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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27화 (127/212)

# 127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27화

“잠옷이랍니다.”

앤이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 이게 왜 내 눈앞에 있어?”

“글쎄요. 마담이 완성했다고 가지고 온 것 중에 있었는데. 주문이 잘못 들어갔나 봐요.”

앤의 입은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했지만 눈동자는 거짓말하지 못했다. 루비카는 똑바로 보지 못하고 천장을 노려보며 말하는 앤의 회색 눈동자에 한숨을 쉬었다.

“앤, 다 티 나니까 그냥 솔직히 말해.”

루비카의 말에 앤이 어색하게 웃었다. 역시 마님을 속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앤은 목욕 시중을 들던 하녀 두셋을 내보내고 그냥 솔직히 말했다.

“마님, 임신 사건 말이에요. 유산으로 꾸미는 것도 방법이지만 저는 음, 그냥 빨리 임신을 하는 게 제일 안전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빨리 임신하는 게 제일 안전한 방법이라고?”

“네, 유산도 일이 잘못되면 어떻게 소문이 새어 나갈지 모르고, 차라리 한두 달 출산이 늦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 모두를 설득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뭐라 설명하는 게 좋을까. 루비카는 난감했다. 에드가와 결혼할 때 일체의 육체관계를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고 앤에게 말하는 게 좋을까. 하지만 앤이 그 소리를 믿어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부끄럽게도 하인들 앞에서 에드가와 키스도 했고, 그의 품에 안겨 잠든 모습까지 보여 줬다.

“그건 에드가와 내가 잘 이야기해 볼게. 앤, 굳이 이런 옷을 준비할 필요는 없어.”

에드가 앞에서 이 옷을 입는 불상사만은 막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만요, 마님.”

“응.”

“각하께서 침실에서 밤을 새우시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 음. 그 시간에 대해서 제가 뭐라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걱정스러워요.”

“아, 그건. 에드가가 바빠서…….”

“아무리 바쁘셔도 그렇지요. 사실 그동안 각하께서 하시는 행동이 다정하시길래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마님께서 속상해하시진 않을까 쭉 신경 쓰였어요.”

루비카와 에드가는 차후 이혼할 때 주변에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자연스레 사이가 소원해진 것처럼 보이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했던 행동이 이렇게 발목을 잡을 줄 몰랐다.

“혹시 각하께서 사내구실을 제대로 못하시는 건가요?”

“그, 그건 아니야!”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녀는 에드가의 상태에 대해서 알지 못했지만 애먼 남자의 앞길을 막을 순 없으니 일단 건강하다고 말했다.

“부탁이니 한 번만이라도 입어 주세요.”

간절한 앤의 눈동자에 루비카는 마음이 흔들렸다. 여기서 거절하면 그녀가 너무 낙심할 것 같았다. 루비카는 어쨌든 앤에게 약했다. 잠옷은 심하게 남부끄러웠지만 위에 이불을 덮고 에드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기로 마음먹었다.

‘에드가는 신사니까 괜찮겠지.’

처음에 그는 그녀의 의사를 무시하고 멋대로 일을 저질렀다. 하지만 요즘은 그녀가 싫다고 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옷을 핑계로 사고를 칠 사람이 아니었다.

‘이불을 꼼꼼하게 덮으면 보이지 않아.’

루비카는 하는 수 없이 앤이 가져온 잠옷을 입었다. 반투명한 재질의 옷은 입은 듯 만 듯 그녀의 실루엣을 적나라하게 보여 줬다. 부끄러워서 거울 쪽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 욕실에서 나온 그녀는 후다닥 침대 위에 올라가 이불을 덮었다.

“모, 모두 나가 줘.”

그리고 촛불 한두 개만 켜고 에드가를 기다렸다.

‘앞으로 이런 압박은 더 심해지겠지.’

언젠가 비슷한 일이 닥치지 않을까 싶기는 했다. 귀족 부인의 삶에서 후손을 남기는 것은 중요한 의무 중에 하나였다. 사실 에드가가 그녀의 조건을 들어준 게 특별한 일이었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남녀가 가문을 위해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다. 에드가는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에드가는 참, 좋은 사람이야.’

전령의 실수로 한 이 결혼이 끝나면 그도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 이번에는 제대로 결혼하겠지. 그녀와 서로 오해하고 부딪치고 싸웠으니 이제는 결혼하려는 여성에게 그렇게 무례하게 굴지 않을 것이다. 분명 처음부터 제대로 마음을 전하고 청혼하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겠지.

‘그가 행복하면 좋겠어.’

하지만 그 아름다운 미래를 상상하니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콕콕 아파 왔다.

‘안 돼. 이러면 안 돼.’

그가 행복해지면 기뻐해야지 슬퍼해서는 안 된다. 루비카는 베갯잇을 꾹 잡았다.

뎅, 뎅, 뎅.

그때 시계 종소리가 울렸다.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열한 시가 되었다. 이 시간까지 에드가가 오지 않는 건 드문 일이었다.

‘일이 많이 바쁜 걸까? 전령이 내 앞에서 말한 것 이상으로 세사르 경이 사고를 친 걸까?’

어쩌면 오늘 밤 그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앤이 준비한 잠옷을 입고 그를 만나야 한다는 건 심히 긴장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섭섭했고, 그가 많이 바쁘고 힘든지 걱정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휴게실에 있던 침대 엄청 작았어.’

딱 한 사람 누워서 잠을 청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침대였다. 다섯 명이 누워 자도 될 만큼 널찍한 그녀의 침대에 비하면 작아도 너무 작았다. 잘못 몸을 뒤척였다간 금방 떨어질 것 같은 침대였다. 그녀 때문에 그런 침대에서 잔다고 생각하니 조금, 아니, 많이 미안했다.

‘앞으로 그냥 여기서 쭉 자고 가라고 할까.’

새삼 에드가에게 자신이 너무 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인상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그동안 그를 제대로 보지 못한 건 아닐까.

‘나중에 따로 이야기해 봐야지.’

어차피 그는 오늘 올 것 같지 않았다. 루비카는 기다리지 않고 일단 한숨 푹 자기로 했다.

* * *

루비카의 예상과 달리 세사르 경의 일을 처리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 천하태평이었다.

“고블린이 가르쳐 준 덕에 정말 튼튼한 야생 장미를 구했네. 에드가, 내 이번에 아름답고 오래가는 장미를 개발하고 말걸세.”

상대편의 속이 얼마나 드글드글 끓는지도 모르고 세사르 경은 자랑까지 해 댔다.

“그래, 그 망할 장미를 개발하는 데는 얼마나 걸릴 예정이지?”

“부인과 약속한 그라데이션 장미는 내 장담하지. 두 달이 안 걸릴 거네. 껄껄껄.”

잠시 그의 멱살을 잡을까 고민했다.

“게다가 이번엔 모험단에게 야생장미 수집을 명했다면서? 에드가, 솔직히 감동했네. 자네가 이런 일에 깊은 관심이 있을 줄이야. 내 석 달 안에 기존에 본 적 없는 새로운 장미를 적어도 세 종은 더 개발하겠네.”

세사르 경의 목소리에는 감동이 서려 있었다. 피곤함이 에드가를 덮쳤다. 그는 세사르 경과의 대화를 이쯤에서 끝내기로 결심했다.

“아.”

‘한 달’ 하니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루비카의 차 모임. 그녀는 그 일을 무척 기대했다. 다른 대귀족과의 교류를 통해 그녀가 사교계에 안착하는 건 그도 바라는 바였다.

“루비카와 약속한 장미, 삼 주 안에 개발을 완료하도록.”

“사암 주? 삼 주는 너무 짧네.”

“그럼 이 주.”

세사르의 흰 수염이 파들파들 떨렸다. 하지만 에드가의 푸른 눈은 미동이 없었다. 루비카가 열 차 모임을 세사르가 개발할 장미꽃으로 가득 채워 주고 싶었다. 그는 연구자를 어떤 식으로 굴려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앓는 소리를 내지만 세사르의 지난날을 보았을 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하, 알겠네. 삼 주 안에 개발을 완료하지.”

“적어도 화병 하나가 가득 찰 정도의 꽃을 가져와야 하네.”

그리고 에드가가 고개를 까딱해 문을 가리켰다. 빨리 돌아가서 연구나 하라는 몸짓이었다. 에드가는 세사르가 나가자마자 그에게 호위를 붙였다. 말이 호위지 사실상 감시 역에 가까웠다.

‘정말이지, 바람 잘 날이 없군.’

한숨 돌린 에드가가 재빨리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열한 시였다. 어서 움직이지 않으면 루비카의 침실에 한 발짝도 들이지 못하게 생겼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각하.”

자리를 비웠던 칼이 그를 찾았다. 무시하고 가려 했지만 얼굴에 서린 빛을 보았을 때 보통 일이 아닌 듯싶었다.

“무슨 일인가? 빨리 말해.”

“그, 그, 마님의 소지품과 관련돼서 말입니다.”

“쉿, 목소리 낮춰.”

에드가는 혹시 누가 듣고 루비카에게 옮길까 황급히 목소리를 낮췄다. 칼은 에드가의 그런 행동이 지나치게 예민하다고 느꼈지만 맞장구를 치기 위해 황급히 집무실 문을 닫았다.

“그래, 루비카의 소지품이 뭐? 무슨 일이 있나?”

“아직 마님의 방을 찾아보지는 않았습니다만. 각하, 하녀가 조금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이상한 말이라니?”

“각하께서 마님이 간직하고 있던 어머님의 유품을 버리라고 한 게 진짜냐고 물어보더군요.”

“뭐?”

금시초문이었다. 에드가는 자신이 그런 짓을 했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유품을 버리라고 했다고? 가문의 보고에 꽁꽁 봉인하다시피 보관하라고 했다면 몰라도 버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미쳤다고 그런 소리를 해?”

“음, 저는 짚이는 게 있습니다. 베르너 저택에 갔을 때 마님께서 가지고 있었던 루비 장신구 말입니다. 그게 아무래도 돌아가신 마님 어머니의 유품 같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에드가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유품이었다고?”

그는 자신이 했던 말을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할 수 있었다. 빌어먹게도 그의 뇌는 기억을 윤색하는 법이 없었다.

―그건 남작 영애 정도나 할 법한 물건이었네. 공작 부인이 될 당신이 달기에는 격이 너무 떨어지는 보석이지.

그는 베르너 부부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집안의 물건은 다 구질구질해 보였다. 공작 부인이 될 그녀에게는 더 좋은 물건이 어울릴 듯싶었다. 그게 어머니의 유품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백작 영애였다. 결혼 후에도 레이디라는 말을 듣고 산 여자다. 귀족의 언어에서 백작 영애에게 남작 영애 수준이라는 말은 무척 모욕적인 언사였다.

“젠장.”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그때의 자신을 흠씬 패 주고 싶었다. 코피가 나게 얼굴을 패고 다리를 부러뜨리고 허리를 접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정도였다.

―각하, 조금만 친절해질 수 없나요?

여태 그는 그리 말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며 살아왔다. 조금만 친절하게 대해 주면 굶주린 사자처럼 달려드는 이들을 떨쳐 내기 위해 가시를 세웠다. 그는 그 충고를 듣지 않은 걸 후회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 유품, 아카데미로 간 사촌 동생이 가져갔지? 칼, 심부름꾼에게 마석마차를 내줘. 당장 그 유품을 도로 가지고 오라고 하지.”

“각하, 그런데 제 기억이 맞는다면 그때 그 유품은 모두 루비 장신구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그건 모두 사촌 동생이 가져갔었지요.”

“그래, 그녀가 안젤라라는 동생에게 줬지.”

그때 안젤라라는 소녀가 그를 불만스럽게 노려보던 장면이 떠올랐다. 루비카는 괜찮다면서 안젤라를 말렸었지. 왜 자신이 그때 가만히 있었는지. 멍청이가 따로 없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녀가 그 일을 아는 게.”

에드가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찌 알게 되었냐고 물어보니 최근에 엘리제 시녀님이 마님께서 숨겨 둔 유품을 실수로 찾는 바람에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숨겨 둔 유품?”

“네, 마님께서 각하께 알리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하는 바람에 여태껏 입을 다물고 있었다고 합니다. 금줄에 걸려 있는 모양이 꼭 반지처럼 보였다고 했습니다.”

“반……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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