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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26)화 (26/148)

26화. 뱀은 먹이를 통째로 삼킨다(2)


 

순간 메리쉬의 머릿속이 빠르게 굴러갔다. 무엇부터 물어야 할 것인가?

“…이걸 어떻게 구했지?”

그는 찰나의 침묵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상자 속에 든 것은 가히 재스민의 권한으로 거절할 수 없을 만도 했다. 그 속에는 바로 최상급의 포션을 농축해서 만든 알약 형태의 정제 포션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려 네 개씩이나.

정제 포션 하나는 무려 최상급 포션 열 개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정제 포션은 신전의 고위 신관들조차도 만들기 힘든 것이어서 아무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심지어 그 베를리아 리들턴조차도.

“그에 대해서는 제가 직접 베를리아 양에게 설명해 드리고 싶은데요.”

얄밉도록 느긋해 보이는 얼굴은 계속 미소 짓고 있었다. 메리쉬의 입이 굳게 다물려 있자 리리카가 다시 물었다.

“이제 들어가도 되나요?”

정말 싫었지만, 메리쉬는 끝내 그 자가 들어올 수 있도록 비켜 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정제 포션이야말로 베를리아에게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어찌 알았는지, 알고 가져온 것인지, 혹은 우연인지 몰라도.

***

“…흐음, 메리쉬?”

방금 막 잠에서 깨어난 베를리아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메리쉬의 걱정대로 그녀는 기척에 예민한 사람이었다. 뺨을 감싸 오는 손이 베를리아의 잠을 깨웠다. 자꾸만 감겨 오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녀가 그를 바라봤다.

뒤늦게 정신이 들자 제 목소리에 움찔하는 손과 한발 물러나는 기색이 느껴졌다. 메리쉬가 아니란 것쯤은 그녀도 금방 알아차렸다. 곧 선명해진 시야에 들어오는 인영에 베를리아가 확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금방 일어났기 때문인지 목이 까끌까끌했다. 상체를 일으킨 베를리아가 협탁 위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 없는 상대를 불렀다.

“카를로스 에덴버.”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했던가. 어젯밤 그녀는 메리쉬에게 그가 몰랐던 욕망을 가르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했다. 그런 이유로 머리는 무거웠고 몸은 뻐근했다. 그런데 아침부터 황태자를 상대하려니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은 리들턴의 저택이었다. 이 아침부터 왜 저 화상의 얼굴을 봐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언제든 필요하다면 날 찾아와, 카를.’

그러나 곧 그것은 황태자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은색 열쇠를 확인하는 순간 알게 되었다. 기억 속에 저 열쇠를 카를로스에게 쥐여 주는 베를리아 리들턴이 있었다.

하긴 애초에 흑마법으로 잔뜩 둘러싸인 이 저택에 함부로 침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도 리들턴 저택에 존재하는 그녀의 수하들 중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만큼 이렇게 몰래.

‘망할, 원작 속에는 이런 이야기 없었잖아.’

베를리아 리들턴의 기억이란 건 상당히 불규칙적으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녀가 어떻게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책 속에 서술되지 않은 부분은 가끔 그녀를 당황스럽고 불쾌하게 만들기도 했다.

특히나 카를로스 에덴버만 없었다면 아주 만족스러운 아침을 맞이할 뻔한 오늘 같은 날은 더더욱.

그녀가 다시 기억을 더듬어 카를로스의 쪽으로 손을 뻗으며 주문을 외웠다. 그나마 한 번 기억을 떠올리고 나면 그에 연관된 기억을 찾아내는 게 어렵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아스모디아.”

“…!”

카를로스가 반항할 새도 없이 검은 열쇠가 그녀의 손 안으로 날아들었다. 열쇠에 걸린 금지된 마법은 애초에 베를리아가 걸어둔 것이었다. 그러니 주문에 따라 그 주인의 손으로 귀환한 것이다.

“앞으로 이런 무례는 좌시하지 않겠어.”

그녀가 황태자를 서늘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리 이전의 베를리아 리들턴이 그에게 주었다고 하나 이제 와 사용하는 꼴이 정말 염치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작자였다.

“너 같은 게 여기에 드나드는 거, 매우 불쾌해.”

베를리아는 조금의 예의도 갖추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애초에 황태자로 취급받고 싶었다면, 카를로스는 이런 식으로 쳐들어오진 말았어야 했다.

“그 남자와 침실까지 공유하나 보지?”

싸늘하고도 경멸 섞인 베를리아의 어조에 이를 악문 카를로스가 짓씹듯이 내뱉었다. 눈 뜬 장님이 아닌 이상 침실의 분위기를 모를 수는 없었다. 밤이 유독 길었을 것 같은 침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카를로스의 머리는 그 상대를 쉬이 추측해냈다.

베를리아는 그 반응 또한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침실 사정에 그가 관여할 게 뭐란 말인가.

그러나 곧 생각을 바꾼 그녀가 요요한 미소를 만면에 퍼트리며 그 물음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보면 알지 않아?”

베를리아가 머리칼을 쓸어 올리자 느슨하게 묶은 가운 사이로 하얗고 창백한 목덜미가 드러났다. 그 사이로 보이는 얼룩덜룩한 자국들과 어딘가 기묘한 침실의 분위기. 그것들은 카를로스의 머릿속에 되지도 않을 상상들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 천박한…!”

어쩐지 그 상상들이 카를로스의 뇌를 달궈놓는 듯했다. 눈 주위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그가 베를리아에게 달려들려던 순간이었다.

쾅! 와장창-

문이 열림과 동시에 퍽 소리가 나고 황태자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카를로스를 집어던진 후 베를리아가 앉아 있는 침대의 휘장을 내려 그녀를 꼼꼼히 가려 주며 메리쉬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베릴.”

“괜찮아, 빨리 왔네.”

저택의 다른 이들이 황태자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은 검은 열쇠 탓이었다. 메리쉬는 그녀가 카를로스에게서 그것을 빼앗자마자 달려온 셈이었다.

“저자가 어떻게 여길.”

“미안, 내가 아주 예전에 주고 회수하는 걸 잊어버렸어.”

리들턴 저택은 요새와 같은 곳이었다. 베를리아는 뒷세계의 주인인 므시아의 수장이었다. 무수한 위협으로부터 안전해지려면 그 정도는 필수였다. 그런 곳을 카를로스 따위가 침범하여 들어온 것이다. 자책하려는 메리쉬를 그녀가 달래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온 거지?”

콱.

베를리아의 말을 들은 메리쉬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무방비한 상태로 단단한 벽에 내쳐진 카를로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그대로 메리쉬의 발에 목이 짓눌렸다. 숫제 버러지라도 대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큭…!”

그대로 죽여 버릴 셈이었다. 메리쉬는 진심으로 치솟는 살의를 그대로 황태자에게 겨누었다. 베를리아가 황태자에게 당할 리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감히 무얼 바라여 그녀의 침실에 숨어들었단 말인가.

“그만, 메리쉬.”

황태자가 바르작거리는 모습을 휘장 안에서 여유롭게 지켜보던 베를리아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여기서 황태자가 죽으면 조금 귀찮아져.”

이곳은 아무래도 수도에 있는 리들턴의 저택이었다. 처리하라면 못할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하나뿐인 황위 계승자가 죽어 나가면 여러모로 번거로운 일이 생길 터였다.

“감히 날 이렇게 대해…!”

메리쉬가 물러나자 곧바로 몸을 일으킨 카를로스가 노성을 터트렸다. 가운을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난 베를리아가 나직하게 경고했다.

“시끄럽게 굴면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그대로 쫓겨나게 해 주겠어.”

자유롭게 흐트러진 암녹색 머리칼이 가운을 따라 매끄럽게 흘러내렸다. 그 모습이 어딘가 위험해 보였다. 위험하고, 또.

“재스민, 불청객을 방 밖으로 내보내.”

베를리아에게 닿아 있는 카를로스의 시선을 제 몸으로 가려 차단한 메리쉬가 명령했다. 제게 다가오는 재스민에게 사납게 굴려던 황태자의 기세가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억눌렸다.

“내 사람에게 함부로 굴면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카를로스의 입이 꾹 다물렸다. 한때 베를리아의 사람이었던 그는 그 경고가 허투루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가 아는 베를리아 리들턴은 얼마든지 미친 짓도 저지를 수 있는 여자였다. 아직 황제도 아니고 성검도 지니고 있지 않은 카를로스는 그녀에게 대적할 수 없었다.

‘…역시 죽였어야 했는데!’

감히 제게 이렇게 굴다니. 베를리아 리들턴을 보며 카를로스가 아드득 이를 갈았다. 그러나 곧 눈앞에 침대 위에 앉아 있던 베를리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 순간을 소유하는 것이 자신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도. 방을 나서려는 그의 눈에 메리쉬가 들어왔다. 그리고 카를로스는 방금 자신이 했던 생각을 다른 생각으로 쉬이 덮어버렸다.

‘저놈만 없다면….’

기이하게 일렁이는 푸른 눈이 메리쉬에게 닿았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분명 그의 것이었다. 죽고 살리는 것조차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데 지금 저자는 감히 베를리아 리들턴을 제게서 갈라놓고 있었다. 메리쉬는 결단코 카를로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게 더욱 분노를 부추겼다.

***

“이게 아침부터 무슨 일일까?”

하녀들의 시중을 받아서 여유롭게 준비를 끝내고 나온 베를리아가 응접실의 쇼파에 앉아 있는 세 사내를 바라봤다. 안 그래도 아침부터 정신이 사나웠는데 치장 중 재스민이 또 다른 방문자를 알려왔다.

‘로베르 후작이 찾아왔습니다.’

어제 데니안의 일이 벌어진 까닭에 제가 하지 못한 말이 있다며 그것을 꼭 전해야겠다고 우긴다는 것이었다. 이것들이 여기가 시장통인 줄 아나. 저들 멋대로 드나들려고 하는 게 그들에게 복수하려는 목적만 아니었다면 죄다 내다 버렸을 터였다.

“다시 뵈니 반가워요, 베를리아 양!”

그녀가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주인을 기다리던 강아지처럼 벌떡 일어난 리리카가 외쳤다. 말 그대로 아주 반갑게 생글거리며 성큼 다가오는 모습이 그녀가 마치 아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상대라도 되는 듯했다.

“나는, 그, 할 말이 있어서….”

아침부터 불쾌하다는 기색을 감추질 않는 베를리아의 기세에 리암이 우물쭈물 말을 꺼내었다. 황실 마법사들을 진두지휘하는 그 로베르 후작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또, 또, 사내놈인가.”

카를로스가 핏발 선 눈으로 베를리아를 노려보며 음산하게 읊조렸다. 베를리아가 눈앞의 전혀 아름답지 않은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음, 그런데….”

‘정말이지….’

그리고 짝 손뼉을 친 리리카가 그녀가 하던 생각을 먼저 입 밖으로 꺼내놓았다.

“아침부터 개판이네요!”

그래 정말, 개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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