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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47화 (47/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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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47화

에드가의 설명을 들으며 루비카는 환하게 웃는 천사상의 미소를 다시 꼼꼼히 살펴보았다. 결국 이 마영석은 점점 빛을 잃어 평범한 대리석처럼 보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어쩐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덧없음이 마영석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었다. 빛이 사라져 결국 평범한 돌이 되지 않는다면 마영석은 그처럼 희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돌에 있어 희귀함이란 가치와 함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저 분수는 왜 저렇게 빛나고 있는 거야?”

“안에 마영석이 있기 때문이지.”

에드가가 설명을 더 잇기 전 루비카는 먼저 쪼르르 분수대로 가 새삼스레 분수 안을 관찰했다. 내뿜는 물줄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에드가의 말대로 안에 사람 모양의 빛나는 돌이 있었다.

“저건…….”

“어머니의 모습을 본떠서 만든 거야.”

에드가가 숨을 내뱉듯 단숨에 대답했다. 그는 이가 꽉 물리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웃었다.

“아버지가 주문했었지.”

“아, 멋져라. 전 공작 각하는 정말 대단하신 분이구나.”

“그래. 대단했지. 대단했고말고…….”

루비카는 에드가의 말투에서 씁쓸함을 읽었다. 루비카는 그 씁쓸함을 비명횡사한 가족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우러나오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괜히 아픈 지점을 건드린 것 같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겸 발을 뗄 때였다.

“루비카.”

에드가가 움직이려는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은은하고 아름다운 마영석의 빛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어딘지 음산하고 오싹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저 석상에는 사실 짝이 있지.”

“짝?”

“아버지를 조각한 상.”

루비카는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음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묻지 않으면 에드가가 그녀를 놔줄 것 같지 않았다.

“……그건 지금 어디에 있어?”

“부쉈어.”

“부쉈다고?”

“망치로 몽땅, 내가 직접.”

보통의 분위기였다면 그 비싼 걸 왜 부쉈냐고 따졌겠지만 루비카는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에드가의 표정이 마치 사람 하나쯤은 쉽게 죽일 정도로 무서운 동시에 슬퍼 보였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옷도, 아버지의 옷도 소지품도 모조리 다 불태웠지.”

루비카는 새삼스레 앤이 준비한 옷 중에 선선대 공작 부인의 옷은 있었지만 선대 공작 부인의 옷이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미리 말할게. 내 앞에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꺼내도 돼. 하지만 아버지는……, 전 공작 각하의 이야기는 입도 벙긋하지 마.”

에드가의 경고에 루비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의문이 번졌다. 에드가가 부모님의 물건을 불태우고 석상을 부수다 못해 눈에 띄지 않도록 분수대에 빠트린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괴롭겠지.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부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니까.

그렇다면 에드가의 얼굴에 슬픔과 그리움만 떠올라야 했다. 실제로 어머니의 석상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그랬다. 그러나 전 공작의 이야기를 할 때 그의 얼굴에는 살기와 분노가 서렸다. 그의 슬픔과 그리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마치…… 죽은 아버지를 증오하는 것처럼 보였다.

* * *

잠옷을 입고 침대에 반쯤 누워서 루비카는 에드가에게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따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마침 에드가가 갓 목욕을 마치고 나왔다. 욕탕의 더운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그의 주위에 뿌연 수증기가 떠돌았다.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살짝 가라앉았다. 평소에 에드가가 아름답지만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무척 부드럽다 못해 나른해 보였다.

루비카는 매일매일 색다른 그의 모습에 또다시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이라도 매일매일 보다 보면 질리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에드가는 달랐다. 그는 마치 아름다움의 현신인 것 같았다. 어떻게 인간이 이럴 수가 있을까.

“각하, 말씀하신 것을 준비했습니다.”

에드가가 침대 옆 안락의자에 앉아서 손짓하자 하녀들이 모두 나갔다. 그와 단둘이 한 공간에 있는 건 역시 긴장되지만 덕분에 좀 더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건 다행이었다. 아침의 일 같은 건 역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할 이야기는 못되었다.

“에드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응.”

에드가가 루비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주전자의 물을 포트에 따랐다. 커피라도 끓이려는 걸까? 지금 이 시간에? 루비카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도 말을 계속 이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앤을 비롯해서 시중드는 하녀들이 모두 내 몸에서 당신 향수 냄새가 진동했다고 했어.”

에드가는 까딱하면 주전자를 놓칠 뻔했다. 그는 루비카의 시선을 피한 채 테이블 위 모래시계를 반대로 돌렸다.

“어젯밤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이라니? 이상한 걸 묻는 군. 당신은 날 너무 파렴치한 취급해.”

루비카의 눈이 좀 더 좀 더 가늘어졌다. 발끈하는 모양이 아무래도 수상하다. 원래 제 발 저린 사람이 더 쉽게 화내지 않나.

“그럼 대체 왜 내 몸에서 당신 향수 냄새가 난거지? 나는 저기 끝에서 잤고 당신은 이쪽 끝에서 잤잖아.”

“글쎄.”

모래시계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에드가는 필사적으로 말을 돌릴 궁리를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수상해.”

“수상하다니……. 약속을 어긴다거나 하는 그런 일은 없었어.”

지레 찔려 에드가가 말을 덧붙였다. 마침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졌다 그는 포트의 물을 잔에 따랐다. 루비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상해.”

“왜?”

“별소리 안 했는데 당신이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다고 한 게 무척 이상하고 수상해.”

결국 에드가는 잔 하나를 넘치게 따르고 말았다. 그는 말을 돌리기 위해 재빨리 이상 없는 잔 하나를 루비카에게 내밀었다.

“밤에 커피를 마시면 잠 못 자.”

“이건 커피가 아니야.”

정말 그의 말대로 잔에는 검은 액체 대신 갈색 빛을 띤 맑고 액체가 채워져 있었다. 루비카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자 그가 말을 덧붙였다.

“머리가 아플 때 종종 마시는 거야. 자기 전에 마시면 좋아.”

오늘 아침 칼이 그의 집무실 앞에서 자부심에 넘쳐흘러 설명했던 그건가?

“차?”

“그래, 알고 있었나?”

에드가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차’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왕국민은 드물었다.

“칼이 설명해 줘서 알았어.”

“그랬군.”

루비카는 잠시 고민하다 조심스레 한입 마시고 눈썹을 찌푸렸다.

“이상한 향기가 나, 쓰고 맛없어.”

“그럴 리가.”

잘못 우린 걸까? 에드가가 황급히 자기 몫의 잔을 마셨다.

“향기도 좋고 맛있는데?”

“난 전혀 모르겠어.”

에드가는 루비카가 내민 잔을 돌려받아 테이블에 올렸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료를 루비카가 영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게 내심 섭섭했다.

“계속 마시다 보면 알게 될 거야. 커피가 이것보다 훨씬 쓴데 당신은 설탕도 안 탄 걸 잘만 마시잖아. 이건 커피보다 몸에 좋아. 게다가 사막을 넘어와서 훨씬 더 비싸고 귀해.”

루비카는 침대 앞 의자에 앉아 떠드는 에드가를 말똥말똥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녀가 자신을 계속 바라보자 에드가의 목소리가 작아지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루비카의 눈동자는 분명 어두운색이다. 하지만 에드가는 그녀의 눈이 보면 볼수록 보석처럼 밝게 빛난다고 느꼈다. 쿵, 쿵. 다시 심장이 요란스레 뛰기 시작했다.

오늘은 샴페인도 마시지 않았다. 만찬에 내려가기 전 부른 주치의는 그에게 감기 기운이 전혀 없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왜 이러는 걸까? 왜 심장이 요란스레 뛰는 걸까. 에드가는 자신이 대체 무슨 병에 걸린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에드가.”

“응.”

“한 시야.”

잔뜩 긴장했던 에드가는 루비카의 말에 한숨을 쉬었다. 지난 밤, 그는 밤 한 시가 되면 침실을 떠나 집무실 옆에 딸린 휴게실에서 자기로 약속했다. 사실 그에게 이것은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혹시 있을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항상 하인들을 물리친 후 집무실에 가서 잤었다. 그러나 오늘은 이상하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는 거 보고 갈게.”

에드가의 말에 루비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가기 전에는 자지 않을 거야.”

“무슨 소리야?”

“양심에 손을 얻고 생각해 봐. 내가 당신 앞에서 무방비하게 잘 수 있나.”

양심을 걸지 않아도 에드가는 찔리는 것이 많았다. 다시 생각해 보니 자고 있는 루비카를 그냥 둘 자신도 없었다. 어제 그는 전에는 느껴 본 적 없는 경험을 했다. 그 원인을 명확히 알 수 없는데 자신을 다시 그와 비슷한 상황에 부닥치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알았어. 약속한 시간이니 그만 가지. 대신…….”

“대신?”

에드가는 한참 소파에 앉아 입을 열지 않았다. 루비카는 그가 긴장하고 있음을 느꼈다. 대체 무슨 말을 꺼내려기에 이렇게까지 긴장하고 있는 걸까. 곧 그는 큰 손으로 자신의 무릎을 몇 번 만지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굿나잇 키스를 하게 해 줘.”

“뭐?”

루비카가 격앙된 어조로 당장 나가라고 외치려는 낌새를 눈치챈 에드가가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입술 말고 이마.”

황급히 덧붙인 말에 루비카가 흥분을 가라앉혔다.

“굳이 그런 걸 해야 하는 거야?”

에드가는 문득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가 대체 뭐라고 자신이 구걸이라도 하듯이 이러고 있는 걸까. 그러나 그의 마음을 배신하고 그의 입은 또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통이야.”

“전통?”

“클레이모어가의 가족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이지. 자기 전에 굿나잇 키스를 하는 건.”

루비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오전, 루비카에게 클레이모어식 예절을 익혀야 함을 구구절절 성토한 셰니에 부인의 예절 리스트에는 그런 구절이 없었다.

“나는 들어 본 적 없어. 그리고 예법을 책임지는 셰니에 부인이 가져온…….”

“셰니에가 모르는 건 당연해. 그건 클레이모어 직계 가족만 아는 거야.”

당연하지만 그런 전통은 없다. 에드가는 자꾸만 거짓말을 해대는 자신의 입을 꾸짖고 싶었으나 이젠 그럴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 이제 한 걸음 물러서면 루비카는 자신을 더욱 의심하기만 할 것이다.

“하지만 에드가, 우린…… 중간에 일이 꼬인 바람에 진화 차원에서 어쩔 수 없이 결혼한 거잖아. 사람들이 보는 앞이면 몰라도 굳이 단둘이 있을 때 그럴 필요는 없어.”

루비카는 에드가에게 조곤조곤 설명하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가 한마디 할 때마다 에드가의 얼굴에 낙담한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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