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46화
가브리엘이 알만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녹색을 무척 싫어했는데 아버지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봄이 되면 저택의 커튼을 녹색으로 고쳐 달았다. 부부는 서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게 달라도 어쩔 수 없이 맞춰야 하는 지점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야 할까.”
정확히는 그의 집무실에 쳐들어오려는 친척들을 쫓아내기 위해 좋아하는 척하기로 한 거지만 루비카는 일단 맞장구를 쳤다.
“차 모임이 아무리 좋아도 사람들이 차를 싫어한다면 오래 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 모든 귀족가가 클레이모어 공작가처럼 맛있는 케이크와 쿠키를 만들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제법 신랄한 말이 나왔다. 이상한 소녀였다. 루비카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심정이 되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엘리제와 지나치게 비슷하게 꾸민 모습은 사람을 기겁하게 할만 했으나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재치 있는 입담을 가지고 있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가브리엘이 미소 짓더니 하녀에게 설탕과 우유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비싼 음식을 가지고 장난친다고 혼을 냈지만 설탕과 우유는 차를 맛있게 즐길 수 있도록 그녀가 찾은 방법이었다.
“제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독극물 수준으로 진하게 우렸을 때가 제일 맛있지만 이정도도 괜찮을 것 같네요.”
그리고 하녀가 가져온 설탕을 찻잔에 거의 통째로 붓고 우유를 넣어 휘휘 저었다. 순식간에 잔에 담긴 차는 베이지색으로 변했다.
“드셔 보세요.”
“이건 커피 하우스에서나 쓰는 방법 아니니?”
그것도 밤새 진탕 논 남자들이 아침에 잠도 깨고 속도 달랠 겸 마시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건 커피가 아니라 차잖아요. 뭐, 그렇게 따지면 차 모임도 이상하지요. 문학이나 예술에 대해서 토론하는 건 커피하우스에서나 할 수 있는 일로 여기지 않았나요?”
가브리엘이 차 모임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 한 것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다들 란셀 경이란 대시인의 등장에 혼이 빠져 그 사실을 지적하는 걸 잊었지만, 여인이 남자와 함께 사랑의 시에 대해서 토론하는 건 매춘부나 할 수 있는 일로 여겼다. 그런데 공작 부인은 얌전한 규수들이 당당히 테이블에서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게 했다. 본인은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 차는 커피가 아니니 커피하우스에서 쓰는 방법이랑은 상관없겠지.”
루비카는 가브리엘의 말에 용기를 얻어 그녀가 만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어머, 맛있구나.”
우유의 향과 어우러지자 더는 풀냄새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고소하고 제법 견과류와 비슷한 맛이 느껴졌다. 루비카의 말에 호기심이 동한 앤과 엘리제도 한 모금 마셨다.
“확실히 맛있네요.”
“……전 모르겠는데요. 그냥 마시는 게 더 좋은 것 같아요.”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그녀는 칼과 비슷한 입맛을 가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자리의 대부분은 루비카처럼 설탕과 우유를 탄 차를 더욱 선호했다.
“이 방법을 쓰면 디저트가 없거나 맛이 없어도 차를 즐겁게 마실 수 있을 것 같구나.”
루비카는 제법 존경스러운 눈으로 가브리엘을 바라보았다. 그저 스푼을 움직여 설탕을 몇 번 넣고 우유를 살짝 붓기만 하면 되는데 자신은 어째서 생각하지 못한 걸까.
“부인, 그럼 부탁 하나만 할게요. 제 어머니의 차 모임 때 설탕과 우유를 청해 지금처럼 마셔 주실 수 있나요?”
가브리엘은 탕트 백작가의 차 모임 다음 날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의 새로운 차 마시는 방법’이라는 칼럼을 작은 새의 소식에 실을 예정이었다. 타티아나와 가브리엘은 칼럼을 싣기만 하면 역대 최고 부수를 찍으리라 확신했다.
“부탁하지 않아도 돼. 앞으로 차를 마실 때마다 무조건 그럴 거니까.”
어머니가 자신이 추천한 대로 차를 마시는 공작 부인을 보면 음식으로 장난치지 말라고 비난한 걸 땅을 치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가브리엘은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정말 감사합니…….”
하지만 그녀는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쓰러졌다. 깜짝 놀란 루비카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이 앤이 빨리 가브리엘을 가까운 휴게실로 데려갔다. 정신이 사납다는 이유로 하녀를 모두 내보내고 문을 꼭 닫은 다음에 가브리엘의 드레스 끈을 풀었다. 그리고 차가운 물을 적신 수건을 가브리엘의 뺨에 찰싹 소리가 나게 떨어뜨렸다. 잠시 뒤 그녀가 천천히 눈이 떴다. 루비카는 그녀가 무슨 큰 병이 난 게 아닌가 겁이 나 소파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괜찮아요. 별일 아니에요.”
가브리엘이 루비카를 달래기 위해 무심히 말했다.
“별일 아니라고? 기절했는데?”
“그냥 잠시 기절한 정도인걸요. 평범한 일이지요”
“혹시 이런 일이 자주 있니?”
“아, 네.”
루비카의 말에 가브리엘이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살이 쪄서…….”
“기절하는 거랑 살이 찐 거랑 아무 관계없어! 그리고 너 정도는 살이 찐 것도 아니야.”
루비카의 격한 반응에 가브리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가 기절하면 어머니조차 그러게 살 좀 빼라고 하지 않았냐는 말을 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루비카는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어디가 아픈 거니?”
“아픈 건 아니에요.”
“코르셋을 과하게 죄어서 그런 것 같네요. 마님, 너무 다그치지 마세요. 탕트 아가씨는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정신을 차리기에 좋은 차가운 레몬주스를 가브리엘에게 건네며 앤이 대꾸했다. 루비카는 가브리엘의 로열블루 드레스를 세모 눈으로 노려보았다. 제법 예쁘고 화려했지만 아까부터 눈에 거슬렸다.
“이 옷은 어디에서 지었니?”
“네? 아. 크리스토퍼의 의상실이요.”
마음 같아서는 마담 카나에게 엘리제과 똑같은 옷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해 바로 입고 싶었으나 백작 부인의 예언대로 그곳의 주문은 어마어마하게 밀렸다. 게다가 탕트 백작 부인이 가브리엘의 데뷔탕트 무도회 드레스보다 자신의 주문을 우선시하는 바람에 마담과 말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가브리엘은 적어도 가을 전엔 데뷔탕트 무도회 드레스를 지어 주겠다는 카나의 말에 겨우 만족했다.
―카나의 의상실 건은 미안하게 됐구나. 넌 아직 정식 데뷔를 하지 못했지만 엄마는 당장 가야 할 모임이 많지 않니?
―네, 어머니가 미라몽 후작 부인보다 후진 옷을 입으면 가문의 수치지요. 하지만 제가 후진 옷을 입으면 뭐 언제나 그렇듯 후진 가브리엘이지요.
―가브리엘. ……카나를 빼고 원하는 디자이너를 말해 보렴. 네가 원하는 대로 옷을 지을 게.
백작 부인은 딸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인 크리스토퍼를 불렀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로열블루 천을 보여 줬다. 시중에서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던데 역시 크리스토퍼다. 가브리엘은 그녀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머니와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누가 뭐라 해도 유행에 뒤지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이 싫었다. 그녀는 ‘올시즌 이 로열블루 드레스만 있으면 세련된 아가씨 소리를 들을 것’이라는 크리스토퍼의 부추김에 홀랑 넘어가 반쯤 해롱해롱한 상태가 되어 옷을 주문했다.
―이 옷은 날씬한 사람이 입어야 잘 어울리니 살을 빼세요.
매년 도전하고 매년 실패했지만 그녀는 기꺼이 살을 빼겠다고 다짐했다.
―살 빼는 데 실패하면 코르셋으로 바짝 조여서라도 옷에 어울리는 실루엣을 만드세요.
여부가 있나. 편법을 써서라도 그녀는 로열블루 드레스를 입고 싶었다. 그리하면 자신도 엘리제처럼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이 그녀를 조종했다.
“그 디자이너가 네게 코르셋을 그렇게까지 조이라고 했니?”
“네, 허리를 최대한 바짝 죄여서 입는 게 예쁘다고 해서요.”
루비카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기절할 정도로 코르셋을 조이라고 하는 디자이너라니.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카나의 디자인을 훔치고도 승승장구하는 디자이너에 대한 적개심이 다시 한번 불타올랐다.
“요즘 다들 이 정도는 조여요. 잠깐 쉬면 금방 괜찮아져요.”
가브리엘이 밝게 대꾸하며 고개를 돌리다 휴게실 창가에 장식된 장미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테일러 장미와 그라데이션이 반대인 장미였기 때문이다.
“이건 세사르 경이 새로 개발하신 장미인가요?”
“아, 그렇단다. 어젯밤에 받았지.”
엘리제가 장미를 잘라서 화병에 꽂아 저택을 장식했다. 그중 하나가 마침 휴게실에 있었다.
“이번에 어떤 식으로 홍보하실 건가요? 또 차 모임을 여실 건가요?”
이건 특종감이다. 가브리엘이 흥분을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루비카는 잠시 그녀의 호기심 어린 갈색 눈을 바라봤다. 이렇게 흥분도 잘하고 호기심도 많은 소녀에게 숨쉬기 곤란할 정도로 허리를 꽉 쪼인 옷을 입으라고 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잔인한 짓이었다.
“차 모임에 장미를 나눠 준 건 홍보를 하려고 그런 게 아니야.”
아무도 믿지 않지만 그녀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아아.”
역시 예상대로 바람 빠진 듯한 소리가 가브리엘의 입에서 나왔다. 루비카는 한숨을 참은 뒤 일단 대답했다. 별로 숨길 일도 아니었다.
“일단 왕비 전하께 테일러 장미를 선물할 때 저 장미도 함께 보낼 예정이야.”
“역시 고급화 전략이군요!”
고급화 전략?
치켜뜬 공작 부인의 눈썹을 본 가브리엘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입으로 빚을 갚는 사람도 있다는 데 그녀는 입으로 빚을 지는 과였다.
“그냥 왕비전하께서 테일러 장미를 궁금해하셔서 보내는 김에 겸사겸사 선물하는 거란다. 홍보나 그런 걸 노리고 하는 건 아니야.”
루비카는 최대한 조곤조곤 설명했다. 탕트 백작 부인만큼이나 말이 많고 솔직한 소녀는 딱 봐도 사교계 소문의 온상지 같았다. 그런 그녀에게 자신이 유능하다는 인상을 심어 주고 싶지 않았다.
“전 왕비 전하 외에는 다른 분께 선물하지 않는 걸 추천해요.”
하지만 가브리엘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눈을 반짝이며 아예 제안을 해 왔다.
“어디에서나 구할 수 없는 귀한 것이 되어야 다들 지갑을 열 거예요. 지난번 장미 경매 때 미라몽 후작 부인의 낙찰금보다 더한 돈이 공작가에 굴러들어 올 거예요.”
가브리엘의 말에 루비카는 숨을 삼켰다.
‘경매라고?’
그녀는 칼이 장미에 정가를 매겨 판매할 줄 알았다. 사고 싶어 하는사람이 많으니 선착순으로 하거나 공작가에 친분이 있는 사람 순으로 팔고 있으려니 했다. 하지만 칼은 그것보다 좀 더 불공평하고도 공정한 방법을 썼다. 바로 ‘돈이 있는 자여 장미를 가져라!’였다. 영지의 작물이 주요 수입원인 귀족가에서는 생각지 못할 방식이었다.
‘……그렇지만 여긴 무기 산업으로 먹고사는 가문이지.’
일 년에 몇 개 생산하지 않는 무기는 경매에 부치거나 로비를 통해 가격을 책정한다. 칼은 아마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장미를 구하는 사람보다 생산량이 적으니 경매에 부친다는 선택지를 택한 것이리라. 친분이 있는 가문에 먼저 팔지 그랬냐는 말을 하면 분명 생각지도 못했다고 놀랄 것이다. 그동안 대체 얼마에 장미가 팔린 걸까? 루비카는 아득해지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달래듯 가브리엘에게 말했다.
“가브리엘, 식물이란 시간이 지날수록 씨앗이 퍼질 테고, 테일러 장미는 비교적 키우기 쉬운 편에 속하니 지금 이 열풍도 한때일 거라고 생각해.”
식물이란 것의 속성이 그렇다. 지금은 구하기가 어려워 발을 동동 구르며 부를 수 있는 최대한 비싼 값에 꽃을 낙찰받지만 그것도 결국은 한때이다. 씨를 훔치든 누군가 돈에 눈 멀어 마구잡이로 팔든 결국 테일러 장미는 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때 한몫 단단히 잡아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