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46화
이젠 체통이고 하인들의 시선이고 뭐고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루비카의 외침으로 그녀가 한계치에 다다랐음을 눈치챈 에드가가 재빨리 떨어졌다. 그는 언제 웃었냐는 듯 냉정한 얼굴로 돌아와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약속대로 입술에 하지 않았어. 이마 정도는 해도 괜찮다고 너도 허락했었잖아.’
그의 몸짓과 눈짓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루비카는 뭔가 억울하긴 한데 여기서 화를 내는 건 정당하지 못한 것 같고 정확히 정의 내릴 수 없는 분노에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에드가는 루비카의 그런 분노를 모른 척하고 스티븐에게 눈짓했다. 스티븐이 기다렸다는 듯 케이크용 칼로 케이크를 자르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쪽에 사용된 과일은 지난 겨우내 꿀에 절여 둔…….”
그러나 에드가가 귀찮아하는 표정을 짓자 그는 결국 조용히 입을 닫고 에드가가 좋아하는 과일이 얹힌 부분을 잘라 디저트 접시에 담았다. 그리고 시녀장 앤에게 전달받은 대로 자두와 앵두를 비롯한 신과일 부분을 루비카 몫의 접시에 담았다.
“과일은 아이스크림과 함께 먹으면 맛있답니다.”
아쉬운 마음에 한마디 보태 설명하자 에드가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한입 먹고 아이스크림을 한쪽으로 치워 버렸다.
반면 루비카는 그의 설명에 충실히 따랐다.
“어머, 정말 이렇게 먹으니 맛있네. 아이스크림에서 나는 향이 독특해.”
루비카가 한입 먹고 설명을 구하는 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스티븐의 얼굴에 대번 미소가 번졌다. 그가 기다리던 순간이다.
“그건 아이스크림에 사용된 꿀 때문입니다.”
“꿀 때문이라고?”
“네, 여기에 묵직한 꿀보다 좀 가볍더라도 향기가 나는 꿀이 어울립니다. 이맘때 갓 모은 꿀에선 봄꽃 향기가 나지요.”
“아, 꿀마다 특성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걸 이렇게 이용할 수 있을지는 몰랐네.”
루비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하자 스티븐의 마음에 감동이 차올랐다. 이거다. 이걸 기다렸다. 한입 먹을 때마다 내뱉는 감탄과 질문. 그는 이 기분을 느끼기 위해 재료를 고르고 반죽을 치고 뜨거운 오븐 앞을 떠나지 않았으며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에 손을 담갔다 빼 가며 크림을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 네. 꿀뿐만 아니라 우유와 달걀에도 차이가 있지요. 이 케이크에 사용된 달걀은…….”
“스티븐.”
그러나 스티븐의 설명은 시동도 걸기 전에 끝나고 말았다. 에드가는 그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뿐이지만 오랫동안 공작저택에서 일한 스티븐은 그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다.
‘시끄러워.’
“……무척 신선하답니다.”
스티븐은 눈물을 삼키며 긴 설명을 시작도 못하고 끝마쳤다.
“그럼 저는 내일 아침 준비를 해야 해서…….”
“어머, 내가 바쁜 사람을 붙잡았네.”
‘아닙니다. 마님!’
스티븐은 속으로 그리 외치며 에드가의 시선을 피해 황급히 식당을 빠져나갔다.
어떻게 먹어야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는지, 그리고 먹고 있는 음식이 얼마나 대단하고 특별한지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이 떠나는 건 무척 아쉬운 일이다. 루비카가 아쉬운 마음을 떨치지 못하고 포크의 움직임도 멈춘 채 스티븐의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에드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녀에게 날아 들어왔다.
“스티븐이 맘에 드나?”
루비카가 고개를 갸우뚱거린 다음 포크로 케이크를 입에 집어넣었다. 부드러운 크림이 혀에 사르르 녹았다. 이렇게 맛있는 케이크를 만든 사람이 마음에 안 들 리가 있나.
“응.”
“뚱뚱한데?”
“응?”
“키도 작고 대머리야.”
루비카가 무슨 소리냐고 대꾸하기 전 칼이 먼저 헛기침을 했다.
“각하.”
“맛없군.”
에드가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에드가 앞 접시 위 케이크는 마치 새 것 같았다. 루비카는 깨끗이 다 비워진 자기 앞의 접시를 바라보았다.
‘더 먹고 싶다.’
케이크가 무척 맛있어서 하나로는 부족했다. 이렇게 맛있는 케이크를 거의 남기다시피한 에드가가 신기했다. 그리고 아까웠다. 아마 식탁 위에 손대지 않은 나머지 케이크는 만찬이 끝나고 사용인들이 나눠 먹을 테지만 에드가의 접시 위에 올라와 한번 그가 손댄 케이크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주인이 한 번이라도 손댄 음식은 사용인들이 함부로 먹지 못하는 게 규칙이었다.
“에드가, 케이크…… 그만 먹을 거야?”
에드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비카는 그가 먹지 않으면 쓰레기통에 처박히게 될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아깝다. 이대로 버리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맛있는 케이크였다.
“그럼 당신이 남긴 거 내가 먹어도 될까?”
“마님, 그러지 마시고 새로 잘라 드릴까요?”
시종의 말에 루비카가 대답하기 전 에드가는 말없이 자신의 접시를 루비카 앞에 밀어 줬다. 여전히 뭔가 크게 심기가 상한 눈치였으나 루비카는 어차피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상태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포크를 집었다.
케이크는 놀랍도록 모양이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분명 에드가도 포크를 몇 번 움직였는데 케이크의 크림에는 어떤 자국도 남아 잇지 않았다. 대체 뭘 먹은 걸까?
‘……딸기만 없네?’
원래 그 케이크가 있던 부위에는 무척 크고 달아 보이는 딸기가 몇 개 있었다. 에드가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딱 그것만 집어 먹었다는 것이다.
‘편식쟁이.’
루비카는 맛있는 딸기가 사라진 것에 대해 투덜거리면서 케이크를 먹었다. 장식된 과일이 달라서 아까와 조금 다른 맛이 났다. 사라진 딸기가 있으면 좀 더 풍부한 맛이 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르망도 딸기를 좋아했었지.’
하지만 그는 이렇게 딸기만 쏙쏙 집어먹는 얌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물자가 풍부하지 않기도 했지만……. 루비카는 어쩐지 조금 쓸쓸하고 외로운 기분이 되었다.
* * *
식사가 끝난 후, 에드가는 루비카에게 산책을 권했다. 루비카는 처음에 이 야밤에 무슨 산책이냐고 반문했으나 에드가 낮게 웃으며 꺼낸 ‘마영석’이라는 말에 바로 가겠다고 했다.
“와아.”
그리고 정원의 낮은 덤불과 정원수길를 지나쳐 나온 아름다운 빛의 향연을 뿌리는 석상의 모습에 루비카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영석은 마석의 성분이 아주 조금 섞인 돌의 한 종류를 말한다. 불순물이 많이 섞여 마석으로 사용할 없으나, 마석과 섞인 돌의 성분에 따라 어둠속에서 마치 달빛처럼 은은한 빛을 발해 그리 이름 지어졌다. 거기에 클레이모어 저택의 정원에 있는 마영석은 한술 더 떠 그 빛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조각이 되어 있었다.
루비카는 감동에 젖어 눈물이 나올 뻔했다. 마영석에 대해서는 바람결에 들은 바가 있었다. 한 번쯤 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 돌은 무척 귀하다. 아무 돌이나 마석 성분이 섞였다고 빛을 발하지 않았다. 극히 일부만 마치 달처럼 빛을 발했고 이는 차마 값을 매기기 힘들 정도로 귀했다. 이번 생에 꿈을 이루었다. 에드가와 결혼한 게 영 나쁘지만은 않은 일인 것 같단 생각마저 들었다.
“정말, 어쩜 이리 아름다울까?”
에드가는 감탄을 지르는 루비카의 모습에 낮게 웃었다. 그리고 호위에게 그 자리에서 대기하라 손짓하며 스테판에게 눈짓했다. 스테판은 바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호위하라는 명령을 알아듣고 자리를 떠났다.
“안쪽으로 갈수록 더 아름다운 게 있지.”
“더 있다고? 이것보다 더 예쁜 게 있다고?”
루비카는 들뜬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보여 줄까?”
루비카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가는 루비카의 반짝이는 눈빛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그녀가 그를 처음 보았을 때 지은 표정과 비슷했다. 당시 에드가는 그런 그녀는 보며 심드렁하니 ‘또 군.’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그에게 반하는 건 놀랄 일도 아니었다. 다만 표정을 주체 못하는 그 모습이 조금 신기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매우, 신경에 거슬리게도 루비카는 그런 표정을 그에게만 지었던 게 아니었다. 그녀는 종종, 아니, 자주 그랬다. 심지어 오늘 만찬에 들어온 케이크에게조차 그런 표정을 지었다. 아주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에드가?”
그가 안내하기는커녕 자신을 계속 내려다보자 루비카가 잠시 망설였다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드가는 고작 그런데 기분 나빠하는 자신의 유치함에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안내하지.”
마영석 조각이 한데 모여 있는 곳으로 가는 길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가는 동안 에드가는 처음과 달리 점점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호위를 뒤로 물리길 잘했다.
“까아!”
그의 기분은 어둠속에서 튀어나온 무언가 때문에 루비카가 그를 꼭 안았을 때 최고조에 도달했다. 에드가는 타인의 고통을 보며 즐거움을 느끼는 취미는 일절 없었다. 그러나 루비카가 두려움에 벌벌 떨며 몸을 밀착해 올수록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기만 했다.
“쉬이, 다람쥐야. 다람쥐.”
“다람쥐?”
전쟁의 영향으로 루비카는 어둠이나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물체에 민감했다. 어둠 속에 나타난 것 중에 좋은 것을 만난 기억이 여태껏 없었다. 바닥에서 튀어나온 동그란 것이 폭탄인 줄 알았던 루비카는 간신히 안도의 숨을 쉬었다. 여기는 아직 평화로운 곳이다.
“생각보다 겁이 많군.”
웃음 섞인 목소리였다. 발끈한 루비카는 에드가에게서 떨어지고 싶었지만 아직 진정되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그의 팔뚝을 힘 있게 꼬집었다.
“얼마나 가야 하는 거야?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니겠지?”
“설마.”
에드가는 놀라는 루비카를 보기 위해 길을 멀리 돌아가고 싶은 충동과 싸우며 안내했다. 곧이어 나타난 광경에 루비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동그랗게 탁 트인 공간 한가운데 빛을 내뿜은 분수를 가운데에 두고 마영석 조각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조각에서 나오는 빛 때문에 두려움을 물리친 루비카는 에드가의 손을 놓고 본격적으로 구경하기 시작했다.
마영석은 돌의 성분과 마석의 비율에 따라서 각각 다른 빛을 내고 있었다. 대체로 이름대로 달빛처럼 은은히 푸른빛을 내는 것이 대부분인 와중에 붉은빛이나 노란빛을 내는 것도 있었다. 돌도 돌이었지만 루비카는 마영석의 색에 맞춰 조각한 장인의 센스에 감탄을 흘렸다.
“……이건 거의 빛나지 않네?”
작은 아기천사 조각상 앞에서 루비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조각상이라고 여기고 지나갈 뻔했을 정도로 희미한 빛이었다.
“공기 중에 노출된 마영석은 대체로 10년 정도 지나면 빛을 잃지.”
“빛이 사라진다고?”
그 사실은 루비카도 미처 몰랐다. 이건 부는 물론이요 권력을 가진 자가 아니면 구할 수 없는 암석이었다. 희귀하기가 이를 데 없어 대형 상단이 아니면 취급할 일이 없었고 상류 귀족이 아니면 정원에 꾸며 놓을 물건이 아니어서 세간에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더욱 희귀하지. 아무리 캐도 결국에는 빛이 사라지니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는 바람에……. 이미 세리토스 산맥에서 나는 마영석은 다 고갈되었어. 어떤 의미론 마석보다 더 귀한 암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