이 누군가에게 벌어지는 일이죠. 이강 씨가 저희 병원에 찾아온 일은요? 며칠 전만 해도 가능성 0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우린 지금 이렇게 마주 보고 있잖아요?”
의사의 지적에 강은 뜨거워졌던 마음이 조금 식는 것을 느꼈다.
“이강 씨가 원하는 마음의 상태는 뭘까요?”
“편안하게 아내를 사랑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아내분을 믿고 기회를 줘야 합니다. 대신, 외도는 중단해야 하고요. 지금 이강 씨 본인은 아예 육체관계까지 포함한 외도를 저지르면서 오히려 아내의 사소한 외도를 의심하고 도리어 아내에게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비난하고 있어요. 그럼 관계는 더욱 악화됩니다.”
“아내가 강한해를 완전히 잊었다는 사실만 확인하면…… 저도 외도를 할 일이 없을 것 같아요.”
“그런 조건을 달면 부부간의 문제가 꼬입니다. 외도는 부부 사이의 계약 위반이죠. 외도 그 자체가 잘못이에요. 저지른 사람의 잘못이요.”
“그건 저도 인정하지만 제 마음이 그렇지 못합니다.”
“그 마음을 고치러 여기 왔잖습니까? 그러니 의사인 제 조언을 들어보시죠.”
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외도를 멈추시고, 아내분을 믿어주세요.”
“네. 그렇게 해보죠.”
“외도를 할 때 죄책감은 있나요?”
책망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환자의 마음을 세심하게 관찰하려는 질문이었다.
“죄책감도 있는데…… 크지는 않습니다. 아내 탓이라는 책임을 전가하는 마음과 복수심이 더 큰 것 같습니다.”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강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머리로는 압니다. 제가 지나쳤다는 것을요. 반성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성과 비이성, 두 개의 서로 다른 힘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마음의 주인은 당연히 전자가 되어야겠죠. 이건 아닌데 하면서 계속 방치해두면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 되고 더 손쓰기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잠은 잘 주무시는지요?”
“네.”
“분노는 어떨까요?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일상생활에서 문제가 생겼던 적이 있습니까?”
의사는 형식적인 질문들을 몇 개 더 던지고 상담을 마무리했다.
“다음에는 언제 예약을 잡아드릴까요?”
의사의 질문에 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제가 정신과 상담을 계속 받아야 할지 말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분명히 도움이 되었는데.”
“그래요. 계속 마음이 불편하면 찾아오세요.”
“네, 고맙습니다.”
강이 공손히 인사하고 진료실을 나갔다.
탁탁탁, 소리를 내며 야화의 손가락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환자의 진료일지를 작성하는 중이었다.
금방 진료실을 떠난 환자가 다시 찾아올 거라는데 그녀는 백만 원쯤 걸 수 있었다.
그 환자는 아내를 믿지 않을 거고, 외도도 멈추지 않을 거야.
그녀는 비슷한 케이스로 자신을 찾아온 환자들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진정으로 자신의 행동을 고치려는 의지가 있는 경우.
‘나는 정신과 상담까지 받을 정도로 노력했다’고 자신에게 변명거리를 마련하려는 경우.
그녀는 두 경우를 구별해낼 수 있었고 이번에 본 환자는 철저하게 두 번째였다.
시차적응 없이 병원에 출근한 그녀는 길게 하품을 했다.
정신과 학회세미나 때문에 미국에 출장을 갔다가, 원래 예정되어 있던 스케줄이 허리케인 때문에 취소되면서 일찍 한국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휴우. 누군지 몰라도 아내가 불쌍하게 됐네. 피곤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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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고 임원진들과 저녁 식사를 한 후 집으로 향했다.
강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기사가 모는 차 뒷자리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래. 수진이를 믿자. 나도 잘못한 것들이 많으니.
어제는 가식적인 꽃바구니와 친절로 그녀를 대했다면 오늘은 진심으로 그녀를 대해줘야지.
미안한 마음, 그리고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집에 올라오니 현관 앞에 아내의 신발이 흐트러져 있었다.
아내는 신지 않는 신발은 늘 신발장에 가지런히 정리해둔다. 그리고 신고 온 신발도 짝을 모아 한쪽에 모아둔다.
그런데 웬일인지 아내의 신발이 급하게 뛰어 들어온 사람처럼 벗어놓은 그대로였다.
“수진아.”
최대한 부드럽게 아내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거실에도 침실에도 화장실에도 없었다.
두 세대가 함께 살 수 있게 설계된 집이어서, 잘 쓰지 않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내의 서재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다가가 보니 문이 한 뼘 정도 열려 있었다.
퇴근하자마자 일을 하고 있나 싶어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아내는 옛날 사진을 보며 울고 있었다.
아내의 등 뒤에서 본 사진 속에는 어린 시절 한해가 아내와 나란히 서 있었다.
정신과 상담 후 겨우 평정을 되찾은 강의 마음은 폭탄이 떨어진 듯 산산조각났다. 그 충격파는 불륜 현장을 직접 목격한 사람과 맞먹었다.
아내가 흐느끼는 소리는 마음에 붙은 불에 기름을 끼얹었다.
그랬구나. 퇴근하자마자 정신없이 달려 들어와 사진을 보며 질질 짤 만큼 너는 아직 그 새끼를 사랑하는구나.
남편이 들어온 줄도 모를 정도로, 아주 넋이 나갔구나.
그는 낮에 만났던 의사를 끌고 와서 이 광경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 선생님 어떠세요?
신혼집에서 다른 남자 사진을 들고 그리움에 몸부림치는 제 아내를 소개합니다.
남편이 옆에 있는데도 딴 놈이 보고 싶다며 엉엉 울고 난리가 났죠?
이런데도 믿으라고요? 의처증이라고요?
통쾌한 심정마저 들었다.
이제 모든 것이 확실해졌어. 미안해할 필요도, 고민할 필요도, 병원에 갈 필요도 없어.
아내가 흐느끼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한해는 최대한 감정을 누르고 입을 열었다.
“너 지금 뭐하냐?”
아내는 그대로 멈춰버렸다.
그렇지. 차마 고개 돌려 내 얼굴을 보기도 민망하겠지. 현행범으로 딱 걸려버렸으니.
그는 아내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분노에 치를 떨었다.
변명거리를 찾고 있나 보지? 쉽지 않을 거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수진이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뺨에는 눈물자국이 선명했다.
“사진을 보고 있었어요.”
“퇴근하자마자 그 새끼 사진 보면서 울고 있네. 그렇게 보고 싶어?”
“그런 게 아니에요. 당신이 오해할 수 있겠지만 그런 거 아니에요.”
“또 그놈의 오해 타령? 어쩜 그리 매번 똑같아?”
“아까 아버님하고 식사를 했는데 아버님이 당신 누나 사진을 보내주셨어요. 10살 때 사진이요.”
“그런데?”
“그 사진하고 제가 10살 때 사진을 비교하던 중이었어요.”
“그러다가 강한해랑 같이 찍은 사진을 보니 막 눈물이 쏟아졌어?”
“내가 울고 있는 줄도 몰랐어요. 다만…… 너무 두려웠어요. 나의 운명이.”
“너의 운명이 어떻길래?”
“당신은 날 이렇게 집착하고 몰아붙이고, 아버님은 잃어버린 딸을 다시 찾은 기분으로 나를 이 집안에 영원히 묶어두려고 하고.”
수진은 강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당당하네. 그럼 폰 줘봐.”
“뭐라고요?”
“그렇게 자신 있으면 폰을 줘보라고. 내가 폰 좀 살펴보게. 당신이 떳떳한지 보게.”
“내 휴대폰 검사를 하겠다?”
“내가 그동안 이런 적 있어? 당신의 사생활은 최대한 지켜줬어. 말도 안 되는 회사 다닌다고 해도 그러라고 내보내줬고. 그 결과가 뭐야?”난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에요. 부하 직원도 아니고. 내 직업을 택할 때 당신에게 허락받을 필요는 없어요.”
“이렇게 당당한 사람이 무슨 운명 타령이야. 어차피 받아들일 것도 아니었으면서도.”
“말이 안 통하는군요.”
수진은 서재를 나가려고 했으나 강이 앞을 턱 막아섰다.
“또 뛰쳐나가려고?”
“누가 들으면 제가 밥 먹듯 외박하는 줄 알겠어요.”
“폰 내놔.”
강이 손을 내밀었다. 완강한 태도였다.
“비켜요.”
수진이 그를 밀치려는 순간 그는 다시 몸을 움직여 또 막아섰다. 그 순간, 그녀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좋아요. 폰 마음대로 보세요. 대신.”
그녀는 빈손을 내밀었다.
“저도 당신 폰을 볼게요.”
“뭐라고?”
강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서로 확인해보자고요. 배우자에게 부끄러운 부분이 있는지 없는지. 당신이 원하던 바 아니었어요?”
“이런 미친…….”
“뭐가 미쳐요? 당신이 먼저 제안했잖아요?”
“네가 뭔데 내 폰을 검사하겠다는 거야?”
“당신은 왜 내 폰을 보려고 하죠?”
“그건 당신이 다른 새끼가 보고 싶다며 질질 짜고 있다 걸렸으니까.”
“오해라고 분명히 말했고 얼마든지 그 증거를 보여줄 수 있어요. 저도 오해를 풀고 싶어요. 지난번 파티에서 당신과 다른 여자가 키스하는 광경을 목격했으니.”
강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만해.”
“네. 원하는 대로 다 해드릴게요. 그만하라면 그만하고, 폰을 보고 싶다면 서로 보도록 해요.”
수진은 침착하고 당당했지만 강은 한계를 넘어서는 감정으로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선택해요. 그만할까요? 아니면 폰을 깔까요?”
강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이성은 이미 질투와 분노에 잡아먹히고 조각난 뼈마저 잘근잘근 부서져버려 형체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그럼 제가 선택하죠. 비켜요.”
수진이 서재를 나가려는 순간, 억센 손이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예리한 고통이 퍼지는 순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선을 넘어가버렸네.
당신도 곧 알게 되겠지만, 내 인내심은 여기서 끝이야.
*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어느 쪽을 선택해도 나쁜 결과에 이르는 곤란한 상황.
레이나와 헤어진 한해는 집에 가는 택시 안에서 딜레마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강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 상대 여자가 직접 해준 이야기. 그만둘 생각은커녕 강을 차지하겠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수진이에게 이 사실을 알려? 아니면 부부사이의 일이니 개입하지 말고 모른 척해?
어느 쪽을 선택해도 나쁘다. 너무 나쁘다.
택시가 수진과 강이 사는 빌라 앞을 지날 때쯤 창문을 내렸다.
시원한 바람 속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제일 위층이라고 했지? 불이 켜져 있네.
수진아. 넌 뭘 하고 있을까?
다른 여자를 품에 안는 남편이 사는 그 집에서, 너는 아내의 이름으로 어떻게 같이 살 수 있니?
날카로운 손톱이 가슴 안쪽을 사정없이 할퀴는 아픔에 눈을 감았다.
수진아. 너는, 나는 어찌해야 할까?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가시지 않는 고통 속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뭐지? 머리가 너무 아파 헛것이 보이나?
어딘가를 집요하게 노려보던 그의 동공이 마침내 폭발하듯 커졌다.
그는 손으로 택시 천장을 치며 다급히 외쳤다.
“기사님! 차 좀 세워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