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아바마마…… 누님…….”
에오넬은 문가에 선 황자의 시종에게 손짓하여 부른 다음 모과청 한 병을 건네며 볼테르에게 말했다.
“민간에서 이르길 모과가 감기에 좋다 하여 가져왔단다, 아우야.”
“감사합니다.”
“그리고 궁의가 이르길 네가 요즘 많이 피로한 듯하다 하는구나. 어마마마의 탄신 파티는 이 누이에게 맡기고 파티 때까지 몸을 회복하도록 하려무나. 중요한 날에 아들이 빠지면 쓰겠느냐?”
“감사합니다, 누님. 부탁드릴게요.”
볼테르가 대답하자 에오넬은 희미하게 웃으며 볼테르의 시종에게 말했다.
“들었느냐? 어마마마의 생신 파티 준비를 앞으로 내가 대신 맡을 터이니 관련된 모든 것들을 정리하여 내일까지 내 궁으로 가져다주렴.”
황제를 증인으로 하여 목적을 이룬 에오넬이 가볍게 인사하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에오넬이 나가자 황제가 데려온 시종이 곧 송로버섯 수프를 들고 들어왔다.
“허허, 딱 맞추어 왔구나.”
황제는 손수 송로버섯 수프를 받았고 시종들이 재빠르게 침대 위에 간이 테이블을 올려놓고 식기를 준비했다.
“귀한 것이니 남기지 말고 다 먹어 기운을 차려야지.”
수프 안에는 해독제가 들었다. 아무래도 에오넬이 주고 간 모과청 역시 해독제가 섞여 있는 것 같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에오넬도 황후의 생일 파티에서 무언가를 꾸밀 생각이긴 해도 볼테르를 죽이려는 생각은 없는 모양이군.’
이 와중에 황제는 볼테르가 아픈 건 둘째 치고 딸이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황후의 시녀, 리사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황후를 찾아온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시키신 대로 황자 전하께서 드신 음식을 조사했습니다만…… 출처가 황태녀의 궁이면서, 동시에 꾸준히 드신 것은 마시멜로뿐입니다.”
“마시멜로는 에오넬이 준 것이고?”
“예.”
아예 대놓고 보낸 것이니 찾아내는 데 딱히 어려울 것도 없었다. 리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찝찝한 기분이 들어 덧붙였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똑같은 병에 똑같이 생긴 마시멜로를 황태손에게도 가져다주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두 병 중 한 병을 황태손이 직접 골랐고 나머지 하나는 그대로 벚꽃궁으로 가지고 갔고 그 과정을 전부 수많은 궁인이 보았다고 합니다. 마치 일부러 보라는 듯이 그리하여…….”
‘아멜리아에게 해독제를 먹였나?’ 키옌은 의심을 피하고자 제 아들에게 해독제를 주고 증거물인 초콜릿을 먹어 치우도록 했었다. 만약 에오넬이 같은 방법을 사용한 거라면?
그러나 키옌은 그런 생각을 급히 접었다. 아멜리아를 대놓고 위험 속으로 끌어들이는 짓을 에오넬이 할 리 없다. 아군을 일부러 위험에 노출해 의심을 피하는 방식은 키옌의 방식이지 에오넬의 방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시멜로 말고 다른 것은? 가령…….”
초콜릿이라든가. 키옌은 입가에 맴도는 말을 뱉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리사가 아차차, 외쳤다.
“마시멜로를 초콜릿 퐁듀에 찍어 드셨다고 했어요. 하지만 초콜릿 퐁듀의 출처는 벚꽃궁의 주방 제과실이어요. 의심스러울 것이 없는걸요.”
그 순간 키옌은 깨달았다.
‘바꿔치기했구나.’
그럼 대체 볼테르가 물의 신전에서 다 먹어 치운 그 초콜릿은 무어란 말이지?
분명 볼테르에게 해독제를 먹인 다음 황손이 가지고 있는 독이 든 초콜릿을 다 먹어 치우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은 궁에 돌아오자마자 그녀의 앞에서 당당하게 말했다. 시킨 대로 그것을 자신이 다 먹어 치웠다고.
머리가 터질 것 같다. 키옌은 관자놀이를 감쌌다.
“초콜릿을…….”
“초콜릿을 조사할까요, 폐하?”
리사의 말에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안 돼!”
황태손에게 먹인 초콜릿이 수상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딱 넷뿐이었다.
키옌, 증거물인 초콜릿을 해독제와 함께 먹어 치운 볼테르, 암시장에서 독을 구해 온 그녀의 늙은 유모와 초콜릿을 직접 바꿔치기한 라벤더궁의 첩자뿐이었다.
“폐하, 어째서……. 황제 폐하께 아뢰어 초콜릿의 정체를 수사해 달라 청하면 초콜릿을 찍어 먹을 마시멜로를 보냈던 에오넬 황태녀가 가장 먼저 의심받을 거예요.”
나름대로 일리 있는 말이었으나 문제는 황제가 황후 모자의 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볼테르가 진짜 황자가 아니므로.
언제 황제가 진실을 까발릴지도 모른다. 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 증거가 없으니 황제가 말만 못 하고 있을 뿐, 그가 확실한 증거를 잡길 바라며 벼르고 있다는 건 키옌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리만에 대해서 꼬리를 밟힌 이유도 원래는 리만의 일 때문이 아니라는 것. 그러니까 사실은 볼테르의 친부에 대해 몰래 알아보던 황제가 우연히 눈치챈 것이라는 점을, 키옌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리만에 관한 일은 그저 어쩌다 관련도 없던 제삼의 사건이 재수 없게도 걸린 것뿐이었다.
만약 이 사건을 수면 위로 올렸다가는 폐위되는 건 에오넬이 아니라 독 초콜릿의 최초 출처인 자신이었다.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일단은 입을 다물어라.”
키옌은 리사의 입단속을 한 다음 볼테르에게 보내려던 무도회의 선곡 목록을 훑었다. 그러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파티는…… 황자가 저리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내가 직접 준비해야겠군…….”
말을 마친 키옌은 리사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좋지 못하다는 걸 느꼈다.
“무슨 일이지?”
“그, 그것이…… 황자 전하께서 파티 준비를 황태녀 전하께 맡기겠다고 황제 폐하 앞에서 말씀하셔서…….”
“이이이이! 이 멍청한!”
키옌의 손에 들린 종이가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리고 황후 궁에서 키옌이 한참 성질을 내던 그때, 에오넬은 아예 화끈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
할바마마와 고모님이 볼테르 숙부의 문병을 다녀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쪼르르 달려가 속을 좀 긁어 줄까 했었다. 그러나 어린애는 그럴 필요 없다고, 괜히 감기가 옮으면 안 된다는 이유로 할바마마와 고모님이 말리더라.
그러나 나는 숙부가 감기가 아니라 내게 쓰려던 독에 제가 거꾸로 당했다는 걸 손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숙부로부터 파티 주최권을 빼앗는다는 기발한 발상을 한 고모님의 화끈한 일 처리 덕분이었다.
‘아무래도 고모님이 숙부를 계획적으로 앓아눕게 만든 것 같단 말이지.’
황후가 제 발등을 스스로 찍을 생각이 없다면 아마 독이라는 걸 알고도 묻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나는 파티와 데뷔 문제는 일단 고모님께 맡기기로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빅똥을 황후에게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할바마마아아아!”
할바마마의 산책 시간에 맞추어 황제의 황금 궁 정원으로 나간 나는 할바마마를 보자마자 달려가 폭 안겼다.
“오오, 우리 아가, 어서 오너라.”
그리고 곧장 본론부터 꺼냈다.
“할바마마, 나 할마마마 생신 선물 사러 나갔다 와도 돼요?”
할바마마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이러한 행동이 꽤 이례적이라고 생각하실 거거든.
나는 할바마마와 고모님을 비롯한 모든 황족의 생일 선물을 매년 황궁 안에서 해결했다.
내 궁의 파티시에와 함께 케이크를 굽는다든가, 침방 하녀들에게서 자수를 배워서 손수건을 만든다든가.
무엇보다 황후의 생일 파티 때에는 라벤더궁을 제 아들에게 쥐여 주지 못한 그녀를 놀릴 심산으로 언제나 라벤더와 관련된 것들을 선물했다. 라벤더 자수를 놓은 손수건, 라벤더 허브차, 보라색 생크림으로 라벤더를 그린 케이크.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진짜 라벤더. 내 궁에서 그해 가장 예쁘게 핀 라벤더를 제철에 미리 골라 놓았다가 예쁘게 말려서 화려한 꽃다발로 만들어 늘 함께 선물했다. 이것이 바로 화룡점정!
내가 생글생글 웃으며 할바마마를 올려다보자 할바마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또 무슨 라벤더를 가져오려고 그러느냐? 이 할애비가 구해다 주마.”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번에는 라벤더 아니에요. 제가 나가서 직접 가지고 오고 싶어요. 어차피 그림자 호위 붙이실 거잖아요.”
내가 배시시 웃자 할바마마가 짐짓 엄한 눈초리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혹, 엘비어스 크로이젠 공자가 그리 말하더냐?”
나는 대답 없이 말갛게 웃었다. 그러자 할바마마가 재차 말씀하셨다.
“그와 같이 가느냐?”
“그럴 생각이에요.”
“내가 나가지 말래도 나갈 것이지?”
할바마마께 잡힌 양쪽 어깨에서 싸한 기운이 감돌았다.
할바마마의 말처럼 사실 일방적인 통보였다. 외출을 허락해 주면 몹시도 감사하겠지만 혹시 내가 황궁에서 잠시 보이지 않더라도 놀라지 마시라는 통보.
할바마마의 눈가에 굵직한 눈물이 보일 듯 말 듯 맺혔다.
“평생 황궁 물만 먹였더니, 내 새끼가 이 황궁에서 오래오래 살아남을 아주 영악한 요물이 되었어. 흐윽!”
그래서 내보내 줄 건가요, 아니면 말 건가요? 그보다 그거 대체 칭찬이에요, 욕이에요?
이때까지 나는 내게 닥친 어두운 그림자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