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뱀은 먹이를 통째로 삼킨다(1)
푹신한 침대가 그들의 몸을 삼켰다. 서로의 욕망에 불이 붙었다. 입술이 서로의 온몸을 내리눌렀다가 떨어지고 다시 아쉬운 듯 붉은 혀가 적셔 왔다. 거추장스러운 천 자락은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하…”
탄식과 같은 한숨이 흘렀다. 메리쉬의 손이 그녀의 몸이 그리는 곡선을 따라 내려갔다. 그 손끝이 살짝 떨렸다. 욕심으로 번뜩이는 녹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뭇 조심스러웠다.
“…멜.”
달아오른 달큰한 숨이 베를리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숨결이 묻은 부름이 습기를 머금고 메리쉬에게 엉켜 들었다. 그 부름 하나가 그를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아득, 메리쉬가 이를 악무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라도 참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손가락 끝에 닿아오는 둥근 언덕을 우악스레 움켜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침대 위에 퍼진 암녹색 머리칼,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보라색 눈, 제게 엉켜 드는 점차 아까보다 서늘함이 가신 체온. 그 모든 것이 메리쉬를 충동질했다.
“베릴, 베릴, 베릴….”
베를리아의 몸을 끊임없이 탐하면서도 그녀의 이름조차 탐하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메리쉬의 손끝과 입술 모두 떨리는 까닭은 자신도 처음 마주하는 커다란 욕망이 그녀를 집어삼킬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서로의 맨살이 닿는 감각이 선명했다. 메리쉬는 자신이 욕구에 대하여 담백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무지한 자의 착각이었다. 제 손에 감겨드는 베를리아의 창백한 피부에 솜털이 하나하나 곤두섰다. 모든 감각이 그리로 쏠려 있었다.
“후으…. 멜.”
그녀가 더운 숨을 내뱉으며 그를 불렀다. 멜. 그 울림이 지극히 마음에 들었다. ‘원작 속의 베를리아 리들턴’은 단 한 번도 메리쉬를 그렇게 부른 적이 없었다. 그건 그녀만이 만들어 내는 울림이었다.
‘데니에게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자신을 책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녀는 그게 목소리인지 생각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건 원작 속 베를리아나 할법한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마치 누군가 자신의 존재를 뒤흔드는 듯한 끔찍한 느낌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게 그녀를 더욱 절박하게 만들었다.
그래, 그녀는 절박했다. 그녀는 자신이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였다는 것을 뒤늦게 인지했다. 그것을 메리쉬를 탐함으로써 해소하려 했다는 것도.
‘이제는 내가 진짜야. 이 땅을 딛고 서 있는 것은 나니까.’
그녀의 자안이 번뜩였다. 조심스럽던 그의 손길과 달리 그녀의 손은 탐욕적이고 노골적이었다. 그녀는 메리쉬의 안에 ‘원작 속 베를리아’가 남긴 어떤 잔재도 남겨놓고 싶지 않았다.
전부 자신으로 채울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없는 베를리아 리들턴의 흔적 따위 남겨놓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다리가 그의 다리에 얽혀들었다. 그녀의 팔이 메리쉬의 몸을 얽어맸다. 다부진 근육을 매만지고 제 손안에 담으며 그녀가 속닥였다.
“날, 네게… 줄게.”
맞닿아오는 온기는 그녀에게도 자극적이었다. 이 순간 오직 그 온기만이 그녀가 이곳에 존재함을 인지시켜 주었기 때문에 더욱 더.
욕망이 생각을 앞선 까닭인지, 서로가 서로의 숨을 앗아가며 서로를 탐하고 있기 때문인지 말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메리쉬가 자신의 말을 명확히 듣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러니까, 흣…. 너도, 내게 널 줘.”
그녀의 창백한 피부 위로 미끄러지던 메리쉬의 입술이 올라와 그녀의 말캉한 입술과 겹쳐졌다. 소리가 틈 없이 맞닿은 사이로 뭉개졌다.
그러나 그녀는 그 순간 분명히 메리쉬의 대답을 들었다.
‘지금 당신이 안은 만큼… 모두, 당신의 것이에요.’
더없이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뱀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얽혀드는 밤이었다.
***
메리쉬가 잠든 베를리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 머리칼을 매만졌다. 깊은 밤이 지나고 난 아침이었다. 그의 손길은 그 전날보다 훨씬 진득하고 망설임 없었다.
‘당신을 불안하게 한 건 무엇일까?’
메리쉬는 베를리아를 살피는 것이 숨 쉬듯 익숙한 사람이었다. 지난밤 그녀가 상당히 불안정했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알면서도.
‘그게 당신을 내게 매달리게 한다면…’
그렇다면 감히 베를리아가 계속 그러기를 바랐다. 메리쉬의 시선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자신을 달라던 베를리아의 말에 뭐라고 답했는지 그는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메리쉬는 폐수거장에서 거두어졌던 순간부터 베를리아의 것이 아닌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런 대답을 내놓았던 이유는 하나였다. 그렇게 말해야만 그녀가 자신을 더 절박하게 품어올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절박하게 갈구하는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그 전까지의 모든 순간에 비견될 수 없을 만큼.
메리쉬는 자신의 욕망이 상당히 비틀어졌음을 깨달았다.
“베릴이 달라 하셨으니… 그런 나도 견뎌 주시겠지요.”
그러나 그는 이전과 달리 제 욕망 앞에서 주춤하지 않았다. 도리어 메리쉬는 웃고 있었다. 그가 베를리아의 부어오른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내리눌렀다.
마침내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집어삼켰다. 이제 그는 오늘의 포만감을 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메리쉬는 처음으로 제 주인에게 감히 불손한 마음을 품었다. 제 욕망에 불을 붙인 것은 주인이었으니- 당신은 응당 나를 감당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에 타협은 없었다.
쾅쾅!
아침부터 도어 노커를 두들기는 소리가 저택을 울렸다. 그것이 메리쉬의 상념을 깨트렸다. 그는 그것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포만감을 조금 더 즐기고 싶었다. 마치 먹이를 통째로 삼킨 뱀이 그것을 소화하는 데 오래도록 시간을 들이는 것처럼.
쾅쾅쾅!
저택의 주인이 나오지 않으면 물러날 법도 한데 재차 도어 노커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통 바쁜 일정에 새벽부터 일어나는 이 저택의 주인은 드물게 늦은 잠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손님을 맞을 준비가 되지 않은 저택에 난감한 듯 재스민이 베를리아의 방 앞에서 서성였다.
“뭐지?”
방문 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서늘한 얼굴의 메리쉬가 문을 열고 나와 물었다. 밤이 길어 새벽에야 지쳐 잠든 베를리아였지만 그녀는 기척과 소리에 예민한 사람이었다. 깨어나지 않길 바랐으니 대신해서 그가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주인의 방에서 나오는 그의 모습에 잠시 움찔한 재스민이 안쪽을 힐끗 바라봤다. 아직 내려져 있는 휘장, 아침 햇살이 침범할 수 없도록 침실 안을 드리운 암막 커튼. 그리고 고요한 안쪽.
리들턴의 주인은 오직 하나뿐이며 누구도 이를 대체할 수 없다. 그건 절대적인 규칙이었다. 그래서 재스민은 망설였다.
“늦은 밤에 잠드셨어, 피곤하실 거다.”
그 반응에 메리쉬가 말했다. 베를리아의 신체 감각이 평범한 인간들보다 뛰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그녀가 남들보다 강한 이유는 신체적인 조건 때문이 아니었다.
도리어 베를리아의 체력은 때로 남들보다 극도로 약해지고는 했다. 그러니 메리쉬는 되도록 그녀를 더 쉬게 해 주고 싶었다.
“…그게, 모르는 손님께서 와 계셔서.”
주저하던 재스민이 입을 열었다. 애초에 이 악명 높은 리들턴의 저택으로 굳이 찾아오는 이는 많지 않았다. 물론 아무나 이 저택의 담을 넘을 수도 없었지만. 미리 연락을 받은 것도 아니고 익히 본 얼굴도 아니었기 때문에 손님은 대문 앞에 그대로 방치된 채였다.
“그런 자까지 리들턴에서 신경 써야 하나?”
조금 누그러졌던 메리쉬의 목소리가 다시 딱딱해졌다. 애초에 그는 주인의 앞에서나 순한 척하는 편이었지, 재스민에게는 이런 메리쉬가 더 익숙했다. 그녀는 이번에는 뜸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
“선물을 가져왔는데, 저희가 판단해서 거절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재스민의 말을 들은 메리쉬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아침부터 이 저택에 선물을 나를 웬 이상한 놈이 있던가? 결국 그가 한숨을 쉬며 최대한 조용히 베를리아의 방문을 닫고 나왔다.
“아, 오늘 또 뵙네요?”
그리고 나가 본 대문 앞에는 굳이 두 번 마주치고 싶지는 않은 사람이 있었다.
“…네가 왜 여길?”
메리쉬의 대답이 삐딱했다. 베를리아의 앞에서 사용하던 존댓말이라고는 온데간데없는 그 모습에 상대가 씨익 능글맞게 웃었다.
“알겠다! 어제는 내숭이었군요?”
메리쉬의 눈가가 사납게 일그러졌다. 물론 어제 리리카에게 존댓말을 사용했던 것은 베를리아 때문이 맞았다. 제 주인이 말을 놓지 않는 상대에게 자신이 그러지 않는 건 이상하니까. 그렇지만 그걸 가지고 이렇게 놀리는 것처럼 구는 이가 달가울 리 없었다.
“베릴은 널 만날 수 없으니 돌아가.”
굳이 애칭을 사용한 건 꽤 유치한 견제 의식이었다. 메리쉬는 눈앞의 남자가 거슬렸다. 굳이 방금 상대가 했던 말이 아니더라도 그냥 어제부터.
“전 베를리아 양을 만나러 왔다고 안 했는데요.”
“그게 아니라면 이 집에 네가 찾는 이는 없을 테니…”
“물론 아니라고도 안 했지만요.”
능글능글 생글생글거리면서 그 속을 알 수 없이 구는 게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마치 어젯밤 그렇게 막무가내로 매달리던 이와 다른 사람이기라도 한 것처럼.
“지금 나랑 장난치자는 건가?”
메리쉬가 어느덧 손에서 빼든 단검을 리리카의 목에 들이밀었다. 그가 베를리아한테나 온순히 굴어서 그렇지 원작에서부터 메리쉬는 애초에 악인에 가까웠다.
그런 그가 누군가를 죽이는 데에 딱히 망설임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의 녹안이 자신의 자리를 탐내는 적을 바라보는 맹수처럼 날카롭게 번뜩였다.
“워, 워, 무서워라.”
메리쉬의 손놀림은 공기가 흐르듯 자연스럽고 매우 빨라서 리리카는 육안으로 잡아낼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유로웠다. 항복하겠다는 듯 두 손을 들고서도 리리카는 웃고 있었다.
“그래도 제가 가져온 물건은 한 번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이 따끔거렸다. 망설임 없이 들이민 단검에 피부가 얇게 베인 모양이었다. 물론 메리쉬가 그런 것을 신경 쓸 리가 없다는 건 그를 바로 어제 본 리리카도 알았다. 이쯤이야 딱히 상관없기도 했고.
사나운 눈빛을 거두지 않은 메리쉬가 그제야 몸을 뒤로 조금 물렸다. 그러고 보니 재스민이 그들이 처리를 판단하기에는 난감한 물건이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선물입니다. 베를리아 양에게 드리는.”
리리카가 열어 보여준 상자 속의 내용물을 확인한 메리쉬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