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45화
‘미안해. 앤.’
루비카는 사죄의 마음을 담아 앤을 바라봤다. 그런데 뜻밖에도 루비카와 에드가를 바라보는 앤의 얼굴은 흐뭇함 그 자체지 않나.
루비카는 당황해서 식당의 하인들을 쭉 둘러보았다. 분명 그들의 얼굴에는 약간의 당혹과 짜증이 섞여 들어 있었으나 그건 단순한 기분 나쁨만은 아니었다.
그래, 저 표정은 루비카도 종종 지었던 표정이었다. 그건…….
‘부부싸움 구경할 때나 짓는 표정이잖아!’
그것도 방금까지 투덕거렸다 화해하고 껴안은 사이좋은 커플을 지켜볼 때 ‘너희들이 그러면 그렇지.’ 할 때 짓는 표정이었다.
“칼, 자네는 3개월 치 연봉 삭감이네.”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칼에게 건네는 에드가의 말에 루비카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손을 풀고 자리에 다시 앉으려는 에드가의 팔을 잡았다.
“에드가, 칼은 그냥…… 실수한 걸 거야. 사람이 살다 보면 가끔은 실수할 때가 있잖아.”
루비카의 말에 에드가는 잠깐 머뭇거렸다.
“그럼 취소하지.”
루비카는 간신히 가슴을 쓸고 의자에 다시 앉았다. 그 사이에 접시 위의 요리는 다 식고 말았다.
“마님, 어떻게 할까요?”
멧새요리는 무척 맛있었다. 에드가와 싸우느라 고작 한 입 정도 먹은 게 아쉬울 정도였다. 루비카는 번거로운 일을 시켜 미안한 마음을 누르고 조그맣게 말했다.
“다시 데워 줄 수 있을까?”
“주방에 그리 전하겠습니다.”
시종이 루비카의 주문에 아주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 웃으며 접시를 들자 에드가가 손짓했다.
“아니, 그냥 새로 내오게.”
“네, 각하.”
기다렸다는 듯 다른 시종이 에드가의 접시도 들고 나갔다. 역시 갑질도 해 본 놈이 해야 하는 건가. 아예 요리를 다시 해 오라고 시키는 건 루비카는 생각도 못해 봤다.
사실 요리가 식은 것도 시종이나 하녀의 잘못이 아닌 두 사람이 싸워서 생긴 일이 아닌가. 데워 달라 말하면서도 어쩐지 미안했다.
‘……그런데 다시 해 오라고 한 건 좋은 판단은 아닌 것 같아.’
방금 먹은 멧새요리는 대충 만든 요리가 아니었다. 한입 베어 물자 육즙과 함께 마리네이드한 레몬과 와인의 향이 물씬 났다. 데우는 것도 아니고 다시 만들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지. 그렇다고 대충 만들어 오면 저 갑중의 갑인 에드가가 가만히 있을 성격도 아니었다.
무료한 시간이 지났다.
에드가는 뒤늦게 자신이 한 판단이 썩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색해서 도저히 루비카 쪽을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다리를 꼰 채 식탁 가운데 화병에 장식된 화려한 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런데 에드가.”
침묵을 깨고 루비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에드가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고 루비카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그녀는 분명 미소를 짓고 있긴 한데 어딘지 차가웠다.
“장미꽃 이야기는 왜 나왔어?”
“아.”
“세사르 경과의 이야기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냐는 소리는 또 뭐야?”
그 에드가조차도 등에 식은땀이 흐를 수밖에 없는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루비카에게 뭐라 변명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칼이 이번에는 지체 없이 나섰다.
“마님, 모든 것이 제 잘못입니다.”
“일렀군요.”
“……네.”
“3개월 치 연봉 삭감 취소를 취소해.”
루비카의 단호한 표정에 에드가는 변변찮은 변명 한마디 꺼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마님, 제가 중간에 집사에게 말을 잘못 전달하는 바람에…….”
일이 어찌 흘러간 건지 눈치챈 앤이 사색이 되었다. 루비카는 한숨을 참지 않았다. 앤의 관심과 수다가 싫지 않았지만 이게 이렇게 독이 되어 돌아올 줄이야.
“앞으로 조심해.”
“네.”
한바탕의 소동이 지나가자 더 어색한 시간이 찾아왔다. 멧새요리를 먹고 그다음에 나온 농어 요리를 다 먹어 갈 때까지 루비카와 에드가 사이에는 침묵만 흘렀다. 결국 루비카가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냈다.
“방금 하려던 이야기였는데……. 에드가.”
“세사르 경의 장미꽃 개발 이야기인가?”
“그래, 스케치를 보았는데 무척 예쁜 장미꽃이었어. 솔직히 말해서 그분이 하신 말씀은 너무 어려워서 잘 알아들을 수 없었어. 하지만 오랫동안 연구하셨고 꽃을 사랑하는 분이고 그분의 성정을 봤을 때 아예 불가능한 소리를 꺼낸 것 같진 않았어. 그분이 개발한 꽃으로 정원을 꾸미고 싶어. 딱히 예산에 큰 무리가 있는 것도 아니니 투자하려고 해. 괜찮겠지?”
물론 괜찮다. 아니, 아예 자신에게 이런 허락 따위를 구할 이유가 없다. 공작 부인 앞으로 배정된 예산을 어찌 쓸지 결정하는 건 루비카의 권리였고 에드가는 거기에 조언할 수 있을지언정 결정을 번복시킬 수 없다.
하지만 에드가는 그런 말을 하는 대신 싱글싱글 웃었다. 바로 루비카가 긴장했다. 그가 던질 폭탄에 대비하는 모양새였다. 이상하게 그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보기 좋았다.
“허락하면 키스하게 해 줄 건가?”
“뭐?”
그러나 루비카의 경악에 찬 대답은 그 순간 식당에 들어선 스티븐의 우렁찬 목소리에 묻혔다.
“각하와 마님께서 결혼하여 맞이하신 첫 번째 날을 축하드립니다!”
루비카의 말에 감명을 받은 스티븐은 온 힘을 다해 케이크를 만들었다. 꿀에 절인 과일과 신선한 봄꽃으로 꾸며진 2단 케이크 위에는 설탕 공예로 만든 1이라는 숫자가 커다랗게 꽂혀 있었다. 시종이 잽싸게 농어 접시를 치우자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딸기 소르베를 에드가와 루비카의 앞에 직접 놓았다.
“이건 무슨 소동이지?”
“네? 마님께서 각하와의 결혼 첫 번째 날을 기념하고 싶다고 하셔서 준비했는데요.”
에드가의 차가운 말투에 스티븐이 당황하며 설명했다. 덕분에 루비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가 바란 것은 그저 접시 하나를 겨우 채울 크기의 작은 케이크와 커다란 수저로 한번 뜨면 끝나는 크기의 아이스크림 정도였다.
“아, 그러니까 나와의 첫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이런 거대한 케이크를 준비했다는 말이군.”
“……응.”
에드가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루비카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이면 맛있는 케이크를 먹고 싶다는 욕망에 스티븐을 지나치게 잘 설득한 죗값을 이렇게 치를 줄이야.
물론 케이크는 겉보기에도 맛있어 보이는 차원을 뛰어 넘어섰다. 케이크에 대한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부은 스티븐은 식탁에 케이크를 올리고 난 뒤에도 주방으로 가지 않고 싱글벙글 웃으며 옆에 서 있었다.
그는 공작이 요구만 한다면 오늘 닭이 갓 낳은 달걀과 일주일 전 들여온 최상급 설탕, 방금 짠 소 젓을 이용해 머랭을 치고 크림을 만들었다고 설명할 참이었다.
아니, 제발 설명을 요구하길 바랐다. 오늘 만든 케이크는 그의 일생의 걸작이니까.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질문을 들어오지 않았다. 심지어 마님은 빨개진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좋지 못한 때에 들어온 것 같아 스티븐은 옆에 있는 시종에게 속삭이듯 질문했다.
“혹시 두 분 무슨 이야기 중이셨…….”
“키스에 대해 이야기 중이었지.”
스티븐의 질문에 대해 답한 것은 시종이 아닌 에드가였다. 그의 입가에는 악마적인 미소가 머물고 있었다.
“오!”
스티븐은 자신이 마님과 각하의 로맨틱한 이야기를 방해했단 사실을 깨달았다. 결혼 첫날을 기념할 정도로 사이좋은 부부이다. 스티븐은 자신이 만든 완벽한 케이크와 분위기에 취해 에드가가 ‘키스’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불편해 보였던 루비카의 표정을 놓쳤다. 설사 눈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그는 그저 마님이 부끄러워한다고 여기고 말았을 것이다.
“기념의 마무리로 키스만한 것이 없지요.”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웃음기 서린 에드가의 목소리에 루비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는 원망 서린 눈초리로 에드가를 잠시 째려보았다. 그러나 에드가는 미안해하기는커녕 그녀의 그런 시선을 즐겼다. 하는 수 없이 루비카는 말려 달라는 눈짓을 하기 위해 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헉!’
그러나 자신을 보는 앤의 눈은 기대감으로 초롱초롱 빛났다. 어서 키스해 주길 바라는 눈빛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뒤에 있는 시종도, 하녀도 모두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와중에도 무언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때?”
에드가가 의자를 휙 젖히고 다가왔다. 루비카는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그는 길고 흰 손가락으로 루비카의 턱을 잡아 올렸다. 에드가는 정말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았다.
“이렇게 결혼 첫날을 기념하기 위해 케이크까지 준비한 정성에 대한 감사 인사로 적절하다고 보는데?”
마음 같아서는 같잖은 수작 집어치우든가, 당장 떨어지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식당에 있는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생각하자 루비카는 그 자리는 도저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신이 매몰차게 거절하고 난 뒤 에드가의 기분이나 입장은? 게다가 에드가는 결혼 전부터 자신의 체통이나 자존심 같은 것에 대한 집착이 있어 보였다. 어쨌든 여기는 그의 저택이고 하녀와 시종들은 모두 그의 사람이다. 자신이야 바람처럼 왔다 떠나면 그만이지만 에드가는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루비카는 어린 시절부터 아랫사람들 앞에서는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아 왔다. 가까운 하녀 외에는 속내를 드러내지 말고 부부싸움은 최대한 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할 것. 아이를 혼낼 때도 하인들이 지켜보는 곳에서 하지 말라고 배웠다.
그래서일까? 이처럼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에드가를 거절하는 건 아무리 루비카라도 쉽지 않았다. 거절하면 그도 민망하겠지만 루비카도 민망해질 것이다. 그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푹 익은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에드가는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루비카는 점점 다가오는 그의 얼굴에 당황해 눈을 감았다. 도저히 두 눈을 뜨고 그를 볼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하지만 이번엔 절대 호락호락 넘어가 주지 않을 거야.’
저 인큐버스 같은 놈이 아무리 부드러운 촉감으로 유혹해도 입술 그 이상은 허락하지 말아야지. 이건 신의 시련이야. 결혼식 때의 키스야 갑작스러워 어떻게 대처하지 못했지만 이번은 입술 안까지 침입하게 만드는 일을 일어나지 않을 거야.
찰나의 순간 루비카는 많은 다짐을 하고 가혹한 시련을 준 휴 신을 원망하는 동시에 용서를 구했다.
‘응?’
그러나 보드라운 무언가를 닿은 곳은 입술이 아니라 이마였다. 깜짝 놀라 루비카가 눈을 뜨니 그녀의 눈앞에서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결 좋은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있었다.
“큭큭큭.”
그는 루비카의 목과 어깨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웃음을 참고 있었다. 웃음 때문에 쇄골에 에드가의 숨이 자꾸만 닿았다. 루비카의 얼굴은 이제 사람이 그리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빨개졌다.
“떨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