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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45화 (145/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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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45화

‘테일러 장미가 잘 팔린다고 해도 그냥 장미일 뿐인데…….’

게다가 그렇게 인기를 끌지 몰라서 많이 심지도 않았다. 공산품과 달리 장미는 씨를 뿌리고 싹이 움트고 자라는 데 시간이 걸린다. 아무리 영지의 경제 사정이 좋아졌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동안 차 모임 준비니, 편지 답장이니 바빠서 장부를 따로 보지 않았지.’

어디에 뭘 쓸지 예산안을 대략 정해서 앤에게 믿고 맡겼다. 문제가 생기면 그녀가 나서서 말하리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루비카의 기억이 맞는다면 그녀는 분명 예산안을 웃도는 소비를 했다. 문제가 생기고도 남을 시점인데 앤에게서 별말이 없으니 공연히 불안해졌었다. 이제 에드가를 어떻게든 구하겠다고 마음먹었으니 전처럼 빚을 지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며 이 문제를 태평하게 생각하기 어려웠다.

“앤, 장부 말인데…….”

“예산안을 짜신 뒤 한동안 바쁘셔서 정작 장부는 못 보셨지요? 칼에게 말해서 정리해 올리라고 하겠습니다.”

긴장감이 하나도 서리지 않은 무척 나긋한 어조였다. 루비카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였다.

“마님, 탕트 양께서 도착했습니다.”

엘리제가 조심스레 규방 문을 두드려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그 소리에 앤이 깜짝 놀라 시계를 봤다.

“벌써 시간이 그리되었군요!”

탕트 백작 부인은 차 모임에 대한 조언을 핑계로 가브리엘을 공작가에 보내도 되냐고 물었다. 차 모임에서 가브리엘은 루비카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그녀의 어머니인 탕트 백작 부인이 종종 가브리엘에게 면박을 주었으나 재치 있는 말솜씨를 가진 아가씨였다. 백작 부인의 속내가 뻔히 보였다. 그러나 후작 부인과 백작 부인의 기 싸움에 끼어들기 싫다는 이유로 재미있는 아가씨와의 사교 기회를 놓치는 것도 안타까운 노릇이라 거절하지 않았다.

“어떡하지요? 규방으로 오라고 할까요?”

그리고 이 일에 누구보다 호들갑인 건 단연코 앤이었다. 그녀는 아예 몇 수 앞으로 나갔다.

“부인께 샤프론 같은 걸 요청하면 어떻게 하지요?”

“앤, 편지에 나와 있듯이 그냥 차 모임에 대한 이야기 정도만 하기로 했어. 첫 방문부터 규방에 초대하면 부담스러워할 거야.”

“그럼 응접실에서 만나는 게 좋겠군요. 마님 머리 한쪽이 흐트러졌어요. 제니!”

루비카는 정신없는 앤을 두고 엘리제에게 주문을 내렸다.

“네가 탕트 양이라 나이가 비슷하니 이야기가 더 통하겠지. 먼저 내려가서 맞이할래? 아, 케이크랑 과일 같은 것도 잊지 말고 넉넉히 내가고.”

“네.”

루비카는 차 모임 동안 어머니의 눈치를 보느라 케이크를 양껏 먹지 못한 가브리엘의 모습을 기억했다. 공작가에 방문한 잠깐이나마 그녀가 원하는 걸 먹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루비카는 엘리제가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제니에게 머리를 맡겼다.

오늘 루비카는 살구꽃이 수놓아진 주홍빛 드레스를 입었다. 드레스는 새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 오래전에 주문한 것이었다. 다만 스토마커만 새로 주문했다. 거기에 루비카는 밤새 몰래 만든 리본 장식을 직접 달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유행에 맞춘 새 드레스가 되었다.

―주문을 따라잡기가 힘들면 원래 있던 드레스에 맞춰 스토마커만 만드는 방법도 있어.

루비카의 귀띔에 카나가 살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즘 카나의 의상실은 그녀를 포함한 전 직원이 몰려드는 주문을 소화하느라 하루에 두세 시간밖에 못 자는 실정이었다. 루비카의 아이디어는 ‘마담 베리의 제안’이란 이름으로 소개되어 큰 호응을 얻었다. 새로운 옷을 왕창 주문하는 것보다 그 방법이 훨씬 경제적이면서도 유행을 따라잡기에 좋았다.

제니는 살짝 풀어진 머리를 땋아 올리고 드레스와 똑같은 천으로 제작된 리본으로 마무리를 했다. 루비카가 응접실로 내려가 보니 가브리엘을 중심으로 하녀들이 둥그런 원을 그리고 있었다.

“어머, 진짜네?”

“정말 우리가 실렸네.”

그들은 팸플릿보다 두껍지만 책이라 부르기에는 얇은 것을 보고 숙덕거리느라 루비카가 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부인.”

뒤늦게 루비카를 발견한 가브리엘이 일어섰다. 하녀들은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인사한 후 흩어졌다. 루비카는 그들이 보고 있었던 것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지만 가브리엘을 보는 순간 그만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왜? 대체 왜 저런 차림을?’

디테일이 조금 달랐을 뿐 가브리엘은 차 모임 날 엘리제와 무척 비슷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마담 카나가 이제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다고 한탄한 로열블루 드레스와 붉은 입술. 심지어 앞머리까지 엘리제와 비슷하게 짧게 잘랐다. 스토마커가 리본이 아니라 진주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게 의아할 정도였다.

“기꺼이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브리엘은 여느 때처럼 배시시 웃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은 차림이었으나 화장이 차 모임 때처럼 짙지 않아 그녀의 사랑스러운 미소가 다소 드러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반가워요. 탕트 양. 먼 길 오느라 수고했어요.”

“마석마차 덕에 금방 왔는걸요. 참, 앞으로 편히 가브리엘이라고 불러 주세요.”

루비카는 벙벙한 기분을 숨기고 가브리엘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가브리엘은 잠깐 심호흡을 하더니 의자에 앉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앉고 일어설 때마다 심호흡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코르셋을 조인 것 같았다.

‘저 격자무늬는 가느다란 허리가 아니면 어울리지 않긴 하지.’

안타까운 생각이 먼저 들었다. 키가 작고 귀여운 매력을 지닌 그녀를 엘리제처럼 꾸미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대체 누가 그녀의 허리를 저렇게까지 조인 걸까. 테이블에는 가브리엘을 위해 만든 디저트 접시가 가득했으나 그녀는 거기에 손도 가져다 대지 못했다. 꽉 조인 코르셋을 입으면 과자 하나를 먹어도 소화 불량에 걸리기 쉬웠다. 저렇게 억지로 꾸미느니 차라리 자신이 내키는 대로 회색 드레스를 입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머리를 묶어 올린 엘리제가 예쁘고 편안해 보였다.

방문한 아가씨에게 차림새를 칭찬해야 하건만 도저히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아 루비카는 말을 돌렸다.

“무얼 그리 재미나게 보고 있었니?”

가브리엘이 쑥스레 대답했다.

“작은 새의 소식이요. 어제 나온 최신호를 제가 가지고 왔거든요.”

“거기 마님이 실렸어요.”

하녀 하나가 참지 못하고 속살거렸다.

“내가 실렸다고?”

“네, 이것 좀 보세요.”

얼굴이 새빨개진 가브리엘이 말릴 새도 없이 하녀가 루비카의 손에 작은 새의 소식을 올렸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새로운 공작 부인은 과연 사교계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인가?’ 라는 헤드라인이 들어왔다. 루비카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섞인 표정으로 신문을 읽어 내렸다.

첫 번째 기사는 공작이 무리하게 보석을 사들이고, 값비싼 사치품을 주문해 대는 모습을 신랄하게 비평했다.

「클레이모어 공작가는 세리토스 왕국이 지켜야 할 미덕인 검소함을 그 어느 가문보다 충실히 이행한 곳이었다. 차갑다 못해 세리스 산맥의 얼음바람 같았던 클레이모어 공작을 변화 시킨 공작 부인은 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기 위해 필자는 차 모임에 정보원을 섞여 들게 하는데 성공 했다.」

‘어머, 이거 어쩌면?’

루비카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악평을 들으려고 백방으로 뛰었던 지난날의 노력이 드디어 보상받을지도 모른다. 공작가를 사치와 낭비란 악의 구렁텅이에 집어넣은 악녀라는 평을 기대하며 그녀는 황급히 페이지를 넘겼다.

「하지만 취재원이 실제로 만난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은……」

‘비싼 설탕을 담뿍 쓴 케이크랑 과자도 막 내가고, 테이블보랑 그릇, 냅킨도 새로 맞추고, 고작 정원하나 꾸미겠다고 장미꽃 개발하는 데 투자하는 등 지탄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묘사하겠지.’

「무척 소탈했다.」

자신이 본 문장이 믿어지지 않아 루비카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다시 읽었다. 또다시 읽었다. 그래도 역시 적혀 있는 문장은 ‘소탈’이었다.

「또 검소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렇다고 인색하지도 않았다. 차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장미 화분을 아낌없이 나누어 준 것은 물론, 엘리제 드 솔라나양의 경우…….」

그 뒤 기자는 엘리제가 어떻게 루비카의 시녀가 되었는지까지 상세히 소개했다. 더 읽기가 힘들어진 루비카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들었다.

“이게 무슨 영문이지?”

“저희도 모르겠어요. 저희끼리 한 말이 이런 데 실릴 줄은 몰랐거든요.”

“사실 제가 어떻게 마님의 시녀가 되었는지 어머니에게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긴 했어요.”

“어머, 내가 한 말도 실렸네? 마담 카나에게 처음 옷을 주문하실 때 있었던 일을 차 모임에서 이야기하기는 했는데…….”

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워낙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했던 지라 누가 자신의 이야기를 옮겼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기자는 ‘마담 카나의 옷이 아름다운 건 인정하지만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이 지나칠 정도로 영지의 내실을 챙기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의 말까지 보탰다.

“이게 아니야. 이런 칭찬을 들으려고 그런 게 아니란 말이야.”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첫 단추를 단단히 잘못 끼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비카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앤을 비롯한 사람들은 따스한 눈으로 그런 루비카를 바라봤다.

“어쨌든 좋은 일 아닌가요? 저는 이 신문 덕분에 결혼 첫날에 케이크를 먹어서 신의 뜻을 기린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아니, 그게…… 나는 그냥 케이크가 먹고 싶어서 스티븐을 속인 거야.”

“호호호, 겸손한 척 안 하셔도 돼요.”

한번 쌓아 올린 이미지의 성은 너무나도 단단해서 이제는 당사자가 뭐라 말해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에드가의 콩깍지를 벗기는 데도 실패했고, 공작 부인으로서의 자질이 없는 사람이란 말을 듣고 쫓겨나는 것도 이제는 불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루비카는 타는 속을 달래기 위해 찻잔을 들었다.

‘윽.’

하지만 잔에 담긴 음료수는 그녀가 좋아하는 커피가 아니라 차였다.

‘아, 맞아. 난 임산부 연기 중이었지.’

그리고 에드가 때문에 차를 좋아하는 연기 중이다. ‘작은 새의 소식’에 실린 여러 낭설 중 유일하게 딱 하나 루비카도 동감하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차 모임에 나온 ‘차’란 음료는 무척이나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물론 클레이모어 공작 같은 잘생긴 괴짜의 입맛에는 맞을지 몰라도 생소한 향과 애매모한 맛은 분명 진입 장벽이다.」

루비카는 구겨진 인상을 숨기지 않고 반도 마시지 않은 잔을 내려놓았다.

“사실은 그 차 별로 안 좋아하시지요?”

가브리엘이 질문하고 아차 했다. 또 입이 방정이다. 이래서 백작 부부인이 그녀를 보내는 걸 몇 번이고 주저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직접 가겠다고 하면 공작 부인이 부담스러워할 거라는 그녀의 꼬드김에 넘어가 가브리엘을 보내고 말았다.

“그래 보이니?”

루비카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가브리엘의 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주변과 달리 그녀는 가브리엘의 그런 솔직함이 싫지 않았다.

“저도 사실 차 모임은 무척 마음에 들었지만 차는 잘 모르겠어요.”

“그래, 나도 케이크가 없으면 이걸 잘 못 먹겠어.”

“각하께서 좋아하시니까 같이 드시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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