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시끌벅적한 포장마차 구석.
한해는 몇 번이나 약속장소가 맞는지 확인했다. 레이나가 보내준 링크로 봐서는 확실했는데, 그녀의 이미지와는 너무 다른 곳이었기 때문에.
여기가 맞느냐고 확인 메시지를 보내려고 할 때,
“일찍 오셨네요?”
약속시간을 정확히 10분 남기고 레이나가 나타났다. 평범한 캐주얼에 모자까지 눌러쓴 모습으로.
“뭘 그렇게 보세요?”
“지난번하고 너무 다른 분위기여서, 조금 놀랐습니다.”
“그렇죠? 자주 입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그녀는 등받이가 없는 원통형 의자를 쓱 끌어 앉았다. 별것 아닌 동작임에도 힘 있고 경쾌한 리듬이 느껴졌다.
한해는 주위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장소도 좀 의외였고요.”
“네. 역시 자주 오는 곳은 아니에요. 사실 처음이에요. 일부러 검색해서 찾았죠.”
“편한 데서 보셔도 되는데.”
“겹칠까 봐.”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한 한해가 눈을 크게 떴다.
“리버 오빠…… 그러니까 이강 씨 동선하고 겹칠까 봐 일부러 변두리의 허름한 포차를 골랐다고요.”
“저는 별로 상관없습니다만.”
“제가 상관있어요.”
레이나의 말과 행동엔 머뭇거림이 없었다.
“분위기에 맞춰 소맥 말죠. 콜?”
“네. 그러죠.”
“안주는?”
“저는 가리지 않습니다.”
“오케이.”
그녀는 긴 팔을 들어 종업원을 부르더니 고민하지 않고 안주 두 개와 술을 주문했다.
“진수진이라는 여자는 복도 많네.”
종업원이 자리를 뜨자 레이나는 바로 도발적인 말로 한해를 긴장시켰다.
“무슨 뜻이죠?”
“이렇게 잘생긴 오빠 둘이서 서로 차지하겠다고 덤비니.”
“잘못 아신 것 같은데 제가 수진이를 뺏으려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저는 수진이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강한해 씨. 우리 솔직해져요.”
그녀는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수정 같은 눈이 유난히 반짝였다.
“점잖은 척, 착한 척 그만하고 본심을 꺼내놓자고요.”
“그게 제 본심입니다.”
“당장은 그럴지 몰라도, 솔직히 둘 중 선택하라면?”
레이나는 젓가락을 지휘봉처럼 휙 빼들었다.
“1번. 수진 씨가 강이 오빠하고 평생 행복하게 산다.”
그녀는 빈 소주잔 두 개를 차례로 통통 치면서 물었다.
“2번. 강이 오빠하고 이혼하고 한해 씨와 평생 행복하게 산다.”
마침 종업원이 술을 들고 왔고, 그녀는 두 잔을 똑같이 소주로 채웠다.
“1번이면 왼쪽, 2번이면 오른쪽 잔을 마셔요.”
“뭐하는 짓입니까?”
“강이 오빠한테 듣기로 배를 오래 타셨다면서요?”
“14년을 탔습니다.”
“그래서 술자리 게임 같은 걸 잘 모르시나? 이건 올타임 인기 있는 진실게임이라는 거예요.”
“진실게임이 뭔지는 아는데, 둘이서 처음 만난 자리에서 하긴 무례하지 않습니까?”
“미안해요. 원래 예의가 없어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제일 자주 들은 말 두 가지.”
레이나는 새빨간 입술을 혀로 핥았다.
“섹시하다는 말. 그리고 싸가지 없다는 말.”
한해는 어이가 없어 보고만 있었다.
“둘 다 저에겐 똑같은 칭찬이에요.”
“싸가지 없다는 말이 칭찬이다?”
“싸가지 없다고 쓰고 솔직하다고 읽는다. 그런 거죠.”
한해의 무반응에 그녀가 재촉했다.
“마셔요.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혹시 안주 없이는 안 마시는 스타일인가?”
한해는 두 개의 술잔을 모두 비워버렸다.
“이걸로 답이 될까요?”
“와우…….”
레이나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예상 못 한 답이다!”
그녀의 얼굴에 흥분이 번졌다.
“난 이렇게 예상을 깨는 사람이 좋더라.”
“솔직히 말한 겁니다. 1번 2번, 다 좋습니다. 수진이가 행복하다면.”
“한해 씨의 행복은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하죠. 그래서 그런 겁니다. 수진이가 행복해야 저도 행복하니까요.”
레이나는 혀를 내두르고는, 빈 잔을 내밀었다.
“한 잔 부탁해도 되죠?”
한해가 술을 따라주자 그녀도 안주 없이 잔을 비웠다.
“크아. 어떻게 하면 그렇게 돼요? 막 그런 목숨 바치는 사랑. 인생을 거는 사랑.”
한해는 거침없는 그녀를 제대로 상대해주기로 결심했다.
“열일곱 살에 모든 걸 다 잃고 바다로 떠나, 14년 동안 한 사람만 그리워하다가 보면 그렇게 됩니다.”
쉼 없이 도발하던 레이나는 일시정지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한해도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종업원이 안주를 들고 오지 않았다면 그들의 눈싸움이 언제까지 이어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주문하신 메뉴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레이나는 앞 접시에 안주를 덜어 한해에게 건네주었다.
“드세요.”
“고맙습니다. 친절하시네요.”
“같은 편이니까.”
한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난 당신을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굳이 편을 가르라면 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순진한 소리.”
그녀는 안주를 앞 접시에 덜어 먹었고 한해도 잠시 말없이 배를 채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떤 면모로 봐도 레이나는 좋게 봐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안주를 나눠먹다 보니 인간적인 매력이 느껴졌다.
“편이 따로 있나요? 목적이 같으면 같은 편 되는 거예요.”
그녀는 안주도 아주 맛깔나게 먹으며 말했다.
“강이 오빠가 옆에 붙어 있는 이상, 그 여자는 행복해질 수 없어요.”
확신하는 말투에 한해는 입맛이 싹 달아났다.
“왜 그런 말을 합니까?”
“보고 들은 게 있으니까.”
“대체 강이하고 어떤 관계입니까?”
“당신이 예상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관계를 생각해봐요.”
“강이하고 잤어요?”
레이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해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소주잔을 가득 채운 뒤 비우고 채우고 또 비웠다.
“결혼한 뒤에도?”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나.
“왜 그랬어요?”
“우리 주변에서 일상다반사로 벌어지는 흔하디흔한 일인데, 이유 같은 게 중요할까요?”
“이 작은 나라에서 매일 수십 명씩 자살하는 게 현실이라지만 그렇다고 자살이라는 사건의 무게가 줄어드는 건 아닙니다.”
“비유가 아주 적확하고 강렬하네. 아까도 느꼈지만 강한해 씨 좀 멋있어.”
레이나도 술을 마셨다.
“크으. 당신 같은 순애보는 아니지만 나도 이강이라는 남자 좋아해요. 갖고 싶고, 가질 거야.”
“강이도 당신한테 가겠답니까? 이혼하고?”
“아니요. 그래서 우리가 힘을 모아보자는 거예요. 당신 수진 씨가 행복하길 바란다면서요? 그런데 수진이 남편 곁에 나 같은 여자가 있는데, 수진 씨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당신이 강이 주변에 얼씬거리지 않는다면?”
“그럼 수진 씨는 더 불행해질걸?”
“대체 그건 무슨 논리입니까?”
“그나마 내가 있어서 강이의 미친 성질이 누그러지는 거예요. 내가 없다면 강이는 더 수진 씨를 못살게 굴 테니.”
그녀의 캐릭터가 묘한 매력을 지닌 것처럼, 그녀의 논리도 묘하게 설득력 있었다.
한해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일단 들어보죠. 당신의 작전이 뭔지.”
레이나는 몸을 기울이고 찬찬히 설명했다.
“저도 그렇고 한해 씨도 그렇고 목표가 뭐예요? 단순히 이강 진수진 부부를 이혼시키는 게 목표가 아니잖아요. 저는 강이 오빠를, 한해 씨는 수진 씨를 뺏는 게 목표잖아요.”
“뺏는다는 표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무슨 물건도 아니고.”
“아 거 되게 깐깐하네. 그럼 뭐라고 하지? 좋아요. 함께한다 정도로 할게요. 난 강이 오빠와, 한해 씨는 수진 씨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는 거잖아요.”
한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둘을 이혼시키되, 우리를 미워하게 만들어서는 안 돼요.”
“그게 가능합니까?”
“각자 증거가 되어주면 되죠. 제가 강이 오빠와 있을 때 한해 씨가 증거를 모으고, 한해 씨가 수진 씨와 있을 때 제가 증거를 모으고.”
“꼭 그렇게 해야 합니까?”
“너도나도 이혼을 하니 이혼이 쉬워 보이지만 멀고 험한 길이에요. 확실한 유책 사유가 없으면 소송에 이길 수 없어요.”
“소송이 아니라 합의도 있잖습니까.”
“수진 씨는 모르겠지만 강이 오빠는 절대로 합의 안 할걸.”
“이미 레이나 씨와 외도를 하고 있다면서요? 그렇다면 수진이로부터는 마음이 떠난 거 아닙니까?”
레이나의 눈꼬리가 쳐졌다.
“우리 한해 오빠. 순진하기도 하지.”
그녀는 한해의 뺨을 쓰다듬으려고 했으나 그가 몸을 뒤로 뺐다.
“세상엔 다 한해 씨 같은 사람만 살지 않아요. 이 세상은 합리적이기보다는 부조리로 가득하고, 이성보다는 광기가, 온정보다는 비정이 득세하는 곳이죠.”
“참 이상하네요. 어린 나이에 모든 걸 빼앗기고 세상에서 쫓겨난 저는 정작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데.”
“한해 씨가 보는 세상은 어떤 곳이에요?”
그는 소년 같은 표정을 지으며 술잔을 비웠다.
“파란 하늘에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고 밤에는 별이 뜨고 달도 뜨는 곳이요. 가끔 폭풍이 몰아칠 때도 있지만 폭풍은 언젠가 지나가고 다시 좋은 것들이 반짝이는 그런 곳이요.”
“못 말리겠네. 알겠어요. 한해 씨의 그 대책 없는 희망을 더럽히고 싶진 않은데, 어쨌든 강이 오빠는 그래요. 수진 씨에게 광적인 집착을 갖고 있어요. 엔간해서는 놓지 않을 거예요.”
“자기가 바람을 피우면서도?”
“저랑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한 말이에요. 절대 수진이를 놔주지 않을 거라고.”
한해는 체온이 몇 도 갑자기 높아지는 착각에 부르르 떨었다.
미친 새끼. 대체 어쩌다 그 지경이 되어버린 거야? 수진이는 어쩌다가 그런 놈에게…….
“수진 씨를 구해줘야겠다는 생각 안 들어요?”
“제가 당신 말을 어떻게 다 믿죠?”
“합리적인 의심! 좋은 태도예요.”
레이나는 학생을 대하듯 오른손 검지를 쫙 펴 보였다.
“확인해봐요. 기다릴게요.”
그녀는 건배를 청했다. 한해는 건배는 받아주면서 분명히 했다.
“당신과 같은 편이라고 인정하는 건 아닙니다.”
“아직은. 하지만 곧.”
그녀는 잔을 비우면서도 마주친 시선을 떼지 않았고, 한해가 먼저 눈을 피했다.
유혹의 여신이 있다면 이 여자와 많이 닮았을 것 같아. 조심해야지.
*
같은 시간. 수진은 일식집 룸에서 이태화 회장을 마주하고 있었다.
“급하게 보자고 해서 미안하다.”
“괜찮아요, 아버님. 안 그래도 한번 찾아뵈어야겠다 싶던 참이었어요.”
“어째서지?”
“식사하면서 말씀드릴게요.”
재킷에 베스트까지 갖춰 입은 이 회장은 일본 의상을 입은 여종업원이 들어오자 느긋하게 두 팔을 벌렸다.
종업원은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자연스럽게 그의 재킷과 베스트를 벗겨 옷걸이에 걸었다.
“항상 드시던 걸로 준비할까요?”
“그러지.”
“술은 블루로 준비할까요?”
“음…… 위스키는 너무 독하니 오늘은 사케로 할까?”
이 회장은 수진에게 동의를 구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메이보 요와노츠키로 하지.”
“알겠습니다.”
여종업원이 공손하게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코스가 시작되기 전까지 이태화 회장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가볍게 대화를 이끌었다. 그는 경제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심지어 해외 뉴스까지 섭렵하고 있었고, 오히려 수진이 잘 모르는 주제가 많았다.
종업원이 들어와 서빙을 시작했다.
“술과 음식을 올리겠습니다.”
이 회장은 코발트빛 병에 담긴 사케를 수진에게 먼저 따라주었다. 그녀도 공손하게 시아버지에게 술을 따랐다.
“여기 회가 아주 괜찮다. 쓸데없는 것들은 안 나오고 항상 귀한 것들만 잘 챙겨서 준단다.”
이 회장의 말대로 수진은 구경도 못 해본 회와 해산물들이 작은 예술품처럼 꾸며져 나왔다.
“내 용건부터 말할까, 아니면 네 용건부터 들어볼까?”
“아버님부터 말씀하시죠.”
“사업을 해볼 생각 없니?”
또 손주 타령을 하려나 싶었던 수진은 예상 밖의 제안에 놀랐다.
“사업이요? 제가요?”
“왜? 안 될 거 있나?”
“저는 경험이 전혀 없는데요. 아르바이트 외에는 장사를 해본 경험도 없고요.”
“이제부터 경험을 쌓으라는 거지.”
이 회장은 절대 큰 그림 없이 아무렇게나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수진은 경계태세를 갖추고 물었다.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하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역시 똑똑해.”
이 회장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느낌으로 네가 빨리 손주를 보여줄 것 같지도 않고, 법적으로만 강이와 결혼해서 같이 살고 있지만 우리 집안에 전혀 녹아들지 않고 겉도는 것 같아서 그렇다. 내 밑에서 사업이라도 하면 그래도 소속감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
“제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그러세요?”
“그러려고 했냐?”
수진은 잠시 고민했다. 술 취한 남편에게 들은 끔찍한 과거에 대해 말해야 할지, 아니면 모른 척 덮어놔야 할지.
그녀는 강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이가 아버님을 많이 어려워하는 것 같아요. 그 압박감이 저희 부부관계에도 영향을 주는 것 같고요.”
“어려워한다…… 두려워하는 게 아니고?”
이 회장의 얼굴에는 조금의 미안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이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었어요. 저는 얼굴도 모르지만, 어린 나이에 따님을 잃은 아버님의 심정은 정말 안타깝지만…… 그이 잘못이 아니잖습니까?”
이 회장은 천천히 회를 집어먹으면서 듣기만 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일지 몰라도, 그이 마음은 많이 다치고 병들었어요.”
“녀석을 동정하는 거냐?”
“어느 정도는요.”
이 회장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불쌍해한다면 다행이구나.”
“무슨 뜻이죠?”
“불쌍하면 못 버리지.”
“아버님…… 제가 왜 그이를 버려요. 왜 자꾸 그런 말씀을 하세요?”
“나처럼 밑바닥에서 맨주먹으로 시작해 이렇게 정상까지 올라온 사람들은 말이야. 사람의 마음을 들어다보는 능력이 생긴단다. 너의 마음에는 강이 놈에 대한 사랑이 안 보여. 그나마 연민이라도 있다니 다행이지만.”
수진은 젓가락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마음을 들킨 것 같은 위기감에 고개를 돌리고 술을 마셨다.
“어차피 결혼해서 살다보면 사랑 따위 증발해서 흔적도 안 남기 마련이고. 아이를 낳으면 아이나 키우면서 살겠지만…… 그게 늦어진다면…… 더 멀어지기 전에 작은 사업이라도 해보라는 거다. 또 그러다 보면 부부관계도 좋아질 수 있고.”
그는 술을 한 잔 더 따라주었다.
“이번에 스웨덴에서 고급 가전제품 라인을 수입해 올까 하는데 그 사업을 맡아볼래? 네가 글 쓰는 일을 좋아한다니 우리 본사 홍보팀에 자리를 내줄 수도 있고. 아니면…….”
“아버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제 커리어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무척 만족하고 있기도 하고요. 걱정해주신 마음은 정말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 회장은 먹으려던 회를 내려놓고 술을 마셨다.
“시아버지의 제안을 단숨에 거절하는 며느리라니.”
“죄송합니다.”
“아니다. 마음에 들어. 괘씸하면서도 마음에 들어.”
수진은 아까부터 간질간질 튀어나오려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외람된 말씀인 걸 알지만…… 혹시 그이 누나의 사진을 갖고 계시면 볼 수 있을까요?”
“그건 왜?”
“아버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이 집안의 일원으로 들어오려는 노력이랄까요? 아픈 가정사도 알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이 회장은 핸드폰을 들었다.
“사진 보냈다. 얼굴도 예뻤지만 아주 당찬 아이였지. 맨날 내 눈치만 보는 강이 녀석하고는 달랐어.”
사진을 확인한 수진은 흠칫 놀랐다. 자신의 어린 시절 얼굴과 너무 닮아서.
그이의 말이 헛소리가 아니었구나.
“지은이가 10살 때 사진이다.”
“아버님이 정말 많이 예뻐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 회장은 허공으로 시선을 옮기고 소리 없는 한숨을 흘렸다.
그 모습만큼은 보통의 부모와 다르지 않았다. 수진은 아이를 앞세운 부모의 고통은 영원히 줄어들지 않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제가 괜한 얘기를 꺼냈나 봅니다.”
“아니다. 오래전 일인데 내가 잊어야지.”
그녀는 진심으로 위로하는 마음을 담아 술을 따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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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과의 저녁식사를 마치고 집에 들어왔다. 아직 남편은 들어오지 않고 집은 비어 있었다.
수진은 곧장 자기 서재로 들어가 책장 앞에 섰다.
그녀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무척 서둘렀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서랍을 열었다.
커다란 서랍 안에는 강의 집에 처음 얹혀 살 때부터 매번 집을 옮길 때마다 들고 다녔던 추억의 물건들이 모여 있었다.
학교에서 받은 상장, 학창시절 일기,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편지, 알록달록한 머리핀, 폭 넓은 스카치테이프로 보존한 네잎 클로버 등등.
그녀는 아직 필름 카메라를 썼던 어린 시절 사진을 모아놓은 앨범을 꺼냈다. 그리고 10살 때 사진을 찾았다.
바닷가 방파제 앞에서 한해 오빠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설마…….”
아까 이 회장이 보내준 사진을 핸드폰에서 찾아 액정에 띄웠다.
같은 10살일 때 두 아이의 얼굴을 비교해보았다.
아아, 입에선 신음이 흐르고 손에선 핸드폰이 미끄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