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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29화 (129/212)

# 129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29화

“으음.”

루비카는 잠결에 자신을 집요하게 흔드는 손길을 느꼈다. 그 손길의 정체를 모르는 그녀는 짜증스럽게 그의 손을 탁 쳐냈다. 그 바람에 덮고 있던 이불이 스르륵 떨어졌다.

“헉.”

에드가는 불시에 드러난 그녀의 모습에 깜짝 놀라 뒷걸음을 쳤다. 속옷에 가까운 잠옷은 몸의 실루엣을 가감 없이 보여 줬다. 꿈에서도 감히 상상한 적 없는 광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는 20대 중반의 한창 혈기 왕성한 남자였다. 순식간에 정염이 일었다. 대체 왜 그녀가 이런 옷을 입고 이렇게 사랑스럽게 잠들어 있는지 그는 몰랐다. 무방비한 모습에 심장이 떨리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이 자리에 더 있으면 안 돼.’

자신이 매우 이성적인 편이라 자신했지만 루비카 앞에서는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다. 에드가는 정염의 포로가 되기 전에 침실에서 빠져 나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라 판단했다. 그는 뛰다시피 문을 향해 달려 문고리를 잡았다.

‘저렇게 자면 감기에 걸릴 텐데…….’

거의 벗은 거나 다름없는 옷이었다. 에드가는 문 앞에서 한참을 우물쭈물했다. 돌아갈 자신도, 그 엄청난 광경을 보고 참을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저리 자다 혹 몸이 상하지나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휴, 어쩔 수 없군.’

에드가는 눈을 아주 가늘게 떴다. 그리고 촛불의 은은한 불빛에 의지해 천천히 침대 쪽으로 갔다. 그는 자신과 끝없이 싸우며 간신히 이불자락을 잡는데 성공했다.

‘덮어 두자, 덮어 두기만 하고 빨리 나오자.’

그는 아예 눈을 질끈 감고 이불을 덮었다. 그런데 그게 실수였다. 눈을 감는 바람에 그는 루비카가 몸을 돌리는 걸 보지 못했다. 이불을 덮는 그의 손가락에 부드럽고 푹신한 것이 닿았다.

“헉!”

눈이 번쩍 뜨였다. 이불이 루비카의 머리까지 덮인 게 다행이었다. 이 와중에 그녀의 얼굴까지 보았다면 그는 자신을 제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내가 뭘 만진 거지?’

그는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보드라운 촉감. 자신의 단단한 피부와는 전혀 달랐다.

‘대체 무슨 생각인거야, 이 여자야!’

그런 옷을 입은 건 반칙이다. 그런, 그런 부드러운 피부를 가진 건 반칙이란 말이다!

에드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자고 있는 루비카를 향해 소리 없이 항의했다. 하지만 그 항의는 더 길어지지 못했다. 그는 흉포한 짐승으로 변하기 전 침실을 떠나야만 했다.

“각하?”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칼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에드가의 모습에 당황했다. 에드가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

“확인하셨습니까?”

에드가는 대답 없이 그의 곁을 지나 달려가기만 했다.

“각, 각하. 그쪽 방향은 집무실이 아닙니다.”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는 에드가를 향해 칼이 외쳤지만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에드가는 순식간에 본관을 나와 정원을 가로질러 뛰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그를 스쳐 지나갔지만 정염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흐릿한 촛불 아래에서 보았건만 루비카의 모습이 눈에 각인된 듯 떠나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가릴 곳만 가린 얇은 천이 그를 더 흥분시켰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상상하고 마는 것이다.

풍덩

어느새 마영석이 즐비한 정원 분수대까지 뛰어온 그는 차가운 물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래도 여전히 몸을 사로잡은 흥분이 가라앉지 않자 그는 그냥 옷을 입은 채로 분수대에 들어가 버렸다. 에드가는 코와 입으로 들어오는 물을 꿀꺽꿀꺽 삼켜버렸다.

“각하!”

칼보다 그의 호위인 스테판이 더 빨랐다. 스테판은 그의 것인 망토를 내밀었으나 에드가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내버려 둬.”

“감기에 걸리십니다.”

“내버려 둬. 그리고 너는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도 내 호위를 하고 있나? 여기는 안전한 내 저택이니 그만 돌아가. 그리고 아무도 오지 말라고 해.”

스테판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에드가는 그대로 분수대 안에서 밤하늘을 보았다. 별을 백 개쯤 세었을 때 흥분이 간신히 가라앉았다. 그는 분수대에서 나와 젖은 채로 앉았다. 당황한 와중에 주머니에 반지를 넣고 와 버렸다. 에드가는 별빛 아래 반지를 꺼냈다.

별빛을 받아 반지가 희미하게 빛을 냈다. 이 반지의 푸른 돌은 햇살 아래에서는 그저 평범한 돌로 보였다. 하지만 별빛 아래에서 돌은 꼭 액체처럼 무늬가 움직였다.

‘생각해 볼 필요도 없어. 이 반지를 이용해 그녀를 과거로 보낸 거야.’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미래의 자신은 눈을 잃은 듯 했다. 얼마만큼의 세월이 지난 것일까. 에드가는 잠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루비카가 말한 아르망에 대해 하나씩 떠올렸다.

‘그동안 고백은 왜 못한 건데?’

제일 처음 든 생각은 그거였다. 그동안 소자식 개자식이라고 욕했던 아르망이 자신이라는 게 정말이지 믿어지지 않았다.

루비카는 아르망-자신이라고 칭하고 싶지 않다- 이야기를 꺼낼 때면 수줍은 듯 볼을 붉혔다. 아르망 또한 루비카를 좋아했다. 그런데 대체 왜 고백을 안 한 걸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루비카가 흔들리는 모습만 보여도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뻤는데 그 배부른 자식은 대체 왜 그런 걸까?

‘낮밤을 가리지 않고 걸을 수 있다니, 저주는 푼 것 같은데……. 아, 설마 눈이 멀어서 걸을 수 있게 된 걸까?’

에드가는 일단 그렇게라도 저주를 풀 가능성이 있다는 걸 머릿속에 넣어 뒀다. 하지만 눈이 멀면 루비카의 사랑스런 얼굴을 볼 수 없으니 그 가능성은 최대한 뒤로 미룰 생각이었다.

‘눈도 안 보이고, 돈도 별로 없는 것 같았어.’

그래서 고백하지 못한 걸까? 그건 아르망이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철저히 부정한 이유였다. 에드가는 어두운 정원에서 자신의 저택을 휙 둘러보았다. 두 개의 별채와 연구소, 그리고 본관까지. 말이 저택이지 성에 가까웠다. 그의 재산은 남아돌아 썩을지언정 모자라지 않았다. 그런데 루비카의 묘사 속 아르망은 무일푼이었다.

‘이 모든 걸 다 잃었다고?’

이해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반란이라도 있었나? 아르망의 이야기를 할 때면 루비카는 눈을 빛내면서도 무슨 말 실수를 하는 게 아닌가 걱정하는 눈치였다.

‘천천히 이야기 해 봐야겠군.’

그는 반지와 그 힘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루비카는 눈치를 보아하니 아무것도 모른 채 과거로 돌아온 듯싶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탁 터놓고 이야기하기 힘들다. 많이 두렵고 힘들었겠지.

‘아르망 그 자식, 귀띔이라도 해 줬어야 하는 거 아냐?’

그녀를 과거로 돌려보내기 전 클레이모어 공작을 찾아가서 반지를 보여 주라든가, 자신이 바로 클레이모어 공작이라는 말 한마디만 했어도 됐다. 그랬다면 모든 일이 이처럼 꼬이진 않았으리라.

“바보 아냐? 그 자식! 그냥 내가 돌아오면 됐잖아!”

다음 생각은 입으로 내뱉고 말았다. 머리에 돌을 맞아 바보라도 된 걸까. 그냥 과거로 본인이 돌아와 기억을 가지고 루비카를 만나면 된다. 그래서 그녀를 설득해 결혼하자고 하면 모든 일이 쉽게 흘러가지…… 않나?

‘갑작스럽기는 그녀도 마찬가지일 거야.’

갑자기 웬 남자가 나타나 청혼을 하면 놀랄 것이다. 그가 사랑을 고백하면 무슨 흑마법에라도 걸려서 제게 이러는가 의심스럽겠지. 일은 결코 쉽게 흘러가지 않았을 것이다. 둘이 동시에 과거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한 사람만 돌아온다면 일이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하!’

갑작스럽게 떠오른 생각에 에드가는 코웃음을 쳤다.

‘잊혀지기 싫었던 거구나, 그 자식.’

그가 과거로 돌아오면 루비카는 자신과의 기억을 모두 잃는다. 그는 계산을 했겠지. 자신이 돌아오는 게 나을지, 그녀가 돌아오는 게 나을지. 아마 그 이기적인 놈-자신이지만-은 그녀에게서 잊혀지기 싫었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모두 기억해 주길 바랐겠지. 그래서 그녀를 과거로 돌려보낸 것이다.

만약 에드가가 지금 자신이 아르망이란 사실을 밝히면 그녀는 분명 기뻐하겠지. 그리되면 기꺼이 그를 사랑하리라. 하지만 그게 과연 에드가 자신을 향한 사랑일까? 그건 에드가를 향한 사랑이 아니다. 그녀는 그에게서 아르망의 자취와 과거를 발견하고 사랑하는 것이리라.

‘지금 사실을 밝히면 난 영원히 아르망을 이길 수 없어.’

뿌득, 에드가는 소리가 나게 이를 갈았다.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리고 사랑받고 싶다. 어떤 남자의 대용품으로서가 아니라 온전히 사랑받고 싶다. 그게 설사 미래의 자신이라 할지라도, 그는 루비카가 자신에게서 누군가의 그림자를 찾아 사랑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말 안 하길 잘했군.’

루비카의 지나치게 자극적인 모습에 그는 사실을 밝히고 뭐고 도망 나왔다. 평소에는 보는 자신이 아쉬울 정도로 두터운 잠옷을 입었다. 심지어 그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야한 잠옷을 주문하려 들자 불같이 화를 냈었다. 그런데 대체 그런 옷을 왜 입은 걸까?

‘설마 날 유혹하려고?’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확실히 그에게 끌리고 있었다. 에드가는 고지가 멀지 않았다 여겼다. 여기서 바보같이 그녀에게 사실을 고백해 아르망이란 놈-바로 자기 자신이지만 아르망에 대한 적대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에게 승기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아르망보다 나를 더 좋아하게 되면 그때 고백하자.’

결심을 굳혔다. 에드가는 축축히 젖은 몸을 일으켜 본관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미워했던 게 미래의 자신이라고 생각하니 그동안의 촌극이 우습긴 했다.

하지만 미래는 미래고 지금은 지금이다. 에드가는 도저히 아르망과 자신이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미래의 자신을 연적으로 두고 싸우기로 했다. 그동안 루비카는 혼란스러워 하겠지만, 자신도 그녀 덕분에 얼마나 혼란스러웠는데 그 정도쯤은 괜찮지 않을까.

‘아르망이 나인 줄도 모르고 머리 아파하겠지.’

루비카는 이미 그에게 흔들리고 있다. 에드가는 확신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에드가는 루비카가 아르망보다 자신을 더 좋아한다고 인정할 때까지 조바심을 내지 않고 기다릴 작정이었다. 누굴 택하든 그녀가 선택하는 건 자신일 테니까.

“각하,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돌아온 에드가의 모습에 칼이 기겁했다. 손목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잔뜩 젖으셨습니다. 지금 당장 따뜻한 물을 준비하겠습니다.”

“……루비카가 깰 수 있으니 욕실 말고 빈방에 준비해.”

“알겠습니다.”

칼은 과거 공작가의 육아실로 쓰였으나 지금은 비어 있는 방에 이동식 욕조를 준비했다. 에드가는 따뜻한 물로 가득찬 욕조에 알몸으로 누웠다. 시종의 옆에서 칼은 조심스럽게 에드가의 눈치를 보았다. 마님의 방에서 갑자기 뛰쳐나가시기에 뭔가 일이 잘못 되었나 싶었는데 공작의 표정은 무척 평온했다. 심지어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그 일은 잘 알아보셨습니까?”

칼의 질문에 에드가가 손을 까딱였다. 목욕 시중을 들던 시종이 바로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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