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단순히 내 조카님의 수업을 상담하러 온 것 같지는 않네요, 공작 부인.”
“민티아의 데뷔가 이번 황후 마마의 탄신 파티라고 들었습니다.”
에오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다음 말을 이어 보라는 에오넬의 태도에 공작 부인은 숨을 한번 쉬고 말했다.
“리엘라를 데뷔시키겠습니다. 그러니…….”
“아니, 일단 보류하세요.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황실 파티의 주최권을 볼테르에게서 빼앗아 올 테니.”
에오넬의 대답에 공작 부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황후 탄신의 파티 준비는 볼테르 황자가 하고 있지 않던가?
“하오나 황실의 모든 파티는 원래 황후 마마의…….”
공작 부인은 말을 어떻게 맺을지 몰라 끝을 얼버무렸다.
공작 부인의 말대로 황실 내부의 대소사는 황후의 주관이다. 하지만 본인이 본인 생일 파티를 주관하는 것은 그림이 좋지 않았다. 그 때문에 황후는 이번 자신의 생일 파티에 관한 모든 일을 황자에게 맡긴 상태였다. 실상은 황후가 뒤에서 다 조종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에오넬이 하겠다는 일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건 확실했다.
처음 공작 부인이 바랐던 일은 그저 ‘민티아의 데뷔 신청이 확실한지’만 알아 달라는 것뿐이었다. 황태녀인 에오넬은 데뷔 신청 마감 전에 비교적 쉽게 확실한 정보를 입수해 줄 수 있을 테니까.
설령 데뷔 신청이 마감된 직후라도 황태녀의 힘이라면 한 시간 정도 지난 신청서는 꾸역꾸역 밀어 넣어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아예 파티 주최권을 볼테르에게서 빼앗아 오겠다니, 꽤 과감한 계획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지극히 에오넬다웠다.
에오넬이 한쪽 손끝으로 반대쪽 손등을 토도독, 토도독 치며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데뷔 무대를 치르면 개인 자격으로 사교계의 파티 호스트와 호스티스를 맡을 수 있고, 파티 초대도 가문을 통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받을 수 있어요. 민티아를 데뷔시켜 얻을 수 있는 황후 마마의 이점이 꽤 크죠. 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빠른데…….”
이윽고 에오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뜬금없이 볼테르가 데뷔 무대를 황후 마마 탄신 파티의 오프닝 이벤트로 계획하겠다고 했을 때 왜 이러는가 싶었는데…… 우리 어마마마께서 몹시 조급증이 난 모양이군요. 후후.”
***
에오넬은 초콜릿이 든 작은 병을 손안에서 이리저리 굴렸다. 멜리의 시녀가 먹고 중독되었던 그 초콜릿이다. 원래 멜리가 가지고 있던 통은 황제가 가지고 있고 시녀가 덜어 갔던 통은 멜리가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에오넬이 가지고 왔다.
먹으면 기침이 나고 코가 막히다가 머리가 멍해지고 근육통이 생기며 나중에는 열이 40도 가까이 치솟게 되는 그 독약.
“이걸 황자가 먹도록 해. 내 아우님은 마시멜로에 초콜릿 퐁듀를 곁들이는 것을 좋아하니 마시멜로를 선물하면 좋겠어.”
“초콜릿도 같이 보낼까요?”
“초콜릿을 대놓고 같이 보내겠다고? 당연히 몰래 황자의 궁 주방에 가져다 놔야지.”
에오넬은 초콜릿 병을 시녀에게 넘겼다.
주방 하녀 하나 매수하는 것쯤은 쉽다. 초콜릿 병을 바꿔치기하는 것도.
그렇게 생각하면 반대로 이 수정궁에도 황후의 끄나풀이 어딘가에 많을 테지만, 뭐든 적당히 주거니 받거니 해야 제대로 견제가 되는 법이 아니겠나. 가끔은 그 끄나풀을 통해서 가짜 정보를 흘릴 수도 있고.
그렇게 시녀를 거치고 하녀를 거쳐 초콜릿 병은 볼테르 황자의 벚꽃궁까지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즈음, 에오넬은 마시멜로를 여러 병 사더니 볼테르와 아멜리아에게 각각 한 병씩 보냈다.
에오넬의 시녀가 마시멜로를 황자 궁에 무사히 전달했다는 소식을 들고 왔을 때, 에오넬은 선물하고 남은 마시멜로를 구워 맛보고 있었다. 에오넬은 마시멜로가 꽂힌 꼬치를 하나 들어 시녀에게 건넸다.
“자네도 먹을 텐가? 사실은 겨울에 야외에서 핫초코와 먹어야 더 별미라 아쉽지마는.”
시녀가 손사래를 쳤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런데 전하, 어째서 황태손 저하의 궁에도 마시멜로를 보낸 것인지…….”
“그냥 보냈나? 시킨 대로 멜리의 산책 시간에 맞추어 두 병 다 들고 가서 궁인들이 다 보는 앞에서 멜리에게 직접 고르라고 한 것 아닌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걸 그대로 들고 황자 궁에 가져가서. 궁인들이 많이 보는 앞에서 그것을 그대로 주었고?”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독이 없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함이라는 건 시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마치 강한 긍정은 강한 부정과 같다는 말이 딱 생각나는, 그런 행동이었다.
“오히려 의심할 것 같습니다.”
“의심하라고 한 것이다.”
시녀가 전보다 더욱 의아해했지만 에오넬은 더는 말해 주지 않겠다는 듯 그녀를 향해 나가 보라 손짓했다.
***
황후의 탄신 파티까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어느 날, 볼테르 황자의 벚꽃궁에 급하게 궁의들이 들었다. 파티 준비로 한창 바쁠 시기에 황자가 쓰러진 것이었다. 황궁이 발칵 뒤집힌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가장 먼저 벚꽃궁으로 달려온 건 키옌 황후였다.
“내 아들! 내 아들이 왜 이러는 것이냐!”
그녀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무엇 하나 걸리기만 하면 물고를 낼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앞에 수석 궁의가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고정하시옵소서, 황후 폐하. 그저 요즘 폐하의 탄신 파티 준비로 피로하시어 몸살이 난 듯합니다.”
“피로하여 몸살이 났다?”
기가 막혔다. 제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몸살이 난단 말인가. 그저 시녀를 통해서 일러 준 대로 아랫사람들에게 시키는 말만 전하면 되는 것을.
그녀의 생일 파티는 하나부터 열, 백까지 전부 그녀 자신의 손을 거쳤다. 볼테르 황자는 주최자라는 이름만 내걸었을 뿐이었다.
그런 주제에 뭐가 힘들고 피로하단 말이야?
그러나 황후의 날 선 말투에 지레 겁부터 집어먹은 궁의가 더욱 납작 고개를 숙였다.
“그, 자, 자세한 것은 소인이 더 진찰해 보고 처방을 할 것이옵니다! 아직은 크게 걱정하실 일이 아닌 줄로 사료되옵니다, 폐하!”
볼테르를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보던 황후가 궁의를 힐끔 쳐다보더니 금세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잘 부탁하네. 내 제국 최고 의원인 그대만 믿겠네.”
그리 말하고 돌아서 밖으로 나간 황후의 얼굴이 다시 서릿발처럼 얼어붙었다. 그러고는 뒤따르던 자신의 시녀장을 나직하게 불렀다.
“리사.”
황후가 손짓하자 시녀장 리사가 황후의 입가에 자신의 귀를 가져다 댔다.
“황자가 최근 닷새 안팎으로 자주 먹은 모든 것을 비밀리에 조사해라. 특히…… 그 출처가 혹, 황태녀 궁이 아니었는지.”
황후의 마지막 말에 리사가 숨을 홉 들이켰다.
“그, 그 말씀은…….”
황태녀를 의심하는 것이냐는 뒷말을 꾹 삼켰다.
리사는 모른다. 키옌이 기우제 때 아멜리아 황태손에게 무엇을 먹이려 했는지 말이다. 비밀을 아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으니까.
키옌은 까드득 이를 갈았다.
‘에오넬, 그년이 고대로 복수하려는 속셈이 분명해.’
아직도 대외적으로 아멜리아 황태손은 그날 단순한 감기몸살을 앓았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살 미수에 그쳤던 그 사건을 황제나 에오넬이 의도적으로 숨긴 것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이야……. 게다가 이건 황제의 방식이 아니야. 보나 마나 에오넬의 짓이겠군.’
화려하고 냉랭한 얼굴로 화끈하고 뒤끝 없는 척은 다 하면서 뒤로는 이런 음침한 방법을 쓰다니.
키옌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에오넬의 실체는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를 거다.
***
황제가 잠깐의 짬을 내어 볼테르의 궁으로 다녀간다는 소식을 들은 에오넬은 일부러 그 시간에 맞추어 의붓동생을 찾아갔다.
에오넬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볼테르가 누워 있는 침대 가까이 다가가서는 황제가 앉은 옆자리에 놓인 간이 의자에 털썩 앉았다.
“어머나, 아바마마도 와 계셨네요.”
황제가 에오넬을 돌아보았다. 전혀 동생이 걱정되어 온 얼굴은 아니었다. 늙은 황제는 마른 입을 쩝쩝 다셨다. 입안이 썼다.
아무리 볼테르가 그의 친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에오넬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런데 그런 황제 앞에서 아픈 의붓동생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니 한숨이 나왔다.
“너는 동생이 걱정되지 않느냐?”
“걱정되니 이리 왔지요.”
그러면서 멀찍이 문가에 선 궁인들을 힐끔 돌아보고는 황제의 어깨 근처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나직이 말했다.
“아바마마 아들이지 제 동생이 아닙니다.”
황제는 제 딸의 이런 말투를 20여 년 전 즈음 들어 본 적이 있다. 그때는 볼테르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처음 생겼을 때였다.
“그 여자 배 속에서 나온 새끼가 내 오라버니의 태자 자리를 위협하게 된다면 전 오라버니를 위해서 아바마마까지 셋 다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황제는 그래서 사실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황후는 당장이라도 내치고 싶지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황후의 아이는 죄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그때는 볼테르가 불쌍했다.
아무것도 모를 아이가 황실을 농락했다는 이유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제 의붓누이의 계략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목이 잘리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더불어 딸아이의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다. 피를 묻히는 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선에서 마무리 지어야 했다.
‘핏빛 황관을 쓰는 건 나 하나로 족하단다.’
딸에게는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색 크라운만 씌워 주고 싶은 아비의 마음을 이 딸은 알고는 있는 걸까?
그래서 마론 백작에게만 진실을 말하고 모든 것을 숨겨 주었다.
황후를 쫓아낼 명분은 나중에 다시 만들면 된다. 볼테르에게서 계승권만 빼앗은 채 평생 놀고먹을 수 있도록 해줄 명분도 차분히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다.
‘24년 전의 내 판단이 잘못되었던 걸까?’
황제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볼테르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