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53화 (53/148)

53화

나는 아르와 밀렌을 나란히 앉혀 놓고 이번 작전을 브리핑했다.

“지난번, 할바마마께 보고했던 그 몽타주 기억하지? 리만이라는 사람이다. 사이비 교주지.”

“어? 저 질문이요! 그거 황손녀님은 어떻게 아셨어요?”

“대 기우제 이후 환궁하는 길에 그가 전도하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

나는 대충 둘러댔다.

“제국에 부패 황족과 부패 귀족이 많아 신이 노해서 곧 역병이 퍼질 거라고 설파하던데.”

내 말이 끝나자마자 밀렌의 목소리가 갑자기 차갑게 가라앉았다.

“황후의 궁에 드나든 적이 있는 자가 그런 소릴 한다면 후작가에서 무언가 꾸미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네요. 가령 희귀 전염병을 이용한 생화학 테러라든가…….”

“맞아. 체리에 후작가에 잠입해 곧 터질지도 모를 역병에 대해 알아 와. 정말 역병을 퍼뜨릴 생각이라면 이미 치료제든 치료제의 레시피든 가지고 있을 거야. 그것도 알아 와.”

밀렌은 못 들을 걸 들은 사람처럼 한참을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너무 어려운 걸 시켰나?

체리에 후작가는 말이 후작이지 공작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황후의 친정 가문이다. 그런 곳에 갑자기 잠입하라니 조금 당혹스러울 만도 하지. 나는 밀렌이 거절할세라 얼른 다음 말을 덧붙였다.

“아르가 저택 내부 구조의 사전조사를 마치고 도주로도 확보했다.”

그러나 밀렌의 그런 당혹스러운 표정이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짙어졌다. 그러다가 잠시 후 말했다.

“저기…… 황손녀님? 진짜 그거면 돼요? 겨우 그거 시키려고 나 불렀어요?”

겨우? 자그마치 후작가의 대저택에 잠입하는 것이 겨우?

황당하다는 내 반응에 오히려 밀렌이 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황태손의 침실에도 지금 이렇게 잠입했는데, 겨우 후작저에 잠입해서 몰래 정보 좀 빼 오는 게 임무라니 너무 시시하잖아요. 후작 죽이고 오라는 것도 아니고.”

밀렌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시시한 일이었어?”

내가 아르와 밀렌을 올려다보며 말하자 아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게 저 혼자 가도 충분하다 했잖습니까.”

요 며칠 걱정만 심하게 했던 것 같아 괜스레 민망해졌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헛기침을 했다.

“흠흠! 어쨌든 정보는 빼 오는 즉시 할바마마께 보고해도 상관없어. 개인적으로 움직였다고 해도 되고, 아니면 내 부탁을 받고 움직였다고 말해도 좋아. 굳이 할바마마께 사실을 숨길 필요도 없어. 너희가 알아서 처리하는 대로 입 다물고 있어 줄게.”

“왜 자꾸 무섭게 폐하 얘기를 꺼내요?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부탁 아니라 협박 같은데. 칫!”

곧 아르는 밀렌과 함께 창문 밖으로 나갔고, 나는 창문을 잠근 다음 꺼두었던 경보장치의 마력 공급기를 다시 켰다.

***

그렇게 조금씩 사이비 교주 리만과 다가오는 역병 사태를 잊어 갈 무렵이었다. 심지어 나는 체리에 후작가에 관한 모든 일을 아르와 밀렌에게 맡겨 놓았다는 사실마저 슬슬 잊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막 겨울의 초입에 다다를 즈음, 황후의 탄신 연회 일정이 잡혔다.

동시에 이례적으로 파릇파릇한 귀족 자제들의 정식 사교계 데뷔까지 계획되었는데, 황실에서 계획을 발표하기가 무섭게 데뷔를 치를 귀족 자제들의 목록까지 암암리에 돌기 시작했다.

아직 참가 신청도 받지 않았는데도 그러했다. 사교계 데뷔 행사를 치를 연령의 자녀를 데리고 있는 귀족들이 이번에 내보낼 거란 계획을 구태여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민티아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내 지난 삶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이상 데뷔 명단에 공식적으로 이름을 올릴 때까지는 그리할 것이었다.

많은 귀족이 민티아는 이번 황후의 탄신 파티가 아닌 신년파티에서 사교계에 데뷔할 거라고 여겼다. 그리고 보통은 그게 당연했다. 아무리 황후의 탄신일 파티라고 해도 제야의 파티보다 크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정기적이고 대대적인 귀족 자제들의 사교계 데뷔 행사는 1년에 두 번, 연말에서 신년으로 넘어가는 제야의 파티와 건국기념 파티에서만 열렸다. 간혹 유독 데뷔 적령기의 아이들이 많은 해에나 특별히 추가 일정이 잡힐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지금 데뷔를 신청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제국의 모든 귀족 영애 중 가장 고귀한 신분을 가진 후작 영애 민티아와 데뷔가 겹치는 것을 피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들은 민티아에게 주목을 빼앗기고 자녀들의 데뷔가 묻히는 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런지라 뒤에서 떠도는 명단에는 조금은 한미한 수준의 백작가나 작위가 비교적 낮은 자작, 남작 영윤과 영애들의 이름이 특히 많았다.

나는 시녀들이 조사해 온 최신 명단을 가지고 예법 수업에 들어왔다.

수업이 끝난 후 우리는 이번 황후의 탄신 파티와 그때 있을 데뷔 무대를 주제로 가벼운 티타임을 가졌다. 늘 있는 일이었다.

사교계에서 자주 열리는 티파티와 그때의 예절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이렇듯 늘 가벼이 차를 한 잔씩 마시곤 했는데, 공작 부인은 언제나 홍차를 마셨고 나는 귤차를, 리엘라는 애플티를 마셨다.

“공작 부인.”

“예, 저하. 말씀하세요.”

“체리에 영애가 사교계에 데뷔할 거예요.”

공작 부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당혹감으로 물들었다가 이내 어두워졌다.

“사실인가요? 사실이라면 리엘라보다 데뷔를 이르게 하기 위해서일까요?”

우리는 리엘라의 데뷔를 신년회로 잡고 있었다. 민티아보다 늦게 치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들보다 조금 어린 나의 사교계 데뷔는 좀 더 늦게 계획하고 있었고.

어쨌든, 황후의 생일과 신년회 파티 사이의 간격은 3개월이었다. 그러나 고작 3개월 차이라고 해도 그 3개월 동안 민티아가 황후의 대리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너무 많았다.

지금 민티아의 배경, 그것을 견제할 수준이 되는 그 어떤 가문의 영애도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3개월이라는 시간은 사교계의 영향력을 넓히고 그곳을 장악하기에 차고 넘쳤다.

잠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에 잠겼던 공작 부인이 어렵사리 운을 뗐다.

“저하께서는 그 이야기 대체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아직 황실에서는 데뷔 무대 참가 신청을 받지 않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공작 부인이 의심하지 않도록 둘러댔다.

“황후 폐하의 궁에 심어 둔 저희 쪽 사람이 있습니다.”

“황태녀 전하의 사람이겠군요.”

나는 맞는 듯 아닌 듯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공작 부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엘라, 지금 들은 것은 밖에 나가서 이야기하지 말아요.”

“네, 알겠어요.”

리엘라가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공작 부인이 한숨을 폭 내쉬며 말했다.

“객관적으로 판단하자면 리엘라의 데뷔를 앞당겨도 준비에는 무리가 없어요. 하지만 정보가 거짓이라면 평생 한 번뿐인 리엘라의 데뷔 무대를 황후의 탄신 파티에 쓰게 하고 싶지 않네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리엘라 양은 예정대로 제야의 파티에서 데뷔하세요.”

공작 부인 말대로 리엘라에게 몹시 미안할 일이었다. 게다가 공식 데뷔자 명단은 신청 접수가 끝나야만 공개가 될 테니 심증만 가지고 함부로 신청서를 내기도 찝찝한 게 사실이다.

민티아는 아마 이 점을 노린 것이겠지. 에오넬 황태녀파의 이름 있는 귀족이자 황태손의 예동이 절대로 적의 수장인 황후의 탄신 파티에서 데뷔를 치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일 거다. 그래서 선수를 친 거다.

나는 이런 일에 리엘라를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그날 사교계에 데뷔하기 위해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예법 수업을 진행했던 것이 아니던가.

나는 눈빛에 최대한 강한 의지를 담아서 공작 부인을 쳐다보았다.

“그러니 제가 가겠어요.”

“안 됩니다, 저하! 그렇게 급할 필요도 없어요. 고작 3개월입니다. 사교계 데뷔 무대는…… 평생에 딱 한 번이라고요. 황족의, 그것도 장차 황제가 되실 분의 사교계 데뷔를 고작 이런 이유로 앞당길 수는 없어요. 이건 저하의 예법 선생으로서 절대로 허락할 수 없습니다.”

공작 부인은 단호했다. 하긴, 고작 3개월이 어떤 파문을 불러올지 모르는 공작 부인이기에 이런 반응은 사실 당연했다.

그래, 고작 3개월. 나도 지난 생에서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지금도 고작 3개월 만에 사교계를 장악한 민티아의 능력은 믿기 힘들 정도다.

‘어쩌겠어, 사실이니 믿어야지.’

그 이후로 꽤 오랫동안 나와 공작 부인은 나의 사교계 데뷔를 놓고 실랑이를 벌였다. 우리의 대화는 점점 과열되기만 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저하! 고모님!”

리엘라가 빈 애플티 잔을 내려놓으며 우리의 이목을 끌었다.

“저, 데뷔할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