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31화 (31/212)

# 31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31화

물론 앤이 요구한 - 단면을 자르면 비둘기가 훨훨 날아가 축복을 부르는 – 파이까지는 준비하지 못했으나, 대신 육해공의 모든 산해진미를 다 모은 듯한 요리와 크림을 잔뜩 발라 마치 성처럼 꾸민 케이크도 있었고 럼주를 가득 넣은 초콜릿도 있었다.

기분 나빠 보이는 표정 때문에 평소보다 미모가 떨어진 에드가에게 신경 끄고 루비카는 하객 하나하나를 살피기 시작했다. 준비하는 시간은 비록 짧았으나 새로운 공작 부부의 결혼식 피로연이었기 때문에 성내 식구들은 하나같이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음, 저분은 정말 학자 같은 옷을 입고 있네. 저렇게 커다란 모자를 쓴 건…… 머리숱이 없는 걸 가리려고 그런 건가? 하지만 얼굴이랑 잘 어울려서 보기 좋아.’

클레이모어의 연구자들을 한차례 훑은 다음에는 기사들을 보았다.

‘……저 남자, 확실히 잘생기긴 했어.’

스테판은 우연히 공작가의 보고에서 마주쳤을 때보다 훨씬 더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공작의 호위를 직접 맡은 자였다. 다른 기사들보다 지위가 높아보였다. 그리고 스테판 옆에서 붙어 있는 기사들은 확실히 루비카의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몸을 단련한 자들의 근육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활기가 넘친다.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보는데?”

루비카의 시선이 가는 곳을 눈치챈 에드가가 인상을 찌푸렸다. 루비카는 지금 이 자가 나를 비난하는 건가 싶어서 기도 안 찼다.

“같은 클레이모어가 식구잖아. 얼굴을 외우려 했을 뿐이야.”

하지만 그게 얼굴을 외우려 한 시선이야? 노골적으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고 방금 저 기사는 가슴팍을 뚫어지라 쳐다봤잖아.

에드가는 목까지 치밀어 오르는 말을 삼켰다. 기분 나빴다. 루비카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게.

하지만 이 사실을 그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러면 약점이 잡힐 것 같았다.

“사람들이 오해하겠어.”

“앤, 샴페인을 좀 더 먹을 수 있을까?”

루비카는 아예 그의 말을 티 나게 무시하고 옆에 있던 앤에게 말을 걸었다.

“부인, 샴페인은 한 잔이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뱃속의 태아가 걱정되었던 앤이 간곡히 돌려 말했다. 루비카는 앤의 뜻은 몰랐으나 어차피 처음부터 샴페인이 먹고 싶어서 꺼낸 말이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앤이 샴페인 대신 따라 준 물을 마셨다.

“각하도 물을 드시겠습니까?”

앤의 말에 에드가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신을 보는 그녀의 흐뭇한 눈에 움찔 놀랐다.

‘각하, 지금 질투하시는 거로군요.’

아니다.

질투라니. 그건 결코 아니었다.

에드가는 억울했다. 그러나 갑작스레 질투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건 주변에 자신이 질투하고 있다고 알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빌어먹을 자존심이 에드가에게 그리 명령하고 있었다. 일단 입을 다물어.

“물은 됐어.”

에드가는 그리 대답하고 샴페인을 다시 마셨다. 얼굴에 열이 훅 끼치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빨리 감기약을 먹어야겠다.

“칼은 어디 있나?”

“저기 있네요. 각하, 제가 부르겠습니다.”

앤이 하인들을 지휘하고 있는 집사 칼을 부르러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루비카는 다시 기사들 쪽을 관찰했다간 에드가가 폭발할 것 같아 이제 공작저 내에 기거하는 그들의 친척들 쪽으로 시선을 옮겨 구경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들은 피로연에 참가한 다른 하객들보다 월등히 좋은 옷과 장신구로 자신들을 치장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루비카를 무슨 원수 보듯 노려보는 사람도 있었으나 루비카는 그냥 그들을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렇게 한참 사람들을 관찰하던 차 루비카의 눈을 사로잡은 한 사람이 있었다. 공작가의 하객석 가장 말석에 앉은 소녀.

휘황찬란한 비단옷을 입은 주변 사람들과 달리 그녀가 입은 옷은 남루한 편이었다. 소녀는 주눅이 든 표정으로 연신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레 음식을 먹고 있었다.

머리위에 쓴 녹색 모자는 퍽 우스꽝스러워 그녀가 가진 금발 머리의 아름다움을 모조리 빼앗아 버리고 있었다. 피부 결은 거칠었고 자세는 구부정해 남들이 보기에는 결코 미녀의 끄트머리에도 그 이름을 올려 줄 수 없을 듯했다.

그러나 루비카에게는 달랐다.

‘세상에, 저런 요정이!’

루비카는 단번에 소녀가 숨기고 있는 미에 홀렸다. 아직 개화하지 못했을 뿐 소녀는 그 안에 무궁무진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었다.

그녀에게 적절한 음식을 제공하고 피부에 그에 맞는 관리를 해 준다면 소녀는 분명 호평을 받는 수준을 넘어 사교계의 여왕이 되리라. 루비카는 당장 그녀에게 달려가 머리를 손질해 주고 어울릴 만한 예쁜 옷을 입혀 주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했다. 하지만 자신은 피로연장의 신부였고 이제 공작 부인이었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저 아기사슴 같은 요정은 당장에 기겁하겠지.

‘신중히 접근해야 해.’

겁이 많아 보이는 소녀였다. 무턱대고 호의를 뿌리며 다가가면 안 된다. 오히려 그럼 부담스러워서 도망칠 타입이었다. 루비카는 일단 소녀의 신원을 알아보기 위해 앤을 부르려 했다. 하지만 앤은 칼을 찾아 자리를 떠난 상태였다.

‘음, 생각해 보니 앤에게 물어보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시녀장 앤의 성격을 미루어 봤을 때 그녀는 요정을 꾀어내기에 좋은 타입이 아니었다. 앤에게 요정에 대해서 물어보면 분명 그녀는 귀여운 요정의 심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저돌적으로 돌진해 수다란 무기를 휘두르며 요정을 잡아 올 것이다.

그럼 저 겁 많은 요정은 마음의 문을 꼭꼭 닫겠지.

‘어떡하지?’

루비카는 문득 옆에 있는 에드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공작가의 친인척이라면 에드가만큼 잘 알 사람이 없었다. 에드가는 루비카가 보고 있는 걸 눈치채지 못한 듯 잘 구워진 백조의 날개를 우아하게 자르고 있었다.

어쩜 고작 고기를 나이프로 써는 손에서 저런 퇴폐적인 느낌이 날 수 있을까?

군더더기 없이 잘린 살코기를 입에 가져가는 동작과 마치 선악과를 먹는 것처럼 유혹적으로 벌어진 입술까지 그는 정말 사람을 홀리기 위해 탄생한 존재 같았다. 그가 유혹하면 어느 누가 견뎌낼 수 있으랴. 요정도 에드가의 유혹이라면 넘어 오지 않을까?

‘에드가에게 물어볼까?’

하지만 청혼부터 결혼까지 그가 일을 처리한 솜씨를 보았을 때 에드가는 질문하자마자 그냥 이 자리에서 칼에게 명령해 요정을 바로 루비카에게 데려올 타입이었다.

거기까지는 그래, 그럴 수 있다. 단점도 있지만 일을 빨리 처리했단 장점도 있지. 하지만 여태 에드가가 루비카에게 한 언행을 돌이켜 보자 그녀의 팔에서 대번 소름이 돋았다.

세상에! 루비카의 귀여운 요정이 에드가가 한 말에 상처받아 훌쩍훌쩍 울며 클레이모어 공작저라는 보금자리에서 도망치는 미래가 바로 떠올랐다.

‘탈락 아니, 접근금지.’

루비카가 에드가를 보던 시선을 거두고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흰 빵을 집었다.

“버터? 아니면 쨈?”

이상하다. 분명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가 빵을 찍어 먹을 소스를 찾고 있는 걸 알았지?

“꿀이로군.”

에드가가 꿀을 담은 작은 접시를 루비카 쪽으로 밀었다. 루비카는 반사적으로 접시에 담긴 꿀에 빵을 찍어 버렸다. 에드가는 그런 루비카의 모습에 나직이 웃더니 곧 그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는 친척 쪽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재수 없어.’

그냥 주면 되지 꼭 덜 떨어진 사람 보듯이 웃을 필요는 뭐가 있나. 루비카는 적당히 달콤해진 빵을 먹으며 투덜거렸다.

에드가는 그게 문제다.

우아한 대신 꼭 다른 사람들을 조롱하는 듯한 행동. 그녀의 작고 상처받기 쉬운 요정에게 에드가는 독이다. 절대절대 접근 금지다.

‘……내일부터 공작가 사람들이 내게 인사를 하러 올 테니 만날 기회가 있을 거야.’

대부분의 귀족가는 새로운 귀부인, 즉 안방마님이 들어오면 그 근방에 사는 친척이 하나둘 인사를 하러 온다. 그들은 인사를 핑계로 귀부인이 쥐고 있는 열쇠를 요리조리 돌리기 위해 온갖 꾀를 내기 마련이다.

그녀의 작은 요정은 그런 타입으로는 안 보였으나 그녀가 앉은 자리의 위치를 보았을 때 근방에 사는 친척도 아닌 저택의 별채에 기거하는, 이른바 객식구 중 하나였다.

이 경우 객식구들은 앞으로도 편안히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식구로 살아가기 위해 새로운 공작 부인의 호의를 사려 안부 인사를 하러 오는 게 보통이었다.

‘자연스럽게,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겁 많은 요정은 조금이라도 상대가 적극적인 기미를 보이면 뽀로롱 날아 도망쳐 버리는 수가 있다. 루비카는 일단 요정이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 * *

피로연이 슬슬 끝날 무렵, 루비카는 공작 부인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어제도 이곳에서 밤을 보냈기에 영 어색한 곳은 아니었다.

다만 어제와 달리 화려한 부아즈리가 장식되어 있었던 벽 하나가 사라졌다. 사라진 벽 너머 반대편 공간에는 벽난로와 편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소파, 그리고 가끔은 업무를 볼 수 있는 책상과 책장이 있었다.

루비카는 자신의 예감이 틀리기를 빌며 앤에게 질문했다.

“저쪽 방은?”

“각하의 방입니다.”

젠장, 예감이 맞았다. 손에서 땀이 나는 걸 루비카는 간신히 참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벽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 참, 제가 설명을 깜빡했네요.”

앤은 부아즈리가 있었던 옆쪽 벽으로 가 그곳에 조각된 큐피드를 가리켰다.

“여길 왼쪽 눈을 누르면 벽이 닫히고요. 오른쪽 눈을 누르면 열립니다.”

다행이었다. 루비카는 에드가가 돌아오면 당장 저 큐피드의 왼쪽 눈을 눌러 벽을 세운 다음 서로 각자의 방에서 따로 자자고 할 생각이었다.

“알려 줘서 고마워. 앤.”

“……저 마님.”

결국 앤이 견디다 못해 말을 꺼냈다.

“각하께 왜 그리 편히 말씀하십니까? 음, 마님께 이런 말씀을 드려 죄송하지만 친척분들이 각하를 우습게 여길 수 있어요. <귀부인의 지침서>에도 남편에게 존댓말을 써서 존경을 표하고 권위를 세워주라고 나와 있어요.”

각오했던 질문이다. 루비카는 에드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반발할 것을 알고 있었다.

“앤, 남편이 부인에게 반말을 해야만 부인이 존댓말을 해야만 세울 수 있는 권위란 얄팍하기 짝이 없어. 휴 신의 성서에는 부부는 동등하다고 나와 있어. 어디에도 부인은 남편에게 존댓말을 써라. 남편은 부인에게 반말을 쓰라고 나와 있지 않아. 휴의 사제 또한 부부는 서로 원하는 대로 부를 권리가 있다고 말씀하셨어.”

루비카가 수도원에서 일하며 배운 것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신을 운운하면 입을 닫는다. 특히 세리토스 왕국은 험난한 자연환경 때문인지 믿음이 깊었다.

역시 예상대로 앤은 할 말이 많은 눈치였으나 ‘신’이 입에 오르자 납득을 하였다.

“어느 사이에 그리 깊은 말씀을 나누셨습니까?”

심지어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앤은 두 사람이 합의한 걸로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그녀는 에드가의 본 성격을 알고 있다. 합의가 아니면 에드가는 루비카가 자신에게 반말을 하게 둘 사람이 아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