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28화
에드가는 잠시 자신이 숨을 쉬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세상의 모든 것이 희미해 보였다. 칼은 황급히 쓰러지려는 그를 잡아 부축했다.
“아닐 수도 있습니다. 혹시 무슨 반지냐고 물어보니 자신은 자리가 멀어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건 그렇군. 평범한 반지일 수도 있어.”
에드가는 심호흡을 했다. 별일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반지’라는 단어가 끝끝내 걸렸다.
“엘리제는 뭐라고 했나?”
“그분은 입이 무겁습니다. 무엇보다 마님의 최측근이셔서……, 잘못하면 마님의 귀에 바로 들어갈 것 같아서 묻지 못했습니다.”
“그래, 그럼 유품을 발견한 장소는 어딘가?”
“침대 옆 협탁 두 번째 서랍이라고 합니다.”
“침대 옆 협탁…….”
그가 매일 보던 가구였다. 거기에 그런 물건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직접 확인해 보지.”
에드가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그녀와 관련된 일이다. 남을 시킬 일은 아니었다. 그가 직접 그녀에게 물어보든지 확인하든지 해야 했다.
“각하?”
그러려면 빨리 침실로 가야하는데 에드가는 집무실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만약 그게 그냥 평범한 반지라면?’
그럼 예전과 똑같다. 변하는 건 없다. 그 나름대로 단서를 찾으려 노력하겠지만 그녀와 그 사이는 똑같다.
‘……그날 유모가 내게 준 반지라면?’
머릿속이 캄캄해졌다. 거기서부터 사고가 정지했다. 평소에는 잘만 돌아가던 머리가 더 이상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아마 그녀와 그 사이는 많은 것이 변하리라.
‘차라리 그냥 반지였으면 좋겠군.’
에드가는 한참 망설인 다음 천천히 침실로 걸어갔다. 평소라면 황급히 뛰어갔었는데 오늘 그의 발걸음은 더뎠다. 그는 복도를 걷다 몇 번이고 걸음을 멈추고 천장을 보고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었다.
“왜 저러시지?”
“글쎄, 다른 때는 거의 뛰다시피 마님의 방으로 가시지 않았나?”
에드가 옆에 있던 집사 칼이 조용히 째려보자 뒤따르던 시종들이 입을 다물었다. 에드가는 혼이 날아간 듯 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는 무슨 사형선고를 받으러 가는 죄수 같은 표정으로 방에 도착했다.
“마님,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하녀가 몇 번이고 말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어쩌죠. 각하, 벌써 잠드신 것 같습니다.”
벌써 잠들었단 말인가. 약속한 시간까지 아직 30분 정도 여유가 남아있었다. 평소라면 기다려주지 않은 루비카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으련만 오늘은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그래, 그럼 밤이 깊었으니 이만 돌아갈까.”
별안간 밝아진 표정으로 핑그르르 몸을 돌리는 그를 칼이 잡았다.
“각하.”
뒤 말은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차피 알아야 할 일이니 그냥 가서 확인해 보라는 뜻이겠지. 에드가도 칼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동의했다. 그냥 빨리 아는 게 나았다. 그는 해야 할 일을 미루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꾸만 뒤로 미루고 싶은 심정이 드는 건 왜 일까. 그냥 지금 같이 평범한 일상을 살고 싶었다. 해가 지면 짧지만 루비카와 대화를 나누고 함께 저녁을 먹고 잠든 그녀를 보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 일상을 누릴 수만 있다면 평생 낮 동안 못 걷는 채여도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두려우시면 나중에 마님께서 자리를 비우셨을 때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칼의 말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아니, 됐네.”
서릿발 같은 음성이 나왔다. 그녀와 그의 일이다. 두렵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이 끼어들게 할 수 없다. 지금 만족스럽고 행복하다고 해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루비카는 평범하게 살던 여인이었는데 나 때문에 이런 일에 말려들었지.’
그녀를 위해서도 언제까지 미뤄 둘 수 없었다. 에드가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하녀의 말대로 루비카는 이미 자고 있었는지 침실에는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에드가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고 침대 옆 촛대에 남은 희미한 촛불에 의지해 침대 쪽으로 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루비카는 푹신한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자고 있었다. 눈 감고 있는 그 모습은 천진난만하기 짝이 없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배부른 듯 흐뭇했다. 에드가는 그녀의 통통한 볼을 살짝 눌러보고픈 충동을 느꼈다.
“루비카.”
조심스레 이름을 불러보았다. 깊이 잠들었는지 루비카는 미동이 없었다. 에드가는 잠시 이마에 붙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떼어 내고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이 기분 좋았는지 루비카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심장이 고장 난 듯 뛰었다. 그녀가 자신 때문에 웃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한참 루비카를 바라보던 에드가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법에라도 걸린 건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는 가까스로 시선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두 번째 서랍이라고 했지.’
투박한 협탁 위에는 촛대와 그녀가 잠잘 때 자주 바르는 크림과 향초가 놓여 있었다. 에드가는 잠시 칼이 일러 준 두 번째 서랍장을 노려보았다. 놋쇠 고리에 손가락을 걸어 살짝 당기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차가운 겨울에 한참 바깥을 헤매다 온 사람의 손가락처럼 그의 손가락이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뭐라고.’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숨 쉬듯이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처럼 느꼈다. 에드가는 심호흡을 하고 기합을 넣었다.
‘다른 사람을 시킬 수는 없어. 내가 해야 해!’
속으로 기사가 훈련을 할 때 내지르는 소리 비슷한 걸 내고 고리에 손가락을 걸어 당겼다.
-덜커덕
지나치게 힘을 줘서 그런지 서랍장을 열 때 그만 소리가 나고 말았다. 나름 신중한 편이라고 자신했는데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다니. 그는 황급히 침대 쪽으로 고개를 돌려 루비카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그녀는 처음 봤던 자세 그대로였다.
“하아.”
긴장으로 참고 있었던 숨을 내쉬었다. 에드가는 서랍장 쪽을 보았다.
‘장갑밖에 없잖아.’
레이스로 된 장갑과 실크 장갑을 비롯해 각양각색의 장갑이 서랍 안에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에드가는 자신이 잘못 찾은 건가 싶어서 허탈했다. 어쩌면 엘리제가 발견 한 뒤로 그녀가 보관 장소를 바꿨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라면 그리했다.
‘저건?’
그대로 서랍장을 닫으려는 데 장갑사이로 뭔가 금빛으로 반짝이는 게 보였다. 장갑을 장식하거나 묶기 위한 걸로 보이지 않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에드가가 손을 집어넣었다. 차가운 금속성의 줄이 손에 닿았다.
‘왜 그대로 둔 거야.’
남에게 들켰으면 재까닥 숨겨야지. 그대로 둔 그녀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에드가처럼 많은 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냥 평범한 반지이길…….’
그녀는 그가 저주를 풀 유일한 단서이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푸른 반지가 있길 기도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저주 따위 어찌되든 상관없으니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어주기만을 바랐다.
에드가는 천천히 잡은 줄을 들어올렸다. 시간이 느리게 지나갔다. 딸려 올라오는 줄 때문에 옆으로 치운 장갑에서 떠오른 먼지의 궤적까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줄의 끝에는 그가 그토록 찾던 푸른 반지가 달려 있었다.
“아.”
흐느낌인지 비명인지 절규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그의 입에서 나왔다. 한동안 표백된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에드가는 자신이 보고 있는 장면이 의심스러웠다. 줄을 잡은 손이 무거웠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세상에 푸른 보석은 많다. 그리고 푸른 보석을 박은 반지도 많다. 그냥 단순히 모양이 비슷한 반지일지도 모른다. 그녀도 이게 어머니의 유품이라고 하지 않았나. 뭔가 착오일지도 모른다. 에드가는 자신이 본 것을 부정하며 반지를 코앞까지 들어올렸다.
아, 하지만 그 반지는 그의 것이 맞았다. 겉보기에는 모래사장에 채일 정도로 많은 돌 같지만 자세히 보면 오묘한 빛이 감도는 것과 그가 실수로 손톱자국을 낸 것까지 똑같았다. 고리의 가장자리가 많이 마모된 것 외에는 모두 똑같았다.
‘……그 반지가 맞아.’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다리의 힘이 풀려 버렸다. 에드가는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마지막 남은 이성이 그가 큰 소리를 내지 않게 도와주었다. 쭉 미뤄 왔던 생각과 추리가 그를 덮치기 시작했다.
-아르망이란 남자, 각하와 비슷한 점이 지나칠 정도로 많지 않습니까?
눈이 멀어 그의 눈동자 색을 모른다는 루비카의 말이 생각났다. 그녀는 아르망의 외모 설명을 주저했다. 머리색에 대한 질문을 했을 때도 말을 얼버무렸다.
-마님의 나이는 그날 각하의 나이와 똑같습니다.
-튼튼한 두 다리로 낮밤을 가리지 않고 걸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고 말했어.
‘설마…….’
그동안 그가 배재했던 가능성이 떠올랐다. 사랑에 빠진 에드가가 그 사람을 자기 대신 과거로 보냈을 수도 있지 않냐는 국왕의 말을 코웃음 치며 무시했다. 사랑을 혐오하는 자신이 사랑에 빠질 리 없다 믿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불가사의하게도 루비카를 사랑하고 있었다. 자신이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 그도 모른다. 심장은 이성의 지배받기를 거부했고, 그의 마음은 그녀를 보기만 해도 들뜨고 행복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그는 멍청이가 됐다.
‘왜 그동안 그 가능성을 떠올리지 않았지? 아니, 사실은 알았어. 다만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던 거야.’
이유는 간단하다. 질투에 눈이 멀어서였다. 그는 그녀가 사랑한다는 아르망이 죽일 듯이 미웠다. 그래서 바로 앞에 보인 수많은 단서들을 무시했다.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고 비참했다.
‘루비카!’
반지를 아플 정도로 꼬옥 쥐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가 어쩌다 눈을 잃은 건지 또 어떻게 그녀를 만났는지, 자신의 몰골이 어떠했기에 그녀가 그를 못 알아봤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아르망이었다.
그녀가 사랑하고 또 사랑했던 아르망이었다.
기뻤다. 그저 기뻤다. 구름 위를 걷는 것 같다는 말로도 그의 기분을 대변할 수 없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심장에서 요동치는 혈액이 동맥을 지나 모세혈관을 통해 온몸으로 퍼져갔다. 공기 중에 섞인 양초 타는 냄새와 침대에서 나는 마른 이불 냄새부터 카펫의 먼지 냄새까지 모든 것이 예민하게 느껴졌다.
세상이 나이고, 내가 세상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이 땅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이처럼 생생하게 느낀 적이 없다.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신에게 감사했다.
‘정신 차려.’
더 지체할 이유가 없다. 그는 폭발하는 감정을 간신히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을 몇 번이고 쥐었다 폈다. 그리고 고개를 좌우로 젖혔다. 혹 목소리를 떨지 않을까 싶어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 와중에도 루비카는 미동 없이 잠들어 있었다. 그 천사 같은 모습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그녀와 이루어질 일만 남았다.
“루비카.”
우는 건지 흐느끼는 건지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 루비카는 곤히 잠든 듯 미동이 없었다.
“루비카.”
에드가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하지 않아도 기뻤다. 미래의 자신이 그랬듯이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루비카.”
에드가는 떨리는 손으로 루비카의 어깨를 흔들었다. 혹시나 자신이 잠을 깨워 짜증스럽게 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으나, 그는 그녀와 당장 이야기하지 않으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