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그들은 살아 있었다(3)
남자는 쫓기던 사람치고는 아주 얌전했다. 여기까지 아무 말도 없이 따라올 만큼. 베를리아의 집요한 시선에 그제야 사내가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원래 마법이 잘 듣지 않는 체질이에요.”
숨이 붙어 있다는 것을 빼고는 곧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말했다.
베를리아는 노골적으로 남자를 탐색하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상대의 외모는 절대 예사롭지 않았다. 어딘가 신비롭고 성스러워 보이면서도 동시에 배덕한 느낌이 들었다. 대놓고 말하면 주인공을 해도 될 정도로 잘생겼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런 사내에 대한 묘사는 원작 어디에서도 읽지 못했다. 베를리아의 의심이 짙어졌다.
“이름이 뭐예요?”
“…리리카에요.”
잠시 머뭇거리던 남자는 제 이름을 알려 주었다. 많은 사람이 밤늦게까지 거리를 활보하는 날조차 목숨의 위협을 받는 남자. 그런 리리카가 평범한 사람일 리가 없었다.
그를 쫓는 암살자들은 집요했고 또 체계적이었다. 베를리아나 메리쉬가 아니라면 몰랐을, 인적 드문 골목으로 리리카를 몰고 간 행태만 봐도 그러했다.
‘그런 위협을 받는 단순한 평민일 수가 있나? 그런 자가 어떻게 이 에덴버의 수많은 집단 중 하나의 입에도 오른 적이 없을 수 있지?’
그녀의 의심은 타당했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황태자가 그토록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그 능력 때문에 옆에 둔 여자다. 그러나 베를리아의 기억에 리리카란 이름은 없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의 기억대로라면 리리카는 귀족도, 상인도, 용병도 심지어는 암흑가에 관련된 인물도 아니었다.
“그래요, 리리카.”
그녀는 더 이상 자세한 것을 묻지 않기로 했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버려진 아이였다.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은 네멘 리들턴을 증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을 실험체로라도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모습은 없었을 거라는 것도 알았다. 원작의 베를리아 리들턴이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을 가장 더럽고 엉망인 곳에 손을 뻗는 이유였다. 그녀도 몸의 주인이 남긴 기억에 감화되어 궁지에 내몰린 리리카를 도왔으나 딱 이 정도뿐이었다.
원작의 베를리아 리들턴은 이미 죽었다.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과 달리 그녀는 제가 구한 이를 책임까지 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럼 우리가 해 줄 일은 이제 없겠군요.”
신전은 어쨌든 신 아래 모든 이의 목숨은 전부 소중하다는 교리를 펼쳤으므로, 약자를 보호하는 것은 그들의 의무였다. 이곳은 수도인 만큼 신전이 지척에 있었다. 리리카가 살고 싶었다면 그리로 도망가야만 했다.
게다가 이곳의 신전은 수도의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을 만큼 높다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리리카는 신전과 하등 상관없는 방향으로 도망쳤다.
즉 그는 신전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일 터였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몰라도 깊게 파고들 생각이 없었으니 치료도 여기서 끝인 셈이었다.
“…잠깐, 잠깐만요! 날 살려 줘 놓고 그냥 두고 가는 겁니까?”
베를리아의 단호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리리카가 말했다. 그가 마치 그녀에게 매달리기라도 할 듯 다가오자 묵묵히 뒤에서 지켜보던 메리쉬가 둘 사이를 갈라섰다.
“그, 저를 이대로 두고 가버리시면 전 죽을지도 몰라요, 베를리아 양!”
죽을 뻔했던 좀 전에도 아무 말 없던 것과 달리 그의 반응은 호들갑스러웠다. 게다가 제대로 알려 주지도 않은 그녀의 이름까지 부르는 게 꽤 뻔뻔하기도 했다.
메리쉬가 그런 리리카를 사납게 바라봤다. 감히 베를리아의 이름을 멋대로 입에 담은 것이 싫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원래 그녀는 제 사람에게만 한없이 유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요?”
어쩌라는 식으로 나오자 리리카의 입이 다물렸다. 저렇게 입을 다물고 있으니 훨씬 나았다. 저쪽도 외모가 이미 모든 면에서 다하고 들어가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검은 눈이 멀뚱멀뚱 베를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베를리아 양께서 살려 주셨으니까…”
“그러니까요, 내가 살렸는데.”
사내의 검은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가 제대로 된 변명을 생각해내기도 전에 베를리아가 말을 이었다.
“한 번 살려 줬는데, 또 도와줘야 하나요?”
베를리아 리들턴의 인상은 웃지 않으면 차갑다 못해 싸늘해 보였다. 그녀는 솔직히 이게 매우 마음에 들었다. 원래 세계에서는 어리고 둥글둥글하게 생겨 아무리 어조를 강하게 해도 그 효력이 반감되고는 했다.
“살려 줬으면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알아서 살길 찾아야죠.”
베를리아의 손이 저택의 창밖을 가리켰다.
“여기서 세 블럭 떨어진 곳으로 가면 주택이 하나 있어요. 거기서 하루 정도는 머물 수 있을 거예요.”
그건 원래의 베를리아 리들턴이 따로 준비해둔 곳이었다. 아실에게 도움을 받았는데 그녀의 집에 객식구까지 머무르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단 하루, 그런 제약은 원작에서는 없었지만 말했다시피 그녀는 누군가를 책임질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그러니 딱 그 정도가 좋았다.
“자, 어서 나가요. 아실도 쉬어야죠.”
“가시죠.”
베를리아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의 말을 따라 메리쉬가 리리카를 집 밖으로 등을 밀어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리리카는 문밖에 서 있었다.
“오늘 고마웠어, 아실.”
“별말씀을요. 언제든 필요하시면 말하세요.”
베를리아와 아실이 흘러가듯이 인사를 나눈 후 문이 닫혔다. 그리고 메리쉬와 베를리아가 제 갈 길을 가기 위해 돌아섰다.
“저, 헉…. 제발, 도와 주십시오!”
그들의 등 뒤에서 리리카가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며 휘청거렸다. 그 소리에 돌아본 베를리아가 코웃음을 쳤다.
“당신이 마신 거 최상급 포션이에요.”
생판 남에게 최상급 포션을 사용했다는 건 남들이 알면 분명 아까워서 대신 속이 쓰려할 일이었다. 그러나 베를리아 리들턴에게 돈이란 넘쳐나는 것이어서 굳이 최고가 아닌 것을 구비해 둘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녀가 오늘 이공간에서 꺼내서 사용한 것 또한 최상급 포션이었다. 다 죽어 가는 사람도 숨만 붙어 있다면 살릴 수 있다고 여겨지는.
휘청거리던 그대로 남자의 몸이 굳었다. 아픈 척을 하려다가 들킨 아이처럼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든 리리카가 눈을 데구르르 굴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하하…. 그게.”
어설프게 변명을 늘어놓으려는 리리카를 상대로 베를리아가 가볍게 웃었다. 애초에 그를 아실에게 데려간 것도 포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체력과 정신적 피로를 해결해 주기 위함이었다. 즉, 이미 암살자들에게 입은 상처는 그에게 아무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럼 잘 가요.”
베를리아가 깔끔히 안녕을 고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안 통하네.”
두 사람이 가버린 자리에 홀로 그 한마디만 맴돌았다.
***
“가끔은 베릴이 아무도 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데니안과 리암의 방문부터 리리카라는 남자의 등장까지. 결코 평탄하지 않은 저녁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오늘의 축제는 크게 즐기지 못하고 베를리아와 메리쉬는 저택으로 귀가했다.
“풋, 그 말은 마치 내가 엄청 많은 사람을 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녀가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분명 원작에서 악녀라는 면에 지나치게 치중되어 소비된 면이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선인이라는 것은 아니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남의 목숨 백보다 제 사람의 목숨 하나가 귀한 사람이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남들은 아랑곳하지 않고서.
그건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고귀한 희생 같은 건 아니었다. 그건 결국 제 행복을 위한 일이었으니까. 그저 잃고 싶지 않은 스스로의 욕심으로부터 비롯된 이기심이었다. 그로 인한 잔인함이었다.
그녀도 그랬다. 베를리아와 상당히 닮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당신의 손길이 미치죠.”
메리쉬가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들어 그 손바닥에 깊게 입 맞추었다. 그는 여전히 기억했다. 수도의 가장 낮은 자들이 모여드는 뒷골목. 그런 곳에 사는 이들조차 발걸음을 돌리는 폐수거장.
거기에는 수도의 온갖 쓰레기들이 버려져 있었다. 심지어는 전염병이나 고칠 수 없는 중병에 걸린 인간들까지도.
아무도 그들을 돌보지 않았다. 모두가 그들을 보고 있으면 인상을 찌푸리거나 악취에 고개를 돌리기 바빴다. 그곳의 쓰레기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저는 그곳에서 사람을 본 건 처음이었어요.”
그래, 그날. 쓰레기였던 소년이 그곳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봤다. 병에 걸리지도 않았고 나이가 들거나 어느 신체 한 곳이 망가져 더 이상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다고 여겨진 그런 자들이 아니라.
메리쉬는 아까 베를리아를 바라보던 사내를 떠올렸다. 왜였을까? 그 검은 눈 속에서 제 모습을 비춰낸 건.
‘나랑 가자.’
오물과 쓰레기, 폐물들로 인해 발생한 먼지들과 오염된 물. 그로 인한 악취. 거뭇거뭇한 정체도 알 수 없는 더러운 것들을 온갖 곳에 묻히고 있던 그곳의 버려진 것들.
그날 그곳에서 유일하게 새하얗게 빛나는 것이었다. 그 작은 손이 제 앞으로 내밀어지는 순간 그는 구원받았다.
‘…리리카예요.’
그 이름은 메리쉬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단언컨대 베를리아와 가장 오래 함께 한 건 자신이었다. 그런 그의 기억 속에서도 없는 자가 베를리아와 어디선가 마주쳤을 확률은 극히 적었다.
‘그런데도 왜….’
그 자식은 그런 눈으로 이 사람을 보았는가. 메리쉬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성녀나 황태자 같은 사람들은 그런 곳이 있다는 건 상상조차 못 했다. 아니면 알면서도 그들의 발길이 닿기에는 너무 더럽고 추해서 연민조차 들지 않다던가.
“저는 그런 베릴을 좋아하지만.”
메리쉬의 늪과 같은 녹색 눈이 음울하게 빛났다. 까만 밤을 걷는 자들에게는 언제 뜰지 모를 태양보다도 당장 빛을 내려 주는 달이 더욱 절실한 법이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이라면 치를 떨 므시아의 그 작자들이 당신 앞에서는 꼼짝도 못 하는 것이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그런 당신은 어쩐지 영원히 내 것이 될 수 없을 것 같아.’
베를리아 리들턴이 그런 사람이기에 그는 지금 이곳에 살아 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차마 충족되지 않는 캄캄한 욕망이 메리쉬를 가라앉게 했다.
“메리쉬.”
그의 이야기를 얌전히 듣기만 하던 그녀가 이름을 불렀다. 바라보고 있는 녹빛 시선 속에 고스란히 베를리아 리들턴을 향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이제 베를리아 리들턴은 자신이었다. 그렇지만 우습게도 그녀는 지금 질투하고 있었다.
저 시선은 내가 네게 칼을 꽂아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베를리아 리들턴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베를리아 리들턴이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이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날 온전히 가지고 싶어?”
탐이 났고 질투가 났다. 눈앞의 남자를 온전히 가지고 싶은 것은 사실 그녀였다.
“방법을, 알려 줄까?”
섬뜩하게 빛나는 자안이 담긴 눈매가 요요히 휘었다. 뱀처럼 그녀의 팔이 메리쉬의 목에 감겨들었다. 그대로 그가 넘어왔다. 달빛 아래 그림자가 하나처럼 겹쳐졌다.
이 남자는 이제 자신의 것이었다. 이제 내가 이 사람의 베를리아 리들턴이다.
네게서 빼앗을 것이다. 억울하다면… 지금 이곳에 없는 베를리아 리들턴, 너의 잘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