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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32화 (3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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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32화

정말 해가 서쪽에서 뜰 지경이었다. 에드가가 루비카에게 기꺼이 반말하는 걸 허용하다니. 그가 루비카를 깊이 사랑하는 건 부정할 여지가 없는 진실이었다.

“그렇죠. 부부는 서로 허물없는 것이…….”

앤이 다음 말을 하려는 순간, 제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욕물이 준비되었습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마님 어서 씻을 준비를 하세요.”

앤의 손짓에 따라 하녀들이 루비카의 옷을 바쁘게 벗겼다.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꽁꽁 묶고 있던 끈이 풀리자 ‘끙’ 소리가 날 정도로 머리가 시원했다. 루비카는 바로 따뜻한 물이 가득 담긴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마님, 온도는 괜찮은가요?”

“딱 좋아.”

“참, 많이 피곤하셨죠? 물에 자몽 껍질을 갈아 넣었어요. 한결 상쾌해지실 거예요. 그리고 여기에 안센 수도원에서만 만들 수 있는 연꽃 향과 무화과나무 오일을 살짝 첨가했어요.”

“으응.”

욕조에서 나는 기분 좋은 향기에 취해 루비카는 잠이 오는 걸 겨우 참았다. 제니는 설명을 더 하는 게 좋지 않다는 판단이 들어 말없이 루비카의 어깨를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무거운 보관과 장신구 때문에 루비카의 어깨가 많이 뭉쳐 있었다.

‘아, 이런 졸 뻔했어.’

욕조에 첨가한 것 중 어디에도 잠이 잘 오는 것이 없었으나 제니는 루비카를 마사지하다 말고 깜빡 잠에 들 뻔 했다.

‘하긴 오늘 하루 결혼식이니 피로연 준비니 일이 많았지. 마님도 나도 피곤할 만해.’

제니는 마지막으로 머리를 마사지하고 잠시 고민하다 욕조에 사향을 살짝 넣었다가 뺐다. 이성을 흥분시키는 사향은 너무 많이 쓰면 특유의 꿉꿉한 냄새가 난다. 이렇게 아주 살짝 섞어 줘야 무엇이 들어갔는지 눈치채지 못한 채 야릇한 기분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자, 다 됐어요.”

제니와 다른 하녀들이 커다란 수건을 가져와 루비카를 꼼꼼히 닦아 주었다. 그리고 앤에게 루비카가 입을 잠옷을 건네받은 제니는 당황했다.

“시녀장님, 이건?”

새신부가 입을 만한 작은 잠옷이나 속이 훤히 비칠 만큼 얇은 잠옷이 아닌 보수적인 면 잠옷이 제니의 손 위에 올려졌다.

“아직 3월이어서 추워요.”

“하지만…….”

앤은 임산부인 루비카가 지나치게 노출이 많은 잠옷을 입으면 건강에 좋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렇다고 이를 곧이곧대로 제니에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앤은 할 수 없이 매우 엄격하고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잔말 말고 입히세요.”

“네.”

보수적인 잠옷을 누구보다 반긴 건 루비카였다. 혹시나 첫날밤이란 이유로 속이 훤히 다 비치는 옷을 잠옷이라 내밀까 걱정했는데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루비카는 기분 좋을 만큼 보드라운 면 잠옷을 입었다.

“그럼 좋은 시간 되세요.”

이윽고 앤과 제니를 비롯한 하녀들이 일제히 인사하고 썰물처럼 방을 빠져나갔다.

루비카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자 재빨리 침대 옆의 협탁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다행히 잘 있네.’

서랍 안 차곡차곡 쌓인 장갑 틈 사이에 손을 넣자 아르망의 푸른 반지가 느껴졌다. 반지의 차가운 촉감에 긴장이 사르르 풀렸다.

‘상자 같은 걸 구해서 넣어 두면 좋을 텐데, 사탕 통 같은 거라도 찾아봐야 하나.’

문득 하품이 나왔다. 서랍을 닫고 루비카는 눈을 비볐다. 질 좋은 비단으로 된 침대가 그녀를 유혹했다. 하지만 루비카는 침대에 눕지 않고 공작의 방 쪽을 향했다.

‘여길 열어 두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 될 테니 구경해야지.’

자꾸 감겨오는 눈꺼풀과 사투를 벌이며 루비카는 공작의 방을 구경했다. 화려하고 오밀조밀하게 꾸며진 공작 부인의 방과 달리 공작의 방은 지나칠 정도로 단순했다.

‘이 방은 공작의 개인 서재인가? 다행히 침실이 바로 연결된 구조는 아닌 것 같아. 음, 일단 서재나 구경해 볼까?’

루비카는 방을 한 바퀴 휙 돌아본 다음 마호가니 책상 가까이에 갔다. 방에서 쉴 때조차 틈틈이 일하는 듯 책상 위에는 제도용 자와 잉크, 펜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정리 벽이나 결벽증이 있는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놓인 하얀 종이를 무심히 보던 루비카의 눈에 글자 하나가 들어왔다.

‘스텔라.’

종이 모퉁이에 아주 조그맣게 그리 적혀 있었다.

“거기에서 뭘 하는 거지?”

“헉!”

갑작스레 들린 에드가의 목소리에 루비카가 흠칫 놀랐다. 언제 왔는지 에드가가 벽에 기댄 채 루비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 보통 신랑이란 존재들은 밤이 깊도록 하객들과 술을 진탕이 되도록 퍼마시다 와야 하는 거 아닌가. 아직 머리카락 끝이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일찍 오다니.

“그냥 구경 중?”

“구경?”

“조금 궁금해서…….”

에드가의 입꼬리 하나가 살짝 올라갔다.

“내가 궁금해?”

“아니, 전혀!”

입꼬리는 원래 위치보다 살짝 아래로 돌아갔다.

“그냥 이 마호가니 책상이 어느 공방 것인지 궁금했을 뿐이야.”

“아.”

에드가가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무역상이었지.”

별 뜻 없이 한 말이었다.

그러나 루비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그제야 에드가는 자신이 한 말이 루비카에게 어떤 의미로 들렸는지 깨달았다.

‘상인의 딸이어서 그런가. 오자마자 가구의 가격이나 매기고 있었군.’

결단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해도 억울하다 여길 수도 없을 정도로 전적이 화려했다.

‘……말을 하지 말자.’

이 어색한 상황을 벗어날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더 악화시키지 않을 방법은 있었다. 바로 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입을 다무는 것.

에드가는 굳은 표정으로 재킷과 조끼를 벗었다. 그리고 소매의 단추를 열기 시작했다.

“꺄아! 지금 뭐 하는 거야!”

말하지 않고도 상황을 악화시키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처음 알았다. 루비카가 벽에 바짝 붙어 소리를 질렀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하녀와 시종이 들어오지 않은 게 용할 정도였다.

“뭐 하냐니, 씻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씻……씻을 준비?”

그제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루비카가 에드가를 아래에서 위로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는 결혼식 때와 마찬가지 차림이었다. 목욕을 마치고 잠옷까지 입은 루비카와 달랐다.

“욕실에 가서 하면 되잖아!”

참 이상하게도 앤이나 다른 하녀에게는 한참 망설인 끝에 나온 반말이 에드가 앞에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술술 잘도 나왔다.

“옷을 욕실에서 벗으라고?”

“그래!”

“그럼 벗은 옷을 둘 곳이 없잖아.”

에드가의 반문에 루비카는 기가 막혀 잠시 숨을 골랐다. 어쩜 이렇게 상식이 없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이게 그의 상식이겠지.

‘평생 남의 수발을 받고 살던 도련님.’

그러고 보니 재킷과 조끼를 벗는 폼이 영 어색했다. 단추를 여는 손가락이 몇 번이고 미끄러졌었지. 루비카는 바늘로 콕 찔러도 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에드가가 어설프게 행동하는 모습에 쿡 하고 웃음이 나왔다.

“지금 웃었나?”

에드가가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와 루비카에게 물었다. 루비카는 그러거나 말거나 성큼성큼 걸어 침대 위에 놓여 있던 에드가의 잠옷을 집었다.

그리고 수도원에 갓 입소한 환자를 대하듯 사근사근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 옷을 욕탕에 가지고 가서 문 옆에 있는 옷걸이에 걸어 두고 문을 살짝 열어 놔요. 입고 있는 옷은 벗을 때마다 열린 문틈으로 바깥에 둬요. 다 씻고 나온 다음에 바닥에 있던 옷은 정리해서 한쪽으로 치워 놓으시면 좋아요.”

“갑자기 왠 존대…….”

“참, 물 트는 방법은 아세요?”

에드가의 고운 눈썹이 찌푸려졌다. 자신을 명백히 바보 취급하는 루비카의 태도에 화가 났다.

“……그 정도는 알고 있어. 비누가 어디 있는지, 자주 쓰는 향수가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어.”

“어머, 다행이네요.”

에드가는 짜증스럽게 대답하곤 옷을 받아들고 성큼성큼 욕실로 갔다. 그리고 살짝 열린 문틈으로 셔츠와 바지가 툭툭 떨어졌다.

곧이어 물소리가 들렸다.

‘아예 생활감 없는 건 아니네.’

루비카는 어깨를 으쓱하고 침대에 앉았다.

다섯 명이 누워도 될 것같이 넓은 침대는 무엇으로 안을 채웠는지 푹신하기 그지없었다. 피곤하긴 했는지 또 졸음이 몰려와 하품했다.

‘뭐, 공작의 방은 다음 기회에 구경할까?’

굳이 지금 보려 하지 않아도 될 듯싶었다. 에드가는 바쁜 사람이니 회의니 뭐니 저택을 비울 일이 많을 테고 그때를 틈타 찬찬히 구경하면 되지 않을까?

‘아, 따로 자자고 말해야 하는데…….’

하지만 에드가의 목욕이 끝나려면 아직 한참 남았고 졸음이 자꾸 밀려왔다. 루비카는 결국 침대의 가운데에 대자로 누웠다.

그리고 이불을 덮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쿨쿨 잠이 들고 말았다. 욕실에서 씻고 있는 에드가가 신경 쓰이기는 했으나 뭐, 저렇게 주변에 여자가 넘칠 것 같은 사람이 날 건드리기야 하겠어? 그녀는 그리 안일하게 생각했다.

* * *

루비카의 눈에 남루한 옷자락이 들어왔다. 그녀는 황급히 주름진 손을 확인했다. 돌아왔다 현실로.

“정말 이상한 꿈이었어.”

세리토스 왕국을 넘어 대륙을 호령하다시피 하는 클레이모어 공작에게 청혼을 받는 이상한 꿈이었다. 정말 어쩜 그리 말도 안 되는 꿈을 꿀 수가 있어.

“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루비카는 얼른 바구니를 들고 가까이 있는 딸기 덤불로 갔다. 그리고 조심조심 딸기를 따서 바구니에 넣었다.

이 딸기 덤불은 얼마 전에 발견했다. 그녀는 딸기를 좋아하는 아르망을 위해 없는 시간에도 짬을 내어 몰래 여기로 왔다. 바구니 한가득 담아가면 무척 좋아하겠지.

“루비카.”

그때 아르망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나 온화한 표정이었던 그가 숨을 헉헉대고 있었다. 비 오듯 땀을 흘리는 모습에 루비카는 당황했다.

“아르망, 무슨 일이 있었어요? 대체…….”

“무서운 꿈을 꿨습니다.”

아르망이 다가왔다. 그리고 루비카를 껴안았다. 툭, 들고 있던 바구니가 떨어져 열심히 딴 딸기가 쏟아졌다. 하지만 루비카는 딸기를 다시 줍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가만히 아르망의 품에 안겼다.

“저도 이상한 꿈을 꿨어요. 글쎄, 아르망.”

잠시 아르망의 가슴에 루비카는 얼굴을 비볐다. 부드럽다. 기분 좋다. 이렇게 그의 품에 안기를 걸 얼마나 꿈꿨는지 모른다.

“내 말 좀 들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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